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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반일 전적지’기념비가 있는 봉오저수지 입구. 일대가 모두 전적지이겠지만,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계곡과 마을은 물에 잠겼더군요. 서운했습니다.
  ‘봉오동 반일 전적지’기념비가 있는 봉오저수지 입구. 일대가 모두 전적지이겠지만,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계곡과 마을은 물에 잠겼더군요. 서운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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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은 봉오동의 지형지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신중한 전략으로 대처하였다. 『독립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제1연대를 봉오동 상촌 부근에 재한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하(下)하여 각 부대의 전투력 및 임무를 정찰새 제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占位)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戰備)하였다가 적이 내도할 때에 그 전위를 동구(洞口)에 통과케 한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포위중에 입(入)할 제에 호령에 의하여 사격케하고 연대 부장교 이원은 본부급 잔여중대를 영솔하고 서북 산간에 점위하여 병원(兵員) 증원과 탄약 보충, 식량급식에 임케하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로 그 부하 1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 북편 약 1천 2백미터 되는 고지와 그 동북편 촌락 전단에 약간 병원을 분(分)하여 잠복했다가 적이 내도하거늘 전진을 지체케 하다가 봉오동 방면으로 양패퇴각케 하고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는 동북산서간 최고봉 독립수하(獨立樹下)에 재하여 지휘케 하다. (주석 1)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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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으로 독립군은 일본군을 크게 격파할 수 있었다. 

1920년 6월 7일은 일본군이 우리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한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골 저수지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지점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하였다. 

6월 7일 상오 7시에 북간도에 주둔한 우리 군 700명이 북로사령 소재지인 왕청현 봉오동을 향하여 행군할 새 불시에 동 지점을 향하는 적군 300명을 발견한지라, 동군을 지휘하는 홍범도ㆍ최명록(최진동) 양 장군은 직접 적을 공격하여 급 사격으로 적의 120여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적의 패주함에 따라 바로 추격전을 펼쳐 현재 전투중에 있다. (주석 2)


이날 오후에는 또 한 차례 독립군의 일본군 섬멸 작전이 전개되었다.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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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의 매복상황을 알지 못한 채 일군추격대는, 이화일이 이끄는 독립군 유인부대와 접전을 벌인 뒤, 7일 오후 1시경 완전히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홍범도는 일제사격의 신호탄을 발사하였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며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이를 신호로 삼아 삼면고지에서 일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군은 가마다니(神谷) 중대와 나까니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결사적인 돌격을 시도하는 한편 기관총대로 하여금 응전토록 하였으나, 지형적 우세를 점한 채 퍼붓는 독립군의 일제공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이러한 포위망 속에서 3시간 동안 필사적인 저항을 하던 일군 추격대는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더 이상 응전치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독려하여 퇴각하는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립군 본영을  일거에 분탕하려던 일제의 월강 추격대대는 봉오골에다 엄청난 사상자만 남겨 놓은 채 동남방의 파파동을 거쳐 유원진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주석 3)


봉오동전투의 날은 '기상이변'이 심하였다.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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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한창일 때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 뇌성이 하늘을 뒤덮었다. 지형지물을 잘 아는 아군에게도 결코 유리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 속에서 독립군은 일본 정규군과 맞서 적을 토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봉오동전투가 한창이던 오후 4시 20분경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이 폭풍과 함께 거세게 쏟아져 상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지는 기상 이변이 있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자 사령부장 홍범도는 신호용 나팔을 불어 독립군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틈을 타서 일본군은 패주한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홍범도의 직접적 지휘를 받지 않던 신민단 독립군 약 80명은 다른 부대의 철수를 알지 못하고 패주하는 도중의 적 기관총 소대와 정면으로 부딪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민단 병사들은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냈고 일본군도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주석 4)

봉오동전투의 궂은 날씨는 다음의 증언에서도 나타난다. 

연변 소년신문사 주필 최성준은 선친이 16세 때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 때 제 아버지는 16세였지만 키가 6척이었어요. 그래서 최진동 부대에서 기관총을 다루었지요. 봉오골에서 전투를 치루는 데 비가 많이 와서 기관총이 제 기능을 못해 마지막에는 적들이 흩어져 더 이상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아버지가 살아 생전 늘 얘기했지요."(2003년 1월 연변에서 인터뷰). (주석 5)

이와 같은 불순한 날씨에서도 독립군은 일본군을 무찔러 대첩을 이루었다. 독립군은 우중에서도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다시 매복전으로 적군을 유인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그리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대한북로군부) 신민단의 소부대도 참전하여 봉오동 골짜기에서 현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시킨 대첩이었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병력과 화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3ㆍ1혁명 이후 크게 앙양된 병사들의 사기와 현대식 무기 그리고 지휘관들의 지리적 이점을 적절하게 활용한 전략전술 때문이었다. 봉오동전투는 4개월 뒤 청산리 대첩을 가져오게 하는 독립군의 사기진작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주석
1> 『독립신문』, 제88호.
2> 『독립신문』, 1920년 6월 20일치.
3> 윤병석, 『북간도지역 한일민족운동』, 338~339쪽, 독립기념관, 2008.
4> 장세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161쪽, 독립기념관, 1997.
5> 김주용,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의의」, 『여천 홍범도장군 순국 69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 발표문, 2012.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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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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