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해외 파이터를 꼽으라면 '불꽃 하이킥' 미르코 '크로캅' 필리포비치(47·크로아티아)를 빼놓을 수 없다. 프라이드 무대서 한창 맹위를 떨치던 시절에는 '60억분의 1'로 통하던 '얼음 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45·러시아)의 위상도 뛰어넘을 정도였다.

성적에서는 '10년 불패' 표도르나 '최강의 2인자'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45·브라질)에 미치지 못했으나 한창때의 존재감과 인기만큼은 역대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잘생긴 외모와 특유의 차도남 이미지에 더해 당시 헤비급에서는 극히 드물었던 한방을 갖춘 킥커라는 점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팬층이 굉장히 두꺼웠다. 종합격투기 무대를 떠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올 정도다.

크로아티아는 전통적인 스포츠 강국이다. 98 프랑스월드컵 득점왕 다보르 수케르, NBA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 왕조 전성기를 함께한 토니 쿠코치, 농구 여신으로 통하는 안토니아 미수라, 알파인 스키의 야니차 코스텔리치, 테니스의 이반 류비치치와 고란 이바니세비치, 여자 창던지기의 사라 콜라크, 여자 원반던지기의 산드라 페르코비치 등 다양한 종목에서 기량과 캐릭터를 겸비한 선수가 화수분처럼 쏟아지고 있다.

전 UFC 헤비급 챔피언 출신 스티페 미오치치(35·미국) 또한 국적은 다르지만 크로아티아 혈통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한 쟁쟁한 인물들 사이에서도 크로캅은 특별한 존재로 불리운다. 특수경찰은 물론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크로아티아의 국민 영웅으로 한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어지간한 헐리우드 스타 못지않은 관심을 끌었다. 때문에 UFC 데이나 화이트 대표는 끊임없이 그를 욕심냈고 옥타곤에 들여놓은 후에도 대놓고 편애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인 바 있다.
 
 '불꽃 하이킥' 미르코 크로캅

'불꽃 하이킥' 미르코 크로캅 ⓒ UFC

 
UFC에서 몰락해버린 헤비급 최강의 스트라이커
 
결과적으로 크로캅은 UFC 무대서 처절한 실패를 겪고 말았다. 프라이드가 낳은 최고 스타 중 한명으로 그야말로 거물 대접을 받고 옥타곤에 입성했으나 경기 성적과 내용 모두 기대 이하였다. 일부에서는 프라이드와 UFC의 수준차를 언급하기도 했으나 비슷한 시기 좋은 활약을 펼친 상당수 선수들의 사례에 비춰봤을 때 설득력은 없다.

퀸튼 잭슨, 마크 헌트 등은 프라이드 시절보다 훨씬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으며 앤더슨 실바는 아예 급이 다른 선수가 되어버렸다. 차 포 떼고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까지 올랐던 마우리시오 ´쇼군´ 후아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크로캅이 유달리 UFC 무대서 적응을 못하고 부진했다고 보는 게 맞다.

크로캅의 추락은 팬들은 물론 화이트 대표까지도 당황스럽게 했다. 아무리 무대가 다르다해도 헤비급 최강 스트라이커가 중위권에서 조차 고전할 정도로 힘을 못 쓸 줄은 예상하기 힘들었다. 가브리엘 '나파오' 곤자가에게 자신의 장기인 하이킥으로 실신 KO패 당한 것을 비롯 프랭크 미어, 브랜드 샤웁, 로이 넬슨 등에게 3연속 넉아웃 패배를 당하는 등 부진을 넘어 망신 수준에 가까웠다.

이처럼 크로캅이 UFC 무대서 자존심을 구긴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파이팅 스타일적인 부분에서의 지나친 정직함이 독이 되었다는 분석도 많다. 갈수록 종합격투기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 평준화되는 시점에서 크로캅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UFC에는 그를 위협할 그래플러 유형도 많았고 스탬핑킥, 사커킥 금지, 팔꿈치 허용 등 전반적인 룰도 상당히 달랐다.

