'썩어도 준치'라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17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서 패배의 쓴 맛을 보며 불안감을 드리웠던 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이 2020 도쿄올림픽 4강에 진출하며 자존심을 지켰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프랑스에 7점차(76-83) 충격패를 당했던 미국은 이후 심기일전하여 이란과 체코를 제압하며 8강행을 확정지었다. 3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8강에서는, '2019 농구월드컵 우승국'이자 FIBA(국제농구연맹)랭킹 2위의 난적 스페인을 95-81로 물리치며 준결승에 올랐다.

'드림팀'을 자부하는 미국과 '무적함대'로 불리는 스페인은 2000년대 이후 국제무대에서 세계농구의 패권을 놓고 경쟁해왔다. 스페인은 흔히 축구로 더 유명하지만 농구에 있어서도 유럽 최고의 프로리그로 꼽히는 '리가 ACB'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역 정상급 NBA리거들도 다수 배출한 세계적 농구 강국이다. FIBA 농구월드컵 우승 2회(2006, 2019), 유로바스켓(유럽대륙선수권대회)에서 3회(2009, 2011, 2015)를 달성했으며, 올림픽 결승(1984, 2008, 2012)에도 3번이나 진출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스페인은 파우 가솔, 마크 가솔 형제를 비롯하여 리키 루비오, 알렉스 아브리네스, 호세 칼데론, 윌리 에르난고메즈 등 쟁쟁한 선수들을 잇달아 배출하며 '황금세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당시의 스페인은 세계최강을 자부하는 미국과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팀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정작 스페인은 고비마다 미국을 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국-스페인의 '올림픽 악연'

무적함대와 드림팀의 본격적인 '올림픽 악연'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양팀은 8강에서 만났다. 이때의 미국은 올림픽 4연패에 도전하고 있었지만 예선전에서 푸에르토리코-리투아니아에 연달아 덜미를 잡히며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국은 명장 래리 브라운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팀 던컨-앨런 아이버슨-르브론 제임스-카멜로 앤소니 등 NBA 스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지만, 정작 실제로는 이름값만 화려하고 포지션 밸런스와 조직력이 엉망진창이었던 팀이었다.

스페인이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이라고 평가받았지만, 정작 잘 싸우고도 스테판 마버리에게 무려 31점을 허용하며 94-102로 무너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기복 심한 활약으로 드림팀 수준에 맞지않는다고 욕을 먹었던 마버리가 가장 맹활약했고, 미국의 외곽슛이 올림픽에서 제대로 폭발했던 거의 유일한 경기가 바로 이 스페인전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4강전에서 결국 아르헨티나에게 덜미를 잡히며 최종성적 동메달에 그쳤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NBA 최정예멤버로 드림팀을 꾸리기 시작한 미국 농구 대표팀이 유일하게 금메달을 수확하지 못하며 흑역사로 남은 대회가 이 아테네올림픽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스페인이 어쩌면 드림팀을 넘을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 그리고 그 뒤로 18년간이나 이어질 장대한 악연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스페인 농구는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전성기에 돌입했다. 2006 농구월드컵첫 우승에 이어 2009-2011 유로바스켓을 2연패했고, 올림픽에서도 2008 베이징과 2012 런던대회에서 연이어 결승에 진출하며 화려한 성적을 올렸다. 가솔 형제가 NBA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 빅맨으로 성장했고 선수들의 조직력과 국제대회 경험도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적함대의 전성기는 하필이면 명예회복을 노리던 드림팀 '제2의 전성기'와 정확하게 겹쳤다. 아테네올림픽과 농구월드컵(2002, 2006)까지 3회 연속 세계무대 정상등극에 실패하며 자존심을 구긴 미국은 드림팀이라는 애칭까지 버리고 스스로를 '리딤팀(redeem team·탈환대)'이라고 명명하며 명예회복에 나섰다. 코비 브라이언트-르브론 제임스-카멜로 앤소니-케빈 듀란트-크리스 폴 등 최고의 선수들을 결집시킨 미국은 2008 베이징-2012 런던-2016 리우 대회에서 다시 한번 올림픽 쓰리핏(3연패)을 달성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스페인은 올림픽 결승에서 미국을 2회 연속 만나 다득점 경기를 펼치며 상당히 선전했으나 고비마다 슈퍼스타들의 물량공세를 앞세운 드림팀을 넘어서지 못했다. 베이징 대회에서는 107-118로 패했고, 리턴매치였던 런던대회에서도 100-107로 무너졌다.

스페인은 2010년대 중반 이후 황금세대가 노쇠화하며 전력이 정점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2016 리우대회에서는 4강에서 미국을 다시 만났지만 76-82로 고배를 마시며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2019 농구월드컵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른 스페인은 사실상 스페인 황금세대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2020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미국전 설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미국만 만나면 꼬이는 스페인의 징크스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이끄는 이번 미국대표팀은 1992년 드림팀 출범 이후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만 만나면 꼬이는 스페인의 징크스는 계속됐다. 스페인은 농구월드컵 MVP를 차지한 리키 루비오가 38점의 원맨쇼를 펼치며 분전했지만, 케빈 듀란트(29점)과 제이슨 테이텀(13점)-즈루 할러데이(12점) 등을 앞세운 미국의 빠른 스피드와 외곽슛을 넘지 못하고 또 한번 대량실점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미국이 올림픽 남자 농구에서 금메달을 14차례를 수확할 동안, 스페인은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스페인이 두 번 정상에 올랐던 농구월드컵에서는 미국이 스페인을 만나기 전에 탈락하는 행운이 따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올림픽에서는 미국과 무려 13번이나 맞붙었으나 모두 스페인이 전패를 기록했다. 특히 2004 아테네대회 8강전을 시작으로 2008 베이징-2012 런던 결승전, 2016 리우 4강전, 2020 도쿄 8강전까지 최근 5회 연속 스페인을 올림픽에서 탈락시킨 유일한 팀이 바로 미국이었다. 삼국지연의의 고사를 패러디하면 '하늘은 왜 무적함대를 낳고 또 드림팀을 낳았는가'라는 탄식이 나올 만한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최대 희생양이 된 것은 바로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농구전설로 꼽히는 파우 가솔이다. 그는 스페인이 다섯 번의 올림픽에서 번번이 미국을 넘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빠짐없이 지켜봐야 했던 유일한 개근 멤버다. NBA에서도 최정상급 빅맨으로 군림했던 선수답게 가솔은 미국전에서도 20-10(득점-리바운드)을 연이어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제몫을 다했다. 그러나 빠르고 운동능력이 좋은 미국 빅맨들의 물량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후반에 체력이 떨어져 고배를 마시는 것이 반복된 패턴이었다.

어느덧 최고령 노장이 된 가솔은 선수인생의 마지막이 될 올림픽 미국전에서 이날 약 6분 출전에 그치며 득점없이 리바운드 3개에 그쳐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노쇠한 가솔이 아직도 대표팀 주축 빅맨으로 뛰어야 할 만큼 스페인이 세대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기도 했다. 이로서 20대 유망주에서 40대 노장이 되기까지 스페인 농구의 올림픽 도전사와 황금세대의 흥망성쇠를 모두 함께했던 가솔과 '영광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다시 한번 스페인을 울린 미국은 호주와 준결승에서 만나게 됐다. 2019 농구월드컵에서 7위에 그치며 체면을 구겼던 미국으로서는 어느 정도 자존심 회복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골밑 높이와 조직력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다시 한번 정상에 올라 명가의 자존심을 지켜낼지, 2004 아테네올림픽의 흑역사가 재현될지 세계농구팬들의 시선이 드림팀의 향후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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