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포스터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포스터 ⓒ 영화사 진진

 
화가의 삶을 다룬 영화, 그것도 핀란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까닭은 코로나19 덕분 아닐까 한다. 영화 제작환경이 세계적으로 악화하고, 전체적인 관객 숫자도 감소하는 추세가 일반적이다. 값비싼 할리우드 대작을 수입해도 흥행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다양성이 실현되는 형국이랄까.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2020년 핀란드에서 개봉되어 코로나 19 여파에도 자국 흥행에서 2위를 기록한 영화다. 영화는 제23회 '상해국제영화제' 장편영화 부문 금잔상 후보에 올라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지독하게 생소한 핀란드 화가 헬렌 쉐르벡(1862-1946)의 삶을 조명한 영화가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이다.
 
충무로나 할리우드 영화문법에 익숙한 관객은 이런 영화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신속하게 전개되는 사건과 장면, 숨 막힐 듯한 갈등과 긴장, 넘치는 감정과 속도감이 아예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1915년부터 1923년을 다루는 영화의 시간대는 자동차와 마차가 공존하던 느릿한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가와 주부 사이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스틸 컷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중년 여인과 노파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은 비스킷 몇 조각이 전부다.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먹던 노파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한다. "집안 일을 해야지." 중년 여인이 대꾸한다. "왜 그 얘길 안 하시나 했어요." 이윽고 그녀가 대걸레와 물통을 가지고 마룻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헬렌은 10년 넘는 세월 헬싱키의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림 그리는 장면이 없다면, 나이 든 어머니와 불화하는 딸 이야기로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것도 우리 시대에는 아주 낯선 가부장 사회의 핀란드 가정사를 다룬 영화로 말이다.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에 등장하는 모녀 갈등의 배후에는 가부장주의가 깔려 있다.
 
그림 전시회로 얻은 수익금이 법적으로 오빠인 마그누스의 몫이 된다거나, 고기도 오빠 먼저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 말이 그렇다. 어머니는 딸이 돈도 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도통 못마땅하다. 솜씨 좋은 손으로 러그 자수를 놓아서 돈 버는 게 낫지 않느냐고 대놓고 말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와 오빠 사이에서 화가로 살고 싶은 헬렌.
 
모녀 갈등은 평생 헬렌을 괴롭힌 문제였던 것 같다. 그것을 이기지 못한 헬렌이 결국 어머니를 마그누스에게 보내지만, 어머니는 돌아오고 만다. 그녀가 맞이하는 최후의 장면은 가부장주의의 끝판을 보여준다. 임종을 지키는 딸 대신에 장롱 속의 오빠 옷을 가져오라고 말하는 어머니. 100년 전 핀란드 사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베스테르와 여성동맹연합
 
안티 요키넨 감독은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치밀하게 교직한다. 헬렌의 개인사와 가정사를 당대 핀란드가 경험한 사회사와 국가사와 구체적으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헬렌의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의지처는 헬레나 베스테르마르크다. 헬렌은 그녀를 언제나 '베스테르'로 부른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베스테르는 헬렌과 함께한다.
 
베스테르는 1892년 핀란드에 세워진 여성동맹연합의 창립 구성원이다. 여성의 권리개선, 성차별 해소 등을 목표로 창립된 여성동맹연합 등의 노력으로 핀란드는 1906년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일궈낸다. 우리는 헬렌이 동맹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베스테르와 헬렌이 맺고 있는 관계로 그녀의 사유와 인식을 가늠할 수 있다.
 
헬렌이 심장발작을 일으켜 입원했을 때 그녀의 병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준 이도 베르테르다. 그런 친구를 둔 때문인지 모르지만, 헬렌은 여성 화가임을 거부한다. 화가면 됐지, 무엇 때문에 화가 앞에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하냐고 거칠게 되묻는 헬렌. 그녀에게서 당차고 여물며 고집스러운 결기가 풍겨 나오는 장면이다.
 
