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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결의 선언문-등록문화재 제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 박용만, 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적인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가지고 민족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1917년 7월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에게 작성한 한글과 한문으로 된 문서이다.
▲ 대동단결 선언문 대동단결의 선언문-등록문화재 제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 박용만, 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적인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가지고 민족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1917년 7월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에게 작성한 한글과 한문으로 된 문서이다.
ⓒ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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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이 터를 닦은 상하이에서 1915년 3월 망명지사들을 중심으로 신한혁명당이 창당되었다. 이 조직은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으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고, 상하이는 마침내 우리 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동아시아 민족주의운동의 중심지"라 불리는 상하이는 1842년 '남경조약' 이후 통상항구로 개발되어 서구와 일본의 조계(租界)가 설치되었다. 프랑스 조계, 영국 조계, 일본 조계와 기타 몇 개의 조계가 있었는데, 프랑스 조계만 그냥 남고 나머지는 합해서 공공조계라 했다. 프랑스 조계는 길쭉한 형태였고 공공조계는 넓었으며, 그 외곽으로 중국인 행정구역이 있었다. (주석 1)

상하이는 1920~1930년에 이미 인구 약 300만 명의 거대한 국제도시로 발전하여 해상교통과 동양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시가지는 양자강 하구의 남만, 황포강이 양자강에 합류되는 지점에 있다.

한국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프랑스 조계는 1866년에 개시되었고, 우리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도,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프랑스 조계는 프랑스의 건국이념대로 자유ㆍ평등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1915년 6월 말 현재 일본외무성 조사, 조선총독부 척식국 작성 자료에 따르면 1915년 중국 본토에 거주했던 한인 동포의 수는 다음과 같다. 

상해(300명), 천진(154명), 지부(13명), 남경(8명), 산두(19명), 하문(5명), 청도(61명), 기타(4명), 계 564명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무렵 상하이에 거주했던 동포의 수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여운형신문조서』와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고등경찰요서』에는 각각 7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하이에는) 1910년대 초에 벌써 소규모의 동포사회가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동포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1910년대 후반인데, 1917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500여 명이었으며,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는 1천 명 정도로 증가되었다. (주석 2)

 
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 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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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망명했던 시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째는, 1910년대 초 일제에 의해 합병된 직후로서 중국의 신해혁명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상해로 망명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신규식ㆍ이관구ㆍ김규식ㆍ문일평ㆍ정인보ㆍ신채호ㆍ박은식ㆍ홍명희ㆍ박찬익ㆍ민필호 등이었다. 

둘째는, 1910년대 중반기로서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물과 유학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했던 자들이 주류를 이룬 시기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김홍서ㆍ선우혁ㆍ한진교ㆍ여운형ㆍ이범석ㆍ노백린ㆍ장덕수 등이었다. 

셋째는, 3ㆍ1운동 무렵으로 특히 3월말부터 각지에서 대거 망명해 왔다. (주석 3)

1910년 8월 29일 국치와 더불어 '식민통치 아래 생존권까지 박탈당한' 한인들은 대거 해외로 망명하였다. 당시 한인들이 이주한 곳은 중국, 러시아의 연해주, 중남미ㆍ하와이 등이었는데, 중국쪽으로 이주한 한인이 제일 많았다. (주석 4)


한국병탄부터 3ㆍ1운동 직전까지 상해로 이주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주석 5)
 
 
한일합방부터 3ㆍ1운동 직전까지 상해로 이주한 주요인물
▲ 한일합방부터 3ㆍ1운동 직전까지 상해로 이주한 주요인물 한일합방부터 3ㆍ1운동 직전까지 상해로 이주한 주요인물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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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한국 독립운동증언 자료집』(안병무지사 증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00쪽, 박영사, 1983. 
2> 김희곤,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 연구』, 38쪽, 지식산업사, 1995.
3> 앞의 책, 35~36쪽.
4> 손과지(孫科志, 중국인, 상해복단대 역사학 교수), 『상해한인사회사:1910~1945)』, 46쪽, 한울, 2001. 
5> 앞의 책, 5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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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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