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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
 이날치
ⓒ 이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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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밤 '범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요즘 들어 이날치 밴드의 곡 <범 내려온다>를 하도 많이 들었더니, 급기야 꿈에서까지 나타난 것이다. 유튜브의 뮤직비디오를 족히 100번은 더 반복해 본 것 같다. 중독성으로 치면,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저리 가라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 이 곡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지겹기는커녕 5분 30초라는 짧지 않은 영상을 볼 때마다 넋을 놓게 된다. 무시로 꺾이는 창법과 몸이 막대기처럼 움직이는 이른바 '좀비 춤'은 그냥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신난다.

노랫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도 없고, 춤을 흉내 내기도 쉽지 않다. 세션이라고 해 봐야 드럼과 베이스 기타 두 대가 전부지만, 여느 밴드 못지않게 현란하며 풍성하다. 여느 밴드처럼 여러 악기가 뒤를 받쳤다면, 소리꾼 네 명의 목소리가 되레 묻혔을 것 같다.

대신 춤이 세션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춤사위가 목소리에 흥을 돋운다. 동작의 경쾌한 박자감이 마치 북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직접 반주도 하고 노래를 하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그래서, 팀 이름을 중의적이라는 의미의 앰비규어스(Ambiguous)로 명명한 걸까.

사실상 앰비규어스가 이날치고, 이날치가 앰비규어스다. 흔히 판소리의 3요소로 창, 아니리, 발림을 든다. 팬들의 호응이 아니리라면, 그들의 춤은 소리꾼과 팬을 이어주는 발림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로 인해 곡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치'를 찾아서 

그중에도 압권은 '이날치'라는 범상치 않은 밴드 이름이다. 한국사 교사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처음엔 이날치가 사람 이름인지도 몰랐다. 판소리의 느낌이 나도록 입에 착착 들러붙게 만든 신조어인 줄로 알았다. 마치 정확한 어원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리랑'처럼 말이다.

밴드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조선 후기 8대 명창으로, 본명이 경숙(敬淑)이라는 것과 줄타기 등의 기예가 뛰어나 날래다는 뜻으로 '날치'로 불렸다는 사실 등을 전해 들었다. 처음 밴드가 결성됐을 때, 구성원 7명이 투표를 해서 이름을 정했다는 후문까지도.

왜 하필이면 이날치였을까. 곡의 장르와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명명으로, 팬들 모두가 '신의 한 수'였다고 평가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하고 많은 명창 중에 그를 주목한 까닭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들을 인터뷰한 기사는 차고도 넘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를 밝힌 적은 없다.

그래서, 직접 이날치의 남다른 생애를 찾아 공부해 보기로 했다. 이 또한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태어나 자라고 득음한 뒤 명성을 얻은 곳이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20분 남짓의 거리다. 이렇듯 가까운 곳인데도,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게 면구할 뿐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은 쉽게 검색이 되지만, 내용은 채 A4 반쪽 분량도 안 된다. 그나마 생애에 대한 기록이 사뭇 달라 어떤 게 사실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소리꾼으로서 출세한 뒤의 활동 내용 정도가 일치할 뿐이다.

부잣집 종노릇을 해야 했던 미천한 신분이어서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봉건제 사회에서 그의 이름과 출생지, 생몰년 등이 남아 있다는 게 외려 다행이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 앞에서 재능을 뽐낼 정도로 명성을 얻었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날치는 1820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그를 한양으로 불러올렸다는 흥선대원군과 동갑내기다. 세상을 등진 때도 흥선대원군보다 고작 6년 앞선 1892년이다. 말하자면, 흥선대원군과 그는 각각 정치와 소리로 19세기 한 시대를 풍미한 셈이다.

그는 담양 수북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나이 오십이 넘어 한양 출입을 하기 전까지 고향 인근 전라도 땅을 벗어난 적이 없다. 종살이를 했던 곳은 창평이고, 남사당패에 들어가 득음을 한 곳은 광주이며, 스승을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운 곳은 고부와 보성이었다.

오래전 영화 <서편제>가 주목을 받고, 판소리 등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이후에야 비로소 조선 후기 명창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흔히 전라도 판소리 창법의 두 갈래라는 동편제와 서편제라는 용어도 그 이후 대중화됐다. 이날치라는 이름도 그 틈에 알려졌다.

그즈음 그가 태어난 고향, 전남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워낙 외진 곳이어서 부러 발품을 팔아 찾아가야 겨우 만날 수 있다. 명색이 '국창(國唱)'이라는 찬사가 이름 앞에 붙어 있지만,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어 가까이 다가가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무슨 자연보호 표지석인 줄 알았다.
 
전남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가 이날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외진 그곳에 기념비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성암국제수련원 입구다.
▲ 국창 이날치 기념비 전남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가 이날치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외진 그곳에 기념비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성암국제수련원 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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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의 설명을 읽노라면,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명창을 배출했다는 지역민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그의 소리를 따라 새들이 모여들 정도였다는 설화까지 담고 있다. 비석 위에는 그가 평소 메고 다녔을 북 모양의 조형물이 주인인 양 세워져 있다.

