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8 15:57최종 업데이트 21.02.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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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1991년 5월 25일은 전국에서 노태우 정부의 공안통치 종식과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린 날이다. 이날 서울 중구 퇴계로 대한극장 맞은편 골목에서 시위에 참가한 청년이 쓰러진 채 발견됐다. 청년은 곧장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미 사망하고 난 뒤였다. 청년의 이름은 김귀정. 25살의 대학생이었다.

귀정은 1966년 서울에서 아버지 김복배와 어머니 김종분의 1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귀정은 부모가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악착같이 노력해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입학했다. 그러나 집안 사정상 학교를 중퇴하고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해 낮에는 그곳에서 일하고 밤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를 도왔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면학의 꿈을 잃지 않고 대학입시를 준비하여 3년 뒤인 1988년에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1988년 3월 입학과 함께 귀정은 통일연구 동아리인 '심산연구회'에 들어갔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조국과 민족에 관심을 갖게 된 귀정은 다음 해에 회장까지 맡는 등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입학 이듬해인 1989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어야 했다. 삶의 고단함에 대한 심정이 당시 귀정이 쓴 일기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공부를 하려고 대학엘 왔는데 그 대학엘 다니기 위해서 나는 공부는 제쳐두고 돈을 벌러 다닌다. 점점 단순해지고 녹이 슬어가는 머릿속에서 '아르바이트'와 '돈'이란 두 단어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1989년 1월 7일)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열심히 동아리 일을 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좀 더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의 처지와 환경들이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1990년 2월 7일)

- '귀정이는 죽지 않았다 - 김귀정 열사의 삶과 투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일기의 또 다른 부분을 보면 귀정은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크게 낙담하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모습이어서 더 안타깝다.
 
이 시간에도 윙윙거리는 기계 소음 속에서 정말 기계처럼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을 노동자와 날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바쳐오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나는 너무 건방지고 웃기기까지 하다. 그리고 눈물겹다. (1989년 1월 7일)

지금의 나의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자. 이것들 모두 나를 강하게 훈련시킬 수 있는 아주 적절한 기회라 생각하며 내 환경으로 인해 나의 사업을 방기하지 말자… 시간을 다스리자. (1990년 2월 7일)

귀정이 속한 심산연구회 같은 당시 대학 동아리의 대부분은 취미 활동이나 친목 도모 모임이 아니라 일종의 학생운동 조직이었다. 동아리 활동에 대한 열정은 학생운동에 대한 헌신을 의미할 때가 많았다. 귀정은 일기에 "그 애들이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지 같이 아파해주고 힘들어할 수 있는 작은 위안이라도 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라고 썼다. 더불어 "밑으로부터 처음부터 다시"라는 좌우명답게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귀찮고 하찮은 일들을 자신이 해내려고 노력했다.

4년을 귀정과 함께한 심산연구회 동료들은 "작은 몸이지만 이 사람 저 사람 걱정해주며 늘 분단된 조국에서 사는 우리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누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타인을 사랑했었고, 항상 그러하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심산인"(김서정 '백골단에 빼앗긴 김귀정의 스물다섯 살' <월간 말>, 1991년 7월)이라고 귀정을 평했다.

통일운동 동아리인 심산연구회에서 4년을 활동한 귀정은 1991년 4월 초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성균관대 학생추진위원회 정책담당을 맡았다. 귀정은 죽기 이틀 전인 5월 23일 밤에도 "올해는 반드시 통일방안에 대한 전민족의, 전민중의 합의를 이뤄내자"라는 각오로 후배들과 밤샘 토론을 벌였다.

강경대 치사 사건과 분신 정국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1학년생 강경대가 죽었다.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벌이다 구속된 명지대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날 명지대에서 열렸다. 대학 생활을 경험한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시위 중에 일명 '백골단'으로 불리는 경찰의 집단 구타로 숨졌다.

백골단은 시위 진압과 체포를 위해 구성된 사복경찰로, 일반 전투경찰과 다르게 흰색 헬멧을 쓰고 다닌다고 하여 백골단으로 불렸다. 하얀 헬멧에 청색 재킷을 입고 작은 방패와 단봉을 들고 다니는 이들은 1980~1990년대 시위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백골단은 강경대의 머리 등 전신을 쇠파이프로 때린 뒤 피 흘리며 쓰러진 그를 길가에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철수했다.

경찰의 폭력에 의한 강경대 사망 사건은 학생들의 투쟁 의지에 더욱 불을 붙였다. 다음날 곧바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됐으며 전국적으로 규탄 집회와 가두 시위가 이어졌다. 4월 29일에는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5만 명이 학교별로 시위를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노동자·시민 등이 연달아 분신 자살을 감행했다. 귀정이 숨진 5월 25일까지 총 8명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는 1991년 4월 29일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라고 외친 뒤 분신했다. 그는 21일간 병상에 있다가 숨졌다.

