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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이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 눈물의 5월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이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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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장머리 없이 묘역에서는 웃지 마라.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묵직한 카메라를 든 한 참배객이 중학생 아이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내 해설을 듣고 있던 그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분위기가 데면데면해지고 말았다. 그들의 웃음은 "그때 너희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 내리던 지난 17일 오전,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열여섯 살로, 항쟁 마지막 날 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안종필 열사의 묘소 앞이었다. 그는 같은 학교 동급생인 문재학 열사와 함께, 눈물로 말리는 부모의 손을 끝내 뿌리치고 도청에 걸어 들어간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다. 두 열사의 의로운 죽음 앞에 그들은 멋쩍게 웃음으로 얼버무린 것이다.

순간 아이들에게 '참배객다움'을 요구하는 그의 강퍅함이 안타까웠다. 때 이른 더위가 찾아온 며칠 전에도 묘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몇몇 아이가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묘역을 돌아다니다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으로부터 혼쭐이 나는 모습을 봤다.

아이들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쫓기듯 서둘러 묘역을 떠났다. 누구든 그들의 가벼운 옷차림이 묘역의 경건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할 순 있다. 그렇다고 애써 묘역을 찾아온 아이들을 초면에 다짜고짜 나무라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 외려 그들의 반감만 살 뿐이다.

단지 웃었다는 이유로 중학생들이 혼쭐 나고 있을 그때, 저 멀리서 요란한 셔터 소리가 들렸다. 소복을 입은 유족 한 분이 묘비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열 명도 넘는 기자들이 달려들어 그분을 에워쌌다. 굳이 저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서글픈 장면이었다.

터지는 카메라의 플래시와 셔터 소리 때문에 나이 지긋한 유족의 통곡조차 작위적인 행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정치인들이 묘역을 찾아올 때마다 익히 봐온 장면이긴 하다. 따라온 카메라 기자의 수가 해당 정치인의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

느닷없이 중학생들을 혼쭐낸 그분에게 묻고 싶다. 아이들의 웃음과 부나방처럼 몰려다니는 카메라 기자들의 요란한 셔터 소리 중 어느 것이 더 예의에 어긋나는 짓인가를. 또,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과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 정치인 중 누가 더 무례한 사람인지를 말이다.

5.18 민주묘지 찾은 아이들 야단치기 전에...

그런가 하면, 이태 전쯤 이런 날도 있었다. 해 짧은 겨울 어느 날, 퇴근 뒤 어둑해진 오후 몇몇 학생회 아이들과 묘역을 찾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묘역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대낮과는 달리, 아무런 설명 없이도 묘역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옷깃을 여미게 했다.

다섯 시 반쯤 됐을까. 오토바이를 탄 묘역 관리원이 우리 일행을 향해 어서 나가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문 닫을 시간이라는 것이다. 국가 보훈처에 소속된 공공 기관이기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묘역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융통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뛰쳐나왔다. 묘역을 나온 뒤 성마른 그 관리원을 한마디씩 성토했다. 자신들을 마치 무덤 도굴꾼이나 간첩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면서 무척 불쾌해했다. 그는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아이들에겐 황당한 경험으로 남았다.

이후 그들은 묘역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누구의 잘잘못인가를 떠나 그날의 불쾌한 기억이 아이들의 마음을 닫게 한 것이다. 그러잖아도 5.18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주 먼 옛날의 일로 여기는 아이들에게 더더욱 괴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꼴이 됐다.

근무하는 학교와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라, 5월 들어 퇴근길 출근부에 도장 찍듯 묘역을 찾고 있다. 평소에도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즐겨 찾는 곳이다. 해마다 5월이면 묘역은 참배객으로 북적이지만,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 말곤 눈 씻고 찾아봐도 중고등학생들은 없었다.

