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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저작권위원회, 국가보훈처, 안중근기념관 등이 협력하여 만든 안중근체.
 한국저작권위원회, 국가보훈처, 안중근기념관 등이 협력하여 만든 안중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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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제112주년이자, 오는 3월 26일은 순국 제111주년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께 중국 하얼빈 역에서 민비시해와 고종의 강제 폐위, 동양평화 파괴 등 15가지 죄목을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 살해했다. 이듬해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로 더 잘 알려진 그날, 안 의사는 뤼순(旅順)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2일 만인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항일투쟁의 큰 별이 됐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거사 당일부터 이토 장례식인 11월 4일까지 전 세계로 9만 여건이 신문에 보도된 안 의사의 의거는 1905년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불법성과 일본 제국주의 속성을 세계만방에 고하고, 항일 무장투쟁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이처럼 멸사봉공의 정신을 몸소 보여준 안중근 의거에 대해, 당시 대한제국의 정부와 민중의 반응은 큰 대조를 보였다.

"겉으로 통괘하다 말 못하고 깊숙한 방에서 경하"... 그러나 대한제국은

의거 소식이 국내외외 전해지자, 대다수 대한제국의 민중은 "겉으로 통쾌하다 칭송을 못하고 깊숙한 방에서 저마다 술을 따르며 모두 경하했다"라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또한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연해주-만주로 이주한 동포들은 안 의사의 구명을 위해 적극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원세개(袁世凱)조차도 "살아서 백살이 없는데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라는 추모시를 짓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대한제국의 황제와 정부의 고관대작들은 민중들의 정서와는 매우 동떨어진 행태를 보인다. 이는 망국으로 치닫는 통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의거 당일 조선통감 소네와 인천항 일본 군함에서 함상 파티 중에 하얼빈역 사건을 들은 총리대신 이완용 이하 대신들은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순종 황제와 정부는 닥쳐올 일본의 문책성 보복이 두려워 거의 공황상태에 빠졌다.

마치 1891년 5월 러시아 황태자가 일본 시가현 오쓰를 순방 중에 현지 경찰에게 머리에 찰과상을 입는 테러를 당하자, 일본 전역이 발칵 뒤집힌 상황과 같았다. 순종은 다음날 아침 시종원경 윤덕영과 승녕부 총관 조민희, 총리대신 이완용, 한성부민회장 유길준 등 제1차 '조문 칙사단'을 황급히 구성하여 대련항에 파견한다. 이토 유해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대련항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오후에 친히 통감부를 찾아 이토 빈소에 조문했다. 조문 칙사단은 다음날 28일 오전에 대련항에 도착했으나, 항구 분위기가 험악해 유해 운반선이 대련항을 벗어나자 해상에서 조문을 했다. 이날 순종은 이토에게 '문충공(文忠公)'시호를 내린다.

심지어 "사흘간 음주가무 금지" 칙령까지

이완용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 대한제국 황제의 명의로 "29일부터 31일까지 사흘 동안 한성 일원에 일체의 음주가무를 금지하라"는 칙령을 선포했다. 또한 순종은 도쿄에 있는 황태자에게 28일부터 3개월 동안 상복을 입고 깍듯이 예를 표하도록 당부했다.

11월 4일 순종은 일본 국장으로 거행된 이토의 장례식에 대한제국 대신들(민병석,조중응)로 구성된 소위 제2차 '조문 사죄단'을 파견하고 유족에게 은사금 10만 원 (현재 가치로 약 15억 원)을 전달케 했다.

같은 날 정부 주최로 을사5적과 함께 학생들을 동원하여 장충단에서 국장급 수준으로 이토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어 전국의 유림을 비롯한 조선 내 13도의 대표를 자칭하는 인사들도 이토 암살과 관련 일본 천황에 죄를 청하는 '사죄사'의 행렬에 동참하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결국 이들의 행렬이 현해탄을 건널 즈음, 오전 10시 구슬비가 내리는 뤼순형무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행방을 알지 못해 광복된 조국에 품에 안기지 못하고, 다만 서울 효창공원 내 삼의사라는 묘역에 가묘로 조성돼 있을 뿐이다.

엄혹한 시기에 이처럼 민족과 국가의 자주독립의 기상을 세운 안중근 하얼빈역 의거는 당시 대한제국 황제와 정부에게는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허울뿐인 제국의 무능한 황제와 자신들의 안위에 사로잡혀 사익만을 추구하는 친일 부역 고관대작들, 그들에겐 일본은 또 다른 사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안 의사의 의거는 단지 경천동지 할 사건이자, 대역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금이 저리고 부끄러운 과거다. 과거는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역사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에 즈음하여, 오늘날 지도층을 포함한 모두가 한 번쯤 깊이 되돌아볼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다.

태그:#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 이토 히로부미, # 순종,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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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2일(음력:실제 출생년월)/전남 영광 출생 -R.O.T.C. 육군 대위 전역 -중국 베이징(북경)대학교 대학원 국제관계학 박사(동아시아 해양안보) -현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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