워낙 인지도가 높았던 선수인지라 크로캅이 UFC에 온다는 얘기가 나오던 순간부터 그의 파이팅 스타일은 다각도로 분석됐다. 반면 정작 많은 준비가 필요했던 크로캅은 새로운 무대에 성급하게 들어섰다. 거구들이 많은 UFC 헤비급에서 크로캅의 작은 체격은 경쟁력이 떨어졌다. 라이트헤비급에도 그보다 큰 선수들이 즐비했다.

때문에 크로캅은 자신의 강점인 탈 헤비급 스피드를 살려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정교한 카운터를 적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타격가라도 영화속 무림고수처럼 상대의 공격을 다 피하면서 공격을 적중시키기는 사실상 힘들다. 잠깐은 몰라도 경기 시간 내내 그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본인에게 익숙한 링 무대인 프라이드에서는 크로캅의 패턴이 어느 정도 통했다. 좁은 링 안에서 압박을 하거나 아웃파이팅을 펼치다 상대를 코너에 몰아넣고 사냥을 하면 됐다. 옥타곤은 달랐다. 일단 링보다 공간이 넓은지라 거리를 두고 타격거리 바깥에서 움직이기가 용이했고 코너에 몰렸다 싶은 순간에도 케이지를 타고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크로캅에게는 그런 상대를 잠깐이라도 묶어둘 더티복싱이나 그래플링이 없었다. 외려 그런 부분은 그의 약점이었다. 그런 관계로 대놓고 근거리 타격전을 피하고 빙빙 돌기만 해도 제대로 된 킥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앤더슨 실바, 료토 마치다, 스티븐 톰슨 등 킥 기술이 빼어난 정통파 스트라이커들은 기량도 빼어나지만 크로캅처럼 단순하게 피하고 때리는 유형이 아니다. 마치다와 톰슨은 회피능력도 좋지만 그전에 상대의 타이밍을 끊어주며 흐름을 자신 쪽으로 가져오는 플레이를 잘 펼친다. 되도록 위험한 상황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다.

실바같은 경우도 때로는 야유를 무릎 쓰고서라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확실해졌다 싶은 순간 카운터 타이밍을 노린다. 크로캅은 길게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거리를 두고 아웃파이팅을 펼치다가도 대치가 길어진다 싶으면 본인이 먼저 들어간다. 물론 그런 이유로 그의 경기가 지루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화끈함을 보장해 주었지만 옥타곤에서는 상대의 수 싸움에 말리는 이유로 작용했다.

프라이드 시절에는 파이팅 스타일에서 희소성이라도 있었으나 옥타곤으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는 그런 것 조차 사라져 있었다. 늘 비슷한 동선으로 스탭을 밟고 공격 리듬도 한결같았다. 상대 입장에서는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쉬웠다.

그렇다고 공격 무기가 다양한 것도, 맷집이나 회복력이 좋아 데미지를 입어도 견디고 다음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강인한 육체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쯤되면 아무리 강력한 타격가도 제대로 힘을 쓰기 힘들다. 새로운 공격패턴을 만들어 오지 못한게 아쉬운 이유다.

거기에 더해 그라운드 대비도 미숙했다. UFC는 프라이드처럼 '스탑 돈 무브(Stop, don't move, 경기를 일시 중단하고 링 중앙으로 이동하는 것)'도 인색하고 팔꿈치 공격도 존재한다. 프라이드 때처럼 파운딩을 치려는 팔을 붙잡고 버티면서 시간을 버는 플레이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상대가 상위 포지션에서 압박을 거듭하거나 팔목 등을 잡혔다 싶은 순간에는 팔꿈치로 누르듯 때려버리면 그만이다. 처참하게 무너졌던 곤자가와의 1차전이 대표적이다.

이후 크로캅은 몸을 키우고 그래플링에서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면서 곤자가에게 리벤지를 성공하기도 했으나 처음의 기대치에서는 한참 어긋나 있었다. 낭만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팬 들 입장에서 크로캅의 실패는 지금까지도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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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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