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이끈 네 명의 장군들. 김좌진, 최운산, 김혁, 홍범도. 그 뒤로 평범했던 독립군들이 새겨져 있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이끈 네 명의 장군들. 김좌진, 최운산, 김혁, 홍범도. 그 뒤로 평범했던 독립군들이 새겨져 있다.
ⓒ 김종훈

관련사진보기

 
일본군의 이와 같은 만행은 북간도 지방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봉천성 관내의 서간도 지방에서도 자행되었다.

'중ㆍ일합동수색'이란 명목하에 일본군 우에다와 사카모토 부대에 의해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 동안 만행이 저질러졌다. 뿐만 아니라 일본 관동군 소속의 스기야 보병대와 기병 연대에 의하여 북간도 학살과 같은 만행이 자행되었다. 

일제의 학살극은 만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지방에서도 자행되었다.
그해 4월부터 일제의 포조군(逋潮軍)과 조선주둔군에서 파견된 남부 오소리(烏蘇里) 파견대가 한국인을 집단 학살하였다. 일본군은 4월 4일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서 러시아 적군(赤軍)과 충돌하여 그들을 무장해제하고, 이른바 '불령선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마을을 분탕질하고 항일 민족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총살했다. 이때 일본군은 한인학교는 물론 한인신문사, 교회 등에 방화하고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추대된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을 비롯한 70여 명의 한인을 학살했다. 훈춘참변을 취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던 장덕준 기자도 이때 살해되었다. 

1920년말에 발생한 서ㆍ북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참변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일본군은 자료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한인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불에 태웠으며 건물도 방화하여 완전히 소각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훈춘사변 후 북간도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0월과 11월의 통계만 보더라도 피살된 수가 3,664명이며 민가 3,520동, 학교 59동, 교회당 19개소, 곡물 5만 9,970섬이 소실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측의 비밀 정보자료에 의해서도 그들의 만행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군의 '토벌대' 주력인 19사단사령부의 보고서 (『북간도 출병사 上)』에 따르면 피살 494명, 체포 707명, 민가 531동, 학교 25동이 소각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대폭 축소한 엉터리 보고서이다.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일제의 한인 학살에 대해 만주에서 발행하는 『길장일보(吉長日報)』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훈춘사건이 발생될 때 일군의 수는 5,000~6,000명이나 된다. 그들은 독립군이든 아니든 묻지도 않고 한인이라면 함부로 수색하며 살해하고 있다. 예컨대 삼둔(三屯)에서 한인 3~4명이 체포되었고, 남대고비(南大古比)ㆍ오술동(五述洞) 마을의 가옥은 몽땅 소각되었다. 그리고 빈송배(杉松背) 등에 서는 14명이 타살되었는데, 그중에는 학생이 5~6명, 교원이 1명이 있었다. 

소가(小街)에서는 12명이 타살되었고 경성위자(鏡城威子)에서 타살된 남녀는 도합 200여 명에 달한다. 삼도구에서 불에 탄 화민(華民) 가옥은 2호이고 한인 가옥은 500~600호이다. 삼도구내의 청산리지방의 전 촌 한인가옥 1,000여 호를 전부 불살랐으며, 봉자구의 한인가옥 70~80호도 불태워버렸다. 회경가의 50~60호의 한인가옥과 명동학교도 불태웠다. 최근 3주일 내에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한인은 2,000여 명에 달하며 매개 촌에 이르러서는 남녀를 한 곳에 집결시켜 놓고 함부로 총살하거나 불태워 죽였으며 혹은 집안에 가두어 놓고 소살하였다. (주석 7)


주석
7> 『길장일보』, 1920년 11월 7일치.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