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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 청산리대첩을 표현한 ‘청산리전투도’
 무장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 청산리대첩을 표현한 ‘청산리전투도’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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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또 다른 친일단체 '동남지구특별공작 후원회'는 1940년 10월에 결성된 이래 항일독립군과 공산게릴라에게 투항권고문을 군용기를 동원하여 살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비라를 한인마을에도 배포하였다.  

황량한 산야를 정처없이 배회하며 풍찬노숙하는 제군!

밀림의 원시경에서 현대문화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불행한 맹신(盲信) 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초개같이 도(賭)하고 있는 가엾은 제군!

제군의 저주된 운명을 깨끗이 청산하여야 될 최후의 날이 왔다! 

생하느냐! 사하느냐! 150만 백의동포의 총의를 합하여 구성된 본 위원회는 금동(今冬)에 전개될 경군(警軍)의 최종적인 대섬멸전의 준엄한 현실 앞에 직면한 제군들에게 마지막으로 반성 귀순할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이에 궐기한 것이다.(……)

150만 동포와 완전히 격절(隔絶)된 제군의 빈약한 수백정의 소총을 가지고 공육(空陸)에 긍한 근대적 장비를 가진 세계에 비례 없는 정예한 수백만의 일만 군에 저항을 시(試)한다는 것은 실로 당랑거철(螳螂拒轍)도 분수가 있는 일이라고 제군의 우열(愚劣) 극(極) 함을 아등 150만은 개탄치 아니치 못하는 바이다. 

일본 제국은……동양적인 이상사회의 신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백인의 괴뢰가 되어 저항하는 장개석(蔣介石) 정권을 서촉(西蜀)에까지 구축하여 그 위무(威武)를 세계에 선양하고 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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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내에 있어서는 2천 3백만의 동포는 일본 제국의 위광하(威光下)에서 과거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념을 최후의 1인까지 완전히 청산하여 일본제국의 신민된 광영하에서 격세의 감이 있는 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하여 제군과 같은 시대착오의 이단자가 아직도 만주의 밀림에서 현실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사실이 상유(尙有) 한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상식으로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알 만큼 되어 있는 것이다.(…)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어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 유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여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여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 건설의 성업(聖業)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여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 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주석 3)
  

주석
3> 『삼천리』, 1941년 1월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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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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