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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7년 7월 전남 광양에 있는 직장에서 퇴직하고 곧바로 전주로 이사했다.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데 사다 놓은 시원한 물은 금세 미지근해졌다. 이삿짐 도우미 아저씨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아, 시원헌 물 좀 없소!' 하신다. 마치 이 소리를 옆집 아주머니께서 듣기라도 한 듯 매실 진액을 탄 얼음 동동 띄운 물을 가지고 오는 게 아닌가!

"아니, 이삿짐 옮기러 댕긴 지 15년이 되았는디 세상에 이사허는 날 옆집 아파트서 요로케 내다봄선 물 갖꽈분 집은 첨이요. 참말로 놀래 부렀소. 옆집을 아주 잘 둬 부렀고만요. 이사허는 쥔장님은 전생에 복을 겁나게 뿌려놔 붓는 갑소!"

이삿짐 도우미분들은 옆집에서 가지고 온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키며 연신 땀을 훔치며 무거운 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얼음물이 바닥이 나자 옆집 아주머니는 이를 알고나 있었다는 듯 또 매실 진액을 탄 얼음물을 가지고 왔다.

"아따, 참말로 씨언허게 잘 마셔 부렀소. 땀이 비 오듯 쏟아지도만 얼음 둥둥 뜬 물을 벌컥벌컥 마셔 붓도만 뱃속에서 놀래가꼬 그렁가 땀이 단박에 그쳐 부요."

이사한 아파트는 두 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다. 옆집은 딸과 아들을 두고 단란하게 보금자리를 꾸미고 사는 금실 좋은 40대 부부였다. 이사 후 두 집은 친형제처럼 따스한 정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옆집 부부는 늘 웃는 얼굴에 넘치는 인정, 살가운 인품을 가진 분들이셔서 퇴직 후 사는 재미가 쏠쏠했다.
 
음식과 선물에 동봉한 채원이네 어머니의 손편지.
▲ 채원이네 어머니의 손편지. 음식과 선물에 동봉한 채원이네 어머니의 손편지.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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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우리 집에 먹을 것을 가지고 오면 꼭 마음을 담은 손편지를 동봉했다. 아내는 먹을 것을 맛보기보다 먼저 손편지를 읽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채원이 아빠도 어디 나무랄 데 없는 참 좋으신 분이지만 각시 하나는 참 잘 얻었어. 음식만 갖다주는 게 아니고 마음조차 따뜻하게 전해주니 얼매나 좋아. 채원이 아빠 얼굴을 자세히 보면 각시 복이 얼굴에 착 달라붙어 있당게."

양푼 속에 한 해의 마음을 담아온 꽃다발
 
올 한 해 새로운 이웃집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 양푼 속에 한가득 핀 꽃바구니. 올 한 해 새로운 이웃집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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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하거나 과일을 사거나 농사 지어 수확을 하게 되면 서로 옆집부터 먼저 챙겼다. 고향 임실에서 농사 지어 담은 쪽파, 갓김치, 무김치, 배추김치, 싱건지(물김치)를 채원이네 집에 갖다 줬더니 싱건지 담아준 양푼 속에 한가득 꽃다발을 담아 왔다.

꽃다발 속에는 '올 한 해 새로운 이웃집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손편지가 들어 있었다. 양푼 속에 담긴 '마음 꽃'. 어찌나 곱게 피었던지 아들과 딸은 계속 바라보며 "야, 채원이네 어머니 최고다, 최고여!" 싱글벙글 웃음꽃 더했다. 아내는 "어찌 양푼 속에 한 해의 마음을 이리도 예쁜 꽃으로 채워주는지 우리는 옆집 근처에도 못 가겄고만…" 하며 껄껄 웃었다.
 
옆집 채원이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봄을 통째로 선물해주셨다.
▲ 봄을 선물합니다! 옆집 채원이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봄을 통째로 선물해주셨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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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고 봄이 손에 잡히는 아침. 채원이네 엄마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짜잔! 가애네 집에 '봄'을 선물합니다. 내일이 봄을 시작하는 3월 1일이잖아요. 그래서 조그마한 꽃 화분 하나 샀어요."

채원이네 엄마가 따스한 햇볕 한 줌 들고 와 우리 집에 화창한 봄을 선물하고 갔다. 
2020년 가을에도 채원이네 집에서 연락이 왔다. 

"가을 햇볕이 무척이나 따뜻하네요. 혹시 저녁에 특별한 일 없으면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언니께서 월요일에 병원 가신다고 들었어요. 따뜻한 밥 한 끼 해드리고 싶어서요. 오늘 햇살처럼 이 시간이 지나면 더 따스한 날들이 있을 거예요."

집에 가보니, 준비한 밥상이 이랬다. 
 
아내가 병원에 간다니 옆집 채원이네 집에서 차린 저녁 밥상.
▲ 채원이네 집에서 차린 저녁 밥상. 아내가 병원에 간다니 옆집 채원이네 집에서 차린 저녁 밥상.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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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답장을 보냈다.

