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세자매> 스틸 컷

영화 <세자매> 스틸 컷 ⓒ 리틀빅픽처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글을 접했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글이 있다. 글쓰기 모임에서 어느 학인이 써 온 글인데 내용을 요약해보면...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고 엄마와 살았다. 중학교 시절, 엄마는 종교에 심취해 학인과 동생이 조금만 잘못해도 깜깜한 방안에 가두고 방언이 터질 때까지 기도하게 했다. 학인은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밤새도록 이어지는 체벌에 방언이 터진 척 연기까지 했지만, 급기야 엄마는 겨우 중학생인 학인과 동생을 둔 채 기도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부터 학인은 온갖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그 와중에도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등록금 때문에 번번이 휴학했으며, 동생 뒷바라지와 생활비 때문에 365일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현실적으로 대학을 마치긴 힘들 것 같고 앞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글이었다.
 
학인이 이 글을 발표했을 때 나를 포함한 20여 명의 학인은 뜨거운 위로의 박수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오랫동안 쌓인 한 사람의 고통이 담긴 글은 강력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복기했을까.
 
 영화 <세자매> 스틸 컷

영화 <세자매> 스틸 컷 ⓒ 리틀빅픽처스

 
나에게 이 글이 다시 떠오른 이유는 영화 <세자매> 때문이다. 사실 명절이 되면 '명절에 추천하는 영화' 같은 종류의 글을 청탁받는다. 그래서 봤다. 하지만 정작 그 주제로는 글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다. 이 작품은 명절에 보면 안 되는 영화, 명절에는 피해야 할 영화인 것 같다. 가족 간의 아픔을 들춰내고 헤집어 놓아 모처럼 모인 명절에 분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도 많은 가정이 겪은 이야기일 테니까.
 
가수 요조는 책 '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에 이런 말을 썼다. "내가 아주 잘 지키는 다짐 중에는 어떤 책과 영화 앞에서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차마 못 읽겠다(보겠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겠다'가 있다. 그 앞에서 나의 가슴 아픔을 우려하는 일이 한없이 비루하고, 유치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자매>는 그런 영화다.
 
큰 언니 희숙(김선영 분)은 인생 자체가 그저 죄송하다. 늘 주눅 들어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희숙의 딸 보미도 존재감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캐릭터다.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충격적인데, 마요네즈를 통째 들고 찔끔찔끔 짜 먹으며 엄마인 희숙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희숙은 이런 모멸감을 자해로 해소한다.
 
둘째 미연(문소리 분)은 성가대 지휘하며 세상 둘도 없이 인자하고 친절하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소름이 돋는 캐릭터인데, 미연은 먼저 언급한 학인의 글에 등장하는 엄마와 너무도 비슷했다. 미연은 식사 때마다 어린 딸 하은에게 기도를 강제한다. 하은이 기도를 하지 못하자 화가 치민 미연은 아이를 어두운 방에 가두고 기도하라고 소리친다. 남편이 성가대 자매님과 바람난 것을 알고 취한 미연의 행동은 이해도 가지만, 어쩐지 섬뜩하다. 배우들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문소리, 박선영, 장윤주, 그리고 김가희까지. 특히 문소리의 가식이 뚝뚝 떨어지는 현실감 있는 연기는 경외심마저 들었다.
 
셋째 미옥(장윤주 분)은 극작가로 똘끼 충만하고, 보고 있으면 참 난감하다. 저렇게 타인의 감정에 무지한 사람이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지경이다. 미연은 중학생 아들이 있는 남자와 재혼했다. 학교에서 아들의 면담이 있는 날, 아들이 자기 대신 친엄마를 학교에 부른 사실을 알게 된 미옥은 속상한 마음에 술에 취해 학교에 찾아가 자신도 엄마라고, 그러니 면담해달라고 떼를 쓰다가 교무실 바닥에 토한다.
  
 영화 <세자매> 한 장면.

영화 <세자매>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이 세 자매가 아버지 생신을 맞아 고향 집을 방문하는데, 애써 잊고 지냈던 기억이 떠오르며 영화는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미연과 미옥은 어린 시절, 맨발에 내복 바람으로 창문을 통해 탈출해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동네 슈퍼, 아저씨 둘이 술을 마시고 있다. 추운 겨울에 맨발로 달려온 아이들을 보며 니 아버지가 또 술에 취해서 엄마를 때리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묻는다. 마치 일상인 양.
 
미연은 엄마가 아니라 언니와 남동생을 때린다며 신고해 달라고 부탁하고, 이에 아저씨들은 벌컥 화를 낸다. 감히 아버지를 신고해서 전과자를 만들 셈이냐며. 외려 빨리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라고 한다. 도움은커녕 혼구녕이 난 아이들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 앞에는 눈에 피멍이 든 희숙이 벌거벗겨진 채 온몸이 매 자국으로 난도질 된 남동생(3~4살 추정)을 안고 있다.
 
부모에게 맞아 죽은 수많은 정인이가 떠오르며,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오열했다. 아이들이 소변 실수를 했다고 물고문 당해 죽고, 우유를 토했다고 맞아 죽고, 이유 없이 맞아 죽고, 버려져 굶어 죽었다는 뉴스가 하루가 멀다고 흘러나온다. 영화는 가정폭력을 말하지만 내 눈엔 아동학대가 더 크게 다가왔다. '니 부모를 감옥에 보낼 셈이냐'는 거지 같은 이야기는 제발 이제 그만! 마지막 CCTV에 찍힌 정인이의 정처 없는 눈동자에 우리 모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요조의 말처럼 어떤 아픔이나 슬픔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봐야 하는 때가 있다. 풀어야 할 매듭이 있은 경우가 특히 그렇다. 알지 못하면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는 바뀌지 않으니까.

영화는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어른이 그 영향 아래 어떤 트라우마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가는지 매우 불편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물 없이 고구마 한 바구니는 먹은 듯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이 분노를, 이 불편함을 어떤 에너지로 바꿔야 할지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자매들 가정 폭력 아동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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