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06 20:30최종 업데이트 21.08.0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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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이름이 새겨지지 않기를. ⓒ 림수진

 
장벽이 있다.

누군가는 그 너머를 천당이라 부르고, 그 이편을 지옥이라 부른다. 지옥으로부터 천당으로 닿기 위해 오늘도 수백 명이 장벽을 넘어선다. 그 중 운이 좋은 누군가는 천당에 이르겠지만, 대부분은 다시 지옥으로 밀려온다. 조금 더 운이 없는 경우라면 그 길 어디쯤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다. 수십 년 장벽을 사이에 둔 채 반복되는 일상이다.

절대로 오지 말라는 천당 사람들과 기어이 가겠다는 지옥 사람들의 실랑이가 해를 거듭할수록 유난스럽더니 최근 몇 년 사이엔 장벽이 더 높아지고 곳곳에 철조망이 둘러지는가 하면 전기가 통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장벽을 향해 꾸역꾸역 사람들이 몰려온다. 목숨을 걸고, 지옥으로부터 천당에 닿기 위해.

천당의 목전
 

멕시코와 미국 사이엔 3160km 길이의 인공 및 자연장벽이 가로지른다. 그 장벽의 최서단에서 어린 아이 두 명이 놀고 있다. ⓒ 림수진

 
수천 킬로미터를 올라와 천당을 목전에 두는 곳이 멕시코 국경도시 '티후아나'(Tijuana)다. 아마도 영화에서, 혹은 미국 남서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도시 이름이다. 촘촘한 감시와 규율 덕분에 어느 정도 뻔한 예측 속에 여행을 하는 경우라면 간혹 호기심과 모험심이 발동하여 한 번쯤 살짝 내려가 보고 싶은 곳이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 잠시 용기를 내어, 여행의 묘미 중 '짜릿함'을 느끼고 싶다면 말이다.

지옥으로부터 천당에 들기는 흡사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지만, 잠시 천당의 지루함을 잊고자 지옥에 내려오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국경 부근에서 "To Mexico"라 쓰인 도로 표지판만 찾으면 된다. 차를 타고 오든 걸어서 오든, '어~ ' 하다 보면 어느새 멕시코에 와 있을 것이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길이다.

혹시 중간에 정신이 들고 아차 싶어 다시 돌아가고자 한들 일단 천당에서 지옥으로 넘어오는 문에 들어선 이상 멕시코 땅을 밟기 전엔 돌이킬 방법이 없다. 놀이 공원에서 놀이 기구에 오른 이상 중간에 다시 내릴 방법이 없는 것처럼. 어쨌거나 멕시코에 닿을 즈음엔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환상과 환청을 보고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미국 측 국경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로 표지판이다. 일단 멕시코를 향한 길목에 들어서면 멕시코에 닿기 전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 ⓒ 림수진

 
티후아나, 전체 인구 2백만 명이 채 되지 않는 곳에서 매년 2천 명 이상이 피살되는 곳이다. 그리하여 몇 년째 세계에서 가장 높은 피살율을 보이는 도시이니 살짝 긴장은 되겠지만, 그래도 기왕에 넘어왔다면 즐길 거리는 제법 있다. 물론 취향에 따라 다르겠으나, 다운타운 '혁명의 거리' 주변으로 엄청난 유흥주점들이 몰려 있고 약국마다 싸구려 비아그라가 넘쳐난다. 조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멕시코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기념할 만한 기념품 역시 거리에 즐비하게 널려 있다.

'후아나 아주머니'(티아 후아나, Tia Juana)라는 좀 독특한 이름의 농장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던 변방의 작은 마을이 국제공항까지 갖춘 티후아나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말 주중을 막론하고 북쪽으로부터는 숱한 사람이 국경 같지 않은 국경을 넘어 이곳을 즐기러 왔고, 남쪽으로부터는 어떻게든 미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그 사이 명색이 이 도시의 시조 격인 후아나 아주머니는 값싼 유흥을 찾아 내려오는 위쪽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진화를 거듭했다. 오늘 날 거리 곳곳의 숱한 '후아나 아주머니들'이 그들이다. 이곳 티후아나로 유흥을 즐기기 위해 내려오는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선 포주를 빗대어 부르는 말이니, 그녀의 이름이 불리는 곳에서라면 바로 위 천당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싼 값에 술을 마실 수 있고, 처방전 없이 약을 구할 수 있고, 때론 그 곳에서라면 '관용적'으로 허용된 성(性)까지 살 수 있다. 오명도 이런 오명이 없다.
 