"어제 저녁밥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동태탕에 초밥, 새우까지 차린 정갈한 밥상. 채원이네 엄마도 배고플텐데 숟가락 들지도 않고 새우 껍질 일일이 까서 아내와 제 빈 접시 위에 올려놓은 손길에서 '내가 참 복을 많이 받고 사는 사람이구나!' 느끼고 왔네요.

요즘 착 가라앉은 마음, 단숨에 올려놓고 가슴 따스하게 위로해줘 고맙습니다. 한 달에 서너 번 승강기와 주차장 가는 짧은 길에 만나며 반갑게 인사 나누며 살지만, 한동안 못 만나면 우리 부부도 '혹시 채원이네 집에 무슨 일 있나?' 불이 켜져 있는지 주차장으로 내려와 확인하며 삽니다. 늘 그리운 이웃으로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요."


사는 게 어찌 다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파도가 치더니 거센 태풍이 불어와 순항하던 우리 집 항로를 변경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세상살이가 어찌 다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아파트를 팔아야 했다.

현관 앞에 호박 한 덩이만 갖다 놓고 와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던 옆집 채원이네 집을 두고 내가 먼저 떠나게 되다니. 채원이네 집과 평생 오손도손 살고자 하였으나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보니 이게 우리네 인생살이 항로인가 보다.

이사 간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헤어질 마음의 준비도 필요할 거 같아 자리를 마련했다. 부부끼리 밖에서 저녁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려 했으나 막상 말을 꺼내려 하니 소화가 안 될 거 같아 하지 못했다.

17층 앞에 승강기가 멈췄다.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채원이네 엄마 아빠가 우리 부부 손을 잡으며 "아들딸 오늘 시험 끝났으니 부담 갖지 말고 집에서 차 한 잔 마시다 가시라"며 잡아끈다. 차를 마시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꺼냈다.

"우리 아파트 팔았어요. 곧 이사 가요."

부부는 상심이 컸는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말만 듣고 있었다.

"올겨울 누님이 병원에 간다고 할 때 우리 집에 초대해 저녁밥 드셨잖아요. 그날 밤, 채원이 엄마 많이 울었어요. 언니 수술 잘 되어 무사히 잘 돌아오라 기도하면서 꼭 친언니가 수술하러 가는 것처럼 며칠 동안 힘들어했어요. 그동안 서로 나눈 정, 우린 어디다 뿌리며 살라고 곁을 떠나려 하신가요? 진짜로 가는 건가요?"

채원이네 엄마의 버킷리스트 
 
전주 모악산 계곡으로 김밥 싸서 옆집 채원이네 부부와 함께 소풍을 갔다.
▲ 전주 모악산 계곡. 전주 모악산 계곡으로 김밥 싸서 옆집 채원이네 부부와 함께 소풍을 갔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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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 후 채원이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주 토요일에 도시락 싸서 모악산으로 소풍 가게요.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폭포가 있고 발 담그고 놀기 좋은 곳이 있거든요. 제가 김밥 싸서 준비할게요. 언니랑 오빠랑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며 자연을 벗 삼아 물장구도 치고 함께 놀다 오게요."

채원이 엄마가 우리 부부와 해야 할 버킷리스트 첫 번째가 도시락 싸서 계곡물에 발 담그며 노는 소풍 가기였단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고 문자가 왔다. 지금껏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셀카봉을 준비해와 찍은 사진도 함께 보내왔다.

"이사 가더라도 오늘처럼 늘 삶에 잔잔한 웃음이 끊이지 않길 바랍니다. 요즘 자주 주시는 호박과 풋고추! 이사 가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니 지나가다 텃밭에 심어진 호박과 풋고추들이 이젠 가애네 집으로 보이네요. 항상 소중한 나눔 감사하고 이사 가더라도 잊지 말고 인연의 끈 놓지 말게요."

"지난번 모악산 계곡으로 놀러 갈 때 오이냉국을 맛나게도 드셔서 현관문 앞에 두고 갑니다. 얼음 녹기 전에 얼른 가져다 언니랑 맛나게 점심 드세요. 다 드신 빈 그릇은 문 앞에 두면 됩니다. 그릇 속에 이별의 아픔도, 떠나가는 마음도 담아 두지 마시고, 오직 4년간 함께 나누었던 인연의 끈만 길게 이어놓아 주세요."
 
도수네는 호박을, 채원이네는 오이냉국을 현관 앞에 두었다.
▲ 두 집이 나란히 지어진 아파트. 도수네는 호박을, 채원이네는 오이냉국을 현관 앞에 두었다.
ⓒ 김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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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 동안 채원이네 식구들 만나 덕분에 인정 넘치는 행복한 시간 보내다 갑니다. 비록 몸은 떠나지만 서로 주고받은 정 잊지 않도록 인연의 끈, 길게 물고 가도록 할게요. 함께 정을 나누며 사는 동안 가애네 식솔들도 마음 깊이 솟아나는 웃음꽃, 꽃대 날마다 밀고 올라오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하고 1702호 떠나갑니다.

태그:#도수네 집, #채원이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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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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