이후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3일 경원대학교 천세용,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10일 노동자 윤용하, 18일 이정순과 고등학생 김철수, 22일 김철수의 고교 선배 정상순이 잇따라 분신했다. 이 때문에 1991년 5월은 분신정국이라고 불린다. 

"사람 죽어요!"

1991년 5월에 자살이 아닌 죽음도 있었다. 5월 25일은 전국적으로 '공안통치 종식과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열린 날이다. 서울에서는 이날 오후 5시경 퇴계로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비는 내리고, 3만여 명의 시위대와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1800여 명의 경찰이 뒤섞여 퇴계로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전경과 백골단은 최루가스를 내뿜는 페퍼포그 차량을 앞세워 시위대를 해산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대한극장을 기준으로 양쪽에서 압박하며 진입했고 꼼짝없이 포위된 시위대의 활로는 대한극장 맞은편의 좁은 골목뿐이었다. 100~150명가량이 최루탄 공격에 밀려 한꺼번에 골목길로 달아났다. 백골단은 시위대가 빠져나가려는 골목의 입구를 차단했고 이어 골목 입구를 U자형으로 에워싼 뒤 시위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각종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경찰 사복체포조, 일명 백골단은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다. ⓒ 최윤석

 
이 과정에서 10~20명 정도가 넘어졌다. 경찰은 이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이들의 머리 위에 사과탄(손으로 던질 수 있는 작은 최루탄을 말한다. 사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속칭 '사과탄'이다)을 던지는 등 계속해서 시위 진압과 무관한 폭력을 자행했다.

그 속에서 "그만...", "사람 죽어요!", "숨 막혀요" 등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 서강대학교 학생은 최루탄이 터지면서 목에 5cm가량의 상처를 입었다. 당시 경찰의 진압 일지에 따르면 오후 5시부터 5시 30분께까지 진압 부대가 쏜 최루탄은 2700여 발(<시사저널> 시위… 진압… 끝없는 소모전)이었다.

경찰의 진압이 어느 정도 끝나갈 즈음 골목길에는 주인 잃은 신발, 안경 등 시위대의 소지품이 하얀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나뒹굴었다. 귀정이 그곳에 쓰러져 있었다. 귀정을 발견한 학생들은 한겨레신문 취재 차량의 도움을 받아 귀정을 중구 저동의 백병원으로 이송했다. 귀정은 몇몇 부위의 피멍과 상처 외에 별다른 외상은 없었지만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귀정의 시신을 1차 검안한 백병원 측은 "특별한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보이나 정확한 사인은 부검을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폭력 진압" vs. "단순 사고"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귀정이 병원에 이송될 무렵 귀정의 어머니 김종분은 평소와 같이 야채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딸의 소식을 알게 된 건 늦은 오후 아들 친구가 노점을 찾아왔을 때였다. 아들 친구로부터 "귀정이가 다쳐서 병원에 있다"라는 말을 듣고 좌판을 치우고 7시쯤에 백병원으로 달려갔다. 김종분은 귀정이 그저 입원한 줄로만 알았다.

"귀정이는 죽지 않았다. 빨리 입원실로 옮겨달라. 입원실로 옮겨달라."

영안실에서 둘째 딸 귀정의 시신을 마주한 어머니는 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울부짖었다. 이때 귀정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성대생 등 1000여 명의 대학생이 귀정의 어머니 곁을 지켰다. 학생들은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방식에 분노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우리 학우 다 죽이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이들은 귀정의 시신이 있는 1층 응급실 주변과 병원 앞뜰에 모여 철야농성을 했다. 학생 중 50여 명은 경찰의 시신 탈취에 대비하기 위해 시신 사수대를 편성했다. 같은 달 7일 의문사 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시신이 무장한 경찰에 의해 영안실에서 탈취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병원 외곽에 병력을 배치해 학생들의 병원 출입을 제지했으며, 수차례 병원 앞뜰에 사과탄을 던지기도 했다. 시신사수대는 응급실 현관에 철제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친 뒤 화염병을 들고 경찰에 대항했다.

귀정의 장례식은 곧바로 치러질 수 없었다. 사인을 두고 경찰과 범국민대책회의 간 주장이 달라 부검 실시 문제로 이견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귀정의 죽음을 기록한 보고서에 "시위대원들이 진양상가 쪽 길목 입구로 도주하면서 봉고차와 부딪혀 20여 명이 넘어졌으며 그중 김양이 제일 밑에 깔려 의식을 잃었다"라고 적었다. 귀정의 사인을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 사고사로 규정한 것이다.