티후아나 거리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아그라 판매 광고판 위에 친절하게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 림수진

 
글쎄, 괜히 권했다가 얼마나 많은 욕을 얻어먹을지 알 수 없지만, 기왕 미국 남서부를 여행한다면, 이곳 티후아나에 살짝 한 번 다녀갈 것을 감히 추천하고 싶다. 이유라면, 흔히 지옥이라 불리는 장벽의 이쪽 티후아나에도 삶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장벽 너머 천당이라 불리는 그곳과 오랜 세월 면면히 엮여온 삶들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길거리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아미고'(Amigo, 친구)들을 좀 더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란 바람 때문이다.

사실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이어지는 다운타운의 모습은 제3세계 어느 곳이나 여행 중 마주할 수 있는 흔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싼 값에 적당한 일탈과 유흥을 즐기기에 딱 좋은 정도다. 그곳만으로도 충분히 족하겠으나 기왕에 들어섰다면 그곳에서 용기를 내 좀더 깊숙이 다가서길 감히 권한다. 장벽이 있는 곳까지.
  

1950년대 멕시코와 미국을 가르던 국경은 오늘날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 Univision 화면

 
불쑥불쑥 나타나는 장벽, 서쪽으로 가보라

티후아나에서라면 어디를 가도 불쑥 불쑥 장벽이 나타나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중엔 '설마 아니겠지' 싶은 장벽도 있다. 오래전 만들어진 장벽일수록 더 그렇다. 낮고 낡았고 녹슬었고 때론 정겹다. 물론 다운타운에서도 장벽이 보이고 그 너머에 깔끔하고 정돈된 '미국'이 보인다.

어디서든 장벽을 만난다면 서쪽으로 따라가 보시라. 지옥과 천당을 가르는 장벽이 해지는 곳 땅 끝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다 더 이상 디딜 곳을 땅으로 잇지 못함에도 멈추지 않고 태평양 바다 속으로 이어지는 곳까지.

광활한 태평양을 마주하고 수직으로 선 촘촘한 살과 그 위에 다시 철판을 덧대 키를 높인 구조물과 다시 또 그 위에 철조망을 얹어 그 누구도 감히 그 위에 올라설 수 없는 육중한 장벽이 바다를 향해 빨려 들어가다 멈춘 그곳에 이르길 권한다.
  

2018년 4월,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멕시코 티후아나 국경에 닿은 중앙아메리카 이주자들 중 일부가 장벽 위로 올라섰다. 이후 장벽 위에 철조망이 쳐졌다. ⓒ Univision 뉴스화면

 
그곳이라면, 천당에 들고자 하는 욕망의 무수한 흔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천 킬로미터를 올라와 이곳 장벽에서 길이 막힌 채 망연한 사람, 잡힐지 뻔히 알면서 호기롭게 장벽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 땅 끝을 지나 물속으로 한참 이어진 장벽을 따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사람, 그리고 목숨을 잃고 이름으로만 남은 혹은 그마저도 없이 죽음을 카운팅하는 작은 십자가로만 남은 무수히 많은 욕망의 흔적들이 그 곳에 존재한다.

누군가는 장벽을 끌어안고 그곳에서 삶의 하루를 산다. 하루 종일 장벽 이쪽에 앉아 하염없이 장벽 저쪽에서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장벽을 사이에 둔 채 가족을 만나 꼬깃꼬깃 접은 돈을 촘촘한 구멍으로 전하는 사람,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 같이 사진을 찍는 사람, 장벽을 사이에 두고 확성기로 서로 노래를 불러가며 파티를 하는 사람들까지. 그들 스스로 천당에 들지 못하였지만 가족들 중 누구라도 천당에 들어갔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인 사람들이다.
 

멕시코 측에서 한 가족이 국경선 너머의 가족과 대화하고 있다. ⓒ Notimex 화면

 
대부분의 멕시코 사람들이 그렇다. 서로가 끌어안지 못할 뿐, 손가락 하나쯤 디밀어 만져볼 수 있는 장벽이 그저 감사한 사람들이다. 오직 가족 누군가의 손가락이라도 잡아 볼 수 있는 그 장벽에 닿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어쩌면 장벽이 곧 천당인 셈이다.