유가족과 정치인들, 깃발을 앞세운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데, 정작 기억과 다짐이 계승되어야 할 청소년들은 묘역을 찾지 않는 거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 번의 계기 수업보다 단 한 번의 묘역 방문이 더 효과적일 텐데도, 묘역은 그들에게 여전히 불친절하다.

5.18 진상 규명은 공식 사과와 피해 배상, 책임자 처벌만으로는 부족하다. 핵심은 미래세대에 역사적 의미와 가치, 정신 등을 전승하기 위한 추모 사업과 교육에 있다. 그러자면 우선 5.18에 대한 아이들의 괴리감을 줄여야 한다. 묘역을 공원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서양의 공원묘지와 단순히 비교할 순 없다. 불의한 공권력에 무참히 학살당한 시민들이 잠들어있는 묘역을 유원지로 여기는 건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짓일 테다. 다만,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는 엄숙함만으론 묘역이 민주주의의 학습 공간으로 거듭날 수 없다.

지금처럼 1년에 한 번 5월 18일에 맞춰 당위적인 의무감으로 찾는 곳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기일에 차리는 제사상처럼 형식적이고 관행화한 의식이라면, 그곳에서 민주주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아무 때나 찾아와 쉬었다 가는 공원인 게 더 낫다.

5월 18일 딱 하루만 기억돼서는 안 된다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 추모객들의 참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 41주년 기념일 하루 앞둔 5.18 묘지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 추모객들의 참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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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정부 주관의 추모 행사가 마뜩잖다. 그마저 없다면 묘역의 존재조차 잊힐 거라고들 하지만, 5.18 추모 행사가 끝난 뒤 을씨년스러운 묘역을 와본 이라면 알 것이다. 사람들에게 5월 18일 딱 하루만 기억되는 5.18 정신의 서글픔을.

지금 묘역을 뒤덮고 있는 현수막 물결은 고작 며칠 뒤 깨끗하게 치워질 테고, 늘 그래왔듯 내년 이맘때쯤이면 똑같은 모습이 재현될 것이다. 부모님과 가족 나들이 삼아 자주 묘역을 찾는다는 한 아이는 "묘역이 때아닌 겨울잠에 든다"고 표현했다. 묘역은 6월부터 겨울이다.

불경스럽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난 국립 5.18 민주묘지가 엄숙하기보단 자유롭고, 경건하기보단 편안한 분위기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선 추모탑보다 곳곳에 소담한 나무 그늘이 많았으면 좋겠고, 거울 같은 대리석 바닥보다 푹신한 흙바닥 위에 벤치가 놓여있다면 금상첨화겠다. 더 오래 편히 머물 수 있도록 말이다.

아이들에겐 오와 열을 맞춰야 하는 엄숙한 분향 의식도 부담스럽다. 추모의 마음을 그들의 정서와 감각에 맞게 표현할 수 있도록 격식의 파괴를 허용하면 안 될까. 학생회 아이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록이나 힙합 버전으로 편곡하면 어떠냐고 제안한 게 이미 몇 해 전이다.

외양과 형식을 바꿀 수 없다면, 부디 어린 참배객을 대하는 기성세대의 강퍅한 마음가짐부터 누그러졌으면 좋겠다. 과연 느닷없이 혼쭐난 중학생 아이들이 '죄'를 반성하고 자발적으로 다시 묘역을 찾아올까. 다시 찾아오기는커녕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월, 시대와 눈 맞추자. 세대와 발맞추자.'

41주년을 맞은 올해 5.18 민주화운동의 슬로건이다.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의 정신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시대와 눈 맞추는' 일이라면, 그것이 미래세대 아이들의 가슴에 가닿도록 힘쓰는 것이 곧 '세대와 발맞추는' 일일 것이다. 애먼 아이들에게 '참배객다움'을 요구하기 전에, 기성세대인 우리의 역할을 먼저 성찰할 일이다.

태그:#5.18 민주화운동, #국립5.18민주묘지, #5.18 진상규명, #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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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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