반면 대책회의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김귀정 폭력살인 임시진상조사반'은 ▲김양 시신의 무릎과 발 주위에 난 상처가 경찰의 구타에 의한 것으로 보이고 ▲사고 현장에 최루탄 파편과 머리핀 신발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으며 ▲이날 경찰이 평소보다 많은 양의 최루탄을 발사했고 ▲현장에 있던 다른 시위 참가자가 최루가스 때문에 구토를 하고 얼굴에 수포가 생기는 등의 곤욕을 치렀다는 점 등을 근거로 경찰의 과잉 진압과 최루가스에 의한 질식사라고 주장했다. 당시 그 자리를 함께한 목격자들의 증언도 있었다.
 
김귀정은 경찰의 진압을 피하려다 시위대에 쓰러졌으며 전경들이 쓰러진 시위대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넘어진 학생들의 대부분은 여학생들이었는데 시위대가 쓰러진 후 전경들이 그 위로 올라가 3~4분 동안 짓밟은 다음 길을 비켜주었다.  강OO(당시 성균관대 4학년)
- <한국일보>, 성대 김귀정양 사인놓고 논란

전경들이 사과탄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방패와 곤봉으로 넘어진 시위대를 마구 때렸고 이때 뒤쪽에 있던 한 남학생이 '여학생 하나가 죽었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이 소리를 들은 전경들이 슬며시 자리를 뜨는 사이 일어나 보니 김양이 바로 뒤에 실신해 있었다. 하OO(당시 덕성여대 1학년)

검찰은 귀정의 사인 규명을 위해서는 부검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족과 대책위원회 측은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수사가 먼저 진행돼야 부검에 응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부검 결과를 조작할 수 있다는 불신 때문이었다. 결국 귀정이 사망한 지 2주가 지난 후에야 검찰 측 의사와 대책위 측 의사가 공동으로 참여해 부검을 할 수 있었다. 귀정이 죽은 뒤 연일 병원 앞 농성을 벌여온 학생들은 귀정의 부검이 끝나자 대부분 학교로 돌아갔다.

검찰이 최종 발표한 부검 결과 귀정의 사인은 경찰의 과잉진압이나 최루탄에 의한 질식이 아닌 '군중의 무게에 깔려 숨진 것'이었다. 이후 1993년경 귀정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심과 2심 모두 경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도 1995년 11월 10일 "국가 소속 전투경찰은 최대한 안전하고 평화로운 방법의 시위진압을 해야 했는데, 이를 게을리한 채 과도한 방법으로 진압해 시위 참가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국가가 유족에게 1억400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한 원심을 인정했다.

1991년 봄은…
 

<1991, 봄> 영화 스틸컷 ⓒ 인디플러그

 
1991년 봄 대한민국은 유난히 많은 청년을 떠나보냈다.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강경대, 김귀정,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까지 포함하면 총 11명이 죽었다. 권위주의적 통치로 회귀하는 듯한 노태우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 기간에 전국적으로 무려 2300여 회의 집회를 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투쟁의 주체가 다양한 계급·계층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띠었지만, 중심 세력은 여전히 학생들이었다. 젊은이들의 잇따른 분신을 두고 일각에서 자살이라는 수단을 절대 합리화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지만, 이들이 불의한 시대에 죽음으로 저항한 것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들의 죽음이 잊혀서도 안 된다.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귀정이 사망한 날 시위에 참가했던 한 참가자는 당시 시위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었다… 김귀정씨 죽음을 놓고 질식사니, 압사니 하는 논쟁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 죽지 않는다는 가정은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991년 5월 29일 황OO씨 증언 중 일부)

- '귀정이는 죽지 않았다 - 김귀정 열사의 삶과 투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 추모사업회

 
짧은 삶을 살다가 공권력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그 짧은 세월을 귀정은 자신이 바란 대로 산 듯하다. 귀정이 일기에 쓴 다음의 내용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해 유서처럼 읽힌다.
 
난 무엇이 될까?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난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김귀정 열사의 일기 중 일부


- 이혜원: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4학년 재학. 아픈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두렵고 서글픈 일이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 항상 진실과 정의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김서정, "백골단에 빼앗긴 김귀정의 스물다섯 살", 『월간말』, 1991년 7월
2. 강정인, "특별기고-정치.죽음.진실-1991년 5월 투쟁을 중심으로", 『계간 사상』, 2002년 12월
2. "귀정이는 죽지 않았다-김귀정 열사의 삶과 투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1991년 6월 1일
4. "5.26기자회견-김귀정양 사망에 대하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1991년 5월 26일
5. 임미리, "잊힌 열사들의 시대 응답하라 1991", 『한겨레21』, 20017년 12월 15일
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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