병상의 헬렌을 찾아온 에이나르를 준열하게 꾸짖으며 그가 가져온 꽃만 받는 베스테르. 사랑의 상실과 사랑의 슬픔으로 괴로운 친구 헬렌을 대신하는 강고한 여성 베스테르는 당대 핀란드의 진보적인 여성상을 온전히 구현한다.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 베스테르의 존재는 핀란드의 선구적인 화가 헬렌의 존립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사랑, 그 닿을 수 없는 쓸쓸함
 
헬싱키에서 멀리 떨어진 전원의 소도시 히방카에 거주하는 헬렌이 낯선 방문객을 맞는다. 화상인 괴스타 스텐만과 그와 함께 온 에이나르 레우테르가 그들이다. 그림을 보러왔다는 괴스타의 말에 헬렌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예술계와 단절한 채 자신만의 화풍을 다져가고 있던 헬렌에게는 뜻밖의 일이다. 영화의 전환이 이뤄지는 시점이다.
 
산림감독관이자 아마추어 화가이며 젊은 작가인 에이나르. 그는 남다른 안목으로 헬렌 쉐르벡의 예술세계에 매료된 인물이다. 그의 제안으로 헬싱키에서 열린 그림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둔다. 아주 오랜만에 헬싱키를 찾는 헬렌과 그녀를 데려가는 고풍스러운 555번 증기기관차가 화면을 채운다. 굉음과 연기로 낡은 공감각을 선사하는 열차!
 
열차와 자동차를 매개로 그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이미 중년에 접어든 여인 헬렌은 청춘의 에이나르를 향한 마음을 자꾸만 억누른다. 그녀가 에이나르의 초상을 그리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에이나르의 뒤에서 그의 손을 잡아 화필을 돕는 헬렌이 그의 체취에 취해 흠칫 놀라며 몸을 빼는 장면. 등에 닿을 듯 말 듯 끝내 닿지 않는 얼굴.
 
헬렌은 에이나르를 탐미사리로 보낸다. 그것도 돈까지 주면서 고집스럽게 그를 탐미사리로 보낸다. 꼭 거기 가서 보고 와야 할 것이 있다면서. 감독은 이 장면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보낸 8통의 편지에 대한 유일한 답신은 헬렌을 치명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 그가 돌아오면 다 털어놓겠다던 그녀의 고백은 어떤 운명과 만날 것인지.
 
영화가 남긴 것들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스틸 컷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두 시간의 상영시간이 짧게 느껴진 것이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다. 함께한 3인의 감상을 물어보지 않았기에 정답은 여백으로 남는다. 핀란드의 뭉크로 불린다는 헬렌 쉐르벡의 중년을 담담한 색채와 느릿한 속도와 단아한 풍경으로 그려낸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하지만 거기서도 감독은 근대 핀란드의 풍광을 담아낸다.
 
1918년 1월부터 5월까지 전개된 핀란드 적백내전. 3만6천여 사망자와 씻기 어려운 상흔. 내전의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는 포로수용소가 있던 탐미사리. 그곳을 향한 헬렌 쉐르벡의 고집스러운 지향. 아울러 곳곳에서 헬렌은 그림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것이 어쩌면 그녀를 <절규>의 작가 뭉크로 비유하는 원천인지도 모른다.
 
전쟁과 가난을 그림의 소재로 쓴 화가 헬렌. 그녀는 일찍부터 사실주의 화풍을 던져버리고 자신만의 감성과 표현에 몰두함으로써 모더니스트의 길을 걷는다. 자신의 얼굴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얼굴을 그리면서도 그녀는 굳이 아름다움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간명하지만, 분명 강력한 힘이 있다.
 
"추한 그림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아름답게 빛나는 법이야."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하늘을 그리는 것처럼 힘들어."
헬렌 쉐르벡 뭉크 에이나르 헬레나 베스테르마르크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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