이런 모습들이야 말로 천당과 지옥, 혹은 합법과 불법으로 갈리는 이분법만으론 이해가 쉽지 않을 단면들이다. 오랜 시간 두 나라를 둘러싼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삶의 파편들이기 때문이다. 괴나리봇짐 하나 메고 오히려 환영받으며 장벽조차 없던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올라가던 호시절도 있었기 때문이다.

장벽 위 대형 그림... 1년에 단 한번, 3분간만 열리는 문
 

지난 7월 24일 멕시코 국경도시 티후아나 주민들이 페인트와 붓을 들고 나와 국경 장벽을 단장하고 있다. ⓒ Milenio 화면

 
마침 지난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장벽이 꽃단장을 시작했다는 뉴스다. 멕시코 쪽에서 바라보는 장벽 위로 대형 그림이 그려졌다. 다섯 명의 젊은이다. 그려진 이들은 미국 측의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Deferred Action for Childhood Arrivals, DACA) 프로그램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추방된 청년들이다. 그린 이들 역시 같은 아픔이 있는 청년들이라 하니 장벽에 자신들의 아픔을 투영한 셈이다.
 

7월말 멕시코 티후아나 측 장벽의 서쪽 끝에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그려졌다.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가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지내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DACA)' 프로그램이 대폭 축소되면서 다시 멕시코로 추방된 이들의 실물이 그려졌다. 그림을 그린 이들도 DACA 프로그램 축소로 인해 추방된 젊은이들이다. ⓒ Imagen 뉴스 화면

 
DACA는 미성년 시절 본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국에 입국하여 자동적으로 불법 체류자가 된 청년들에 대해 학업이나 직장 등과 같은 일정 요건을 갖추면 추방을 유예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는 임기 내 이 지위에 대한 신규신청을 전면 중단시켰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 즉,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국으로 데려가졌던 이들이 다시 멕시코로 추방되었다. 그림을 그린 이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이주하여 불법체류자가 되고 해당 국가가 정한 보호프로그램으로부터 소외된 채 다시 낯선 나라로 추방된 이들의 아픔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것 같아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어릴 적 부모 따라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멕시코로 추방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장벽 위에 그려지자 시민들도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장벽으로 모여 꽃과 무지개와 새를 그려 넣었다. 무엇보다도 국경 한편에 있는 '희망의 문'을 정성 들여 단장했다. 멕시코와 미국을 가르는 국경의 최서단에서 유일하게 '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곳, 실제로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그 문을 곱게 단장했다.
  

멕시코 티후아나 시민들은 국경 장벽을 “형제 장벽”이라 명하고 그 중 한 곳에 설치된 유일한 문에는 “희망의 문”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일년에 한 번 어린이날 혹은 어머니의 날에 이 문이 열리고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상봉한다. 각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딱 3분이다. ⓒ 림수진

 

국경선 장벽의 문이 열리자 양측에서 가족들이 달려 나와 포옹하고 있다.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딱 3분이다. ⓒ Notimex 화면

 
매년 어린이 날(4월 30일) 혹은 어머니의 날(5월 10일), 희망의 문이 열리면 국경을 사이에 둔 채 십 수 년 이상 만나지 못하고 살던 가족들에게 서로 끌어안을 수 있는 3분의 시간이 허락된다. 결코 길다 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국경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으로 갈려 헤어지지만, 그 3분의 시간이 불법의 신분으로 조마조마하게 살아가는 최소 5백만 명 이상의 미국 쪽 멕시코인들에겐 가족을 끌어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애석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 창궐의 여파로 2020년 3월 이후 육로로 이어지는 국경이 닫히고 희망의 문 역시 열리지 않았지만 2021년이 가기 전 다시 열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붓과 페인트 통을 들고 나와 '희망의 문'을 새롭게 단장했을 것이다.

글쎄,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역병이 언제쯤 온전히 사라질지 알 수 없으나 언제든 희망의 문이 다시 열리는 날을 기대하고 그곳에 서서 딱 3분 간 끌어안기가 허용되는 수많은 가족들의 환희를 조금이라도 상상하며 느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흔히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흔히 지옥이라 불리는 이곳 멕시코에 잠깐 내려와 볼만한 충분한 의미가 되지 않을까?
 

1970년대만 해도 국경으로 선 철구조물 사이로 작은 아이들이 왕래할 수 있었다. ⓒ Univision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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