고향인 수북을 떠나, 그가 남사당패를 따라 나서기 전까지 살았다는 창평의 유씨 집안을 찾았다. 지금 창평은 담양에 속한 면 단위의 작은 마을이지만, 당시만 해도 담양보다 더 컸던 도회지였다. 임진왜란 의병장인 김천일과 고경명 등 창평이 배출한 역사 인물만도 숱하다.

이날치는 문화 유씨 집안에서 종살이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문화 유씨는 창평을 비롯해 인근 대덕과 담양의 대표적인 명문가다. 집성촌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지금도 문화 유씨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방대한 양반가의 일기라고 평가받는 보물 260호 <미암 일기>의 저자 유희춘도 이웃 마을에 살던 직계 조상이다.

현재 창평에는 문화 유씨의 종갓집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2호로 지정된 '담양 유종헌 가옥'이 그것이다. 이곳에서 종살이를 했다고 확정할 순 없지만, 이 지역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였던 만큼 대소사가 빈번해 그가 문턱이 닳을 만큼 드나들었을 것이다.

수백 년 전 처음 지어졌을 때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명문가의 기품은 여전히 오롯하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와 사당 등 4개의 건물이 따로 또 같이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끼리 복도나 벽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면 외려 더 답답해 보였을 듯하다.
 
문간채에서 본 사랑채의 모습이다. 왼쪽에 수령을 알 수 없는 큼지막한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날치가 이곳에서 종살이를 했다면, 오른편 문간채가 그의 방이었을 것이다.
▲ 담양 유종헌 가옥 사랑채 문간채에서 본 사랑채의 모습이다. 왼쪽에 수령을 알 수 없는 큼지막한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날치가 이곳에서 종살이를 했다면, 오른편 문간채가 그의 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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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는 밀림 같은 대숲이 병풍처럼 집터를 감쌌고, 앞으로는 너른 창평 들녘이 내려다보인다. 담이 있지만 불과 허리춤 높이라 시야를 전혀 가리지 않는다. 마을의 맨 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마치 다른 집들을 호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수령을 가늠할 수 없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고, 그 곁을 지나야 집안에 든다. 이 집은 안마당이 웬만한 초등학교의 운동장만 하다. 여느 전통 가옥처럼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공간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으로 가지고 의도적으로 비워둔 것 같다.

무엇에 쓰려고 했던 걸까. 그랬을 리는 없지만, 이날치가 동네 사람들 모아놓고 판소리 한 대목 멋들어지게 뽑는 마당극 장면이 연상된다. 그가 줄타기를 선보이며 타고난 광대의 재능을 뽐내는 광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지금 눈 덮인 안마당엔 대숲 바람 소리뿐이다.
 
안채로 오르는 계단의 나무 난간이 이채롭다. 오른편 사당 앞으로 웬만한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공간이 있다. 건물이 있던 자리 같진 않다.
▲ 담양 유종헌 가옥의 안채와 사당 안채로 오르는 계단의 나무 난간이 이채롭다. 오른편 사당 앞으로 웬만한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공간이 있다. 건물이 있던 자리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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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을 초월한 목소리 

'느낌적인 느낌'일 뿐, 이곳에서 이날치의 자취를 찾을 순 없다. 더욱이 이 집은 조선 중기 정계의 거물이자 가사 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송강 정철의 처가로, '천출'인 그가 감히 낄 곳이 못 된다. 마을 어귀에 송강 정철을 배향했던 송강서원 터도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당시의 위세를 보여주려는 듯 비석 몇 기가 데면데면하게 서 있을 뿐이다. 집주인인 문화 유씨 가문조차 송강 정철의 명성에 가려진 마당에 이날치가 종살이하며 살았던들 무슨 대수랴. 다만, 그의 재능을 높이 산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참 얄궂다.

이날치는 열 살 아래의 박만순과 무려 열다섯 살이나 어린 박유전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박만순은 '가왕' 송흥록의 수제자로 동편제의 대표 명창이고, 박유전은 서편제의 비조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나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배움을 향한 열정이 읽히는 대목이다.

그는 가장 서민적인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다. 민중의 애환이 스며 무속의 기운이 강하다는 평가에다, 날치라는 예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대장부가 어찌 광대 짓에 놀아나느냐고 조롱한,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을 웃기고 울릴 만큼 그의 소리에는 신분을 초월한 힘이 있었다.

그의 소리를 통해 동편제와 서편제가 섞이고, 완고한 신분적 굴레가 한 꺼풀 벗겨지며 모두가 흥에 취했다. 옛 이날치와 지금의 이날치가 겹치는 대목이다. 상극 같던 판소리와 팝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고답적이었던 국악이 어깨 힘을 빼고 대중과 만나는 계기가 됐으니 그렇다.

지금의 이날치에 어깨를 들썩이는 이들이라면, 옛 이날치의 생애를 찾아 남도 땅을 부러 둘러볼 일이다. 나고 자란 수북과 창평에서 득음한 무등산 증심사로, 사제의 연을 맺은 고부와 보성까지 찾는다면, 하루해가 짧을 것이다. 판소리의 본향인 이곳 남도 땅에서 그의 자취를 따라가며 이날치 밴드가 공연하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태그:#이날치, #범 내려온다, #유종헌 가옥, #판소리, #송강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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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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