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아는 <허쉬>에서 좀처럼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는 대선배 황정민과 연기호흡을 맞출 기회를 얻었다.

드라마 <허쉬> ⓒ JTBC

 
"제 좌우명은 '펜은 총보다 강하지만 밥은 펜보다 강하다'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세상 모든 일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기자도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니까.

기자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않느냐. 밥이 세상 무엇보다 우월하다는 팩트를 알게 된 이상 기자가 되겠다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업. 그게 제가 생각하는 기자의 정의입니다."

JTBC <허쉬>의 1화에서 중앙 일간지 <매일한국> 인턴으로 지원한 이지수(임윤아)는 면접에서 "기자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꽤나 신선한 도발이었다. 물론 상반된 의미의 도발이었다. 이 대사엔 '인턴이 저런?'이란 의문과 기자 윤리를 간단히 넘어선 먹고사니즘의 강변이 주는 의외의 설득력이 공존했다.

기자 소재 드라마는 어차피 기자 윤리의 회복과 그 투쟁 과정에 천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방영 중반을 넘긴 sbs <날아라 개천용>도 그 주제에 천착 중이다(관련 기사 : <정의감 없고 돈 밝히는 기자,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이유>). 재심 재판을 중심으로 사법/법조계와의 대립을 그린 실화 소재 드라마다.

닳고 닳은 12년 차 기자 한준혁(황정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허쉬> 역시 시작부터 그 궤적을 그려나갈 것을 암시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인턴 기자의 입을 통해 발화된 '밥은 펜보다 강하다'는 명제는 <허쉬>가 가리키는 주제의 선언적 반어라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종국엔 '밥은 펜보다 강하'지만 그럼에도 '밥보다 펜이 우선해야 한다'는 당위의 회복을 그릴 것이란 선언 말이다. 하지만, 6회까지 방영된 <허쉬>는 그 당위를 실천해나가는 캐릭터가 주는 설득력도, 일간지를 배경으로 한 기자 직업드라마로서의 현실감도, 직업드라마가 응당 갖춰야 할 동시대성이나 시대정신 모두 놓쳐버린 모양이다. 황정민이란 걸출한 배우와 촉망받는 임윤아를 내세운 <허쉬>은 왜 방영 초반부터 좌초해 버린 걸까.

기레기들의 자기연민

'먹고사니즘', 좋다. 기자들도 글 써서 밥 벌어 먹는 존재다. 아파트 전세금 걱정하고, 아이 학원비 계산하며, 언젠가는 기어이 노후를 근심해야 할 직장인들이다. 만나는 취재원들이 아무리 기득권이요, 권력자들이고, 상류계급일지라도, 사무실로 돌아오면 기자들도 한낱 직장인이요, 조직 구성원일 뿐이다.

일간지를 배경으로 한 <허쉬>는 이렇게 직장인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며 시작한다. JTBC가 잘하는 장르다. <검사외전>, <미스 함무라비>가 그랬다. 각각 검사와 판사를 조직 구성원으로 그리는 직장 드라마 장르의 일환이었다. 헌데, <허쉬>가 도드라지는 것은 지독한 '자기연민'이다. 마치 이런 식의 지독한 자기 연민.

'우리 <매일한국> 기자들은 원래 이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다. 그게 다 회사 탓, 구조 타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기레기'가 아닌 저널리스트로 살고 싶다. 쓰레기 기사가 아닌 진짜 기사를 쓰고 싶다. 우리가 망가진 것은 우리 탓이 아니다. 이젠 달라질 것이다.'

한준혁이 그런 경우다. 그는 6년 전 방송사 파업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PD에 대한 기사를 썼으나 데스크였던 나성원 국장이 기사를 수정해 나락으로 떨어졌던 인물이다. 본인 기사를 데스크가 완전 반대 기사로 수정하면서, 형처럼 지냈던 방송사 PD가 충격을 받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허쉬>는 당시 한준혁이 이를 항의했지만 끝내 사측 권력에 의해 무산됐고, 하필 항의를 하던 당일 한준혁의 책임으로 아이가 사고를 당했으며,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한준혁이 이혼 후 무기력에 시달렸고 디지털 뉴스부로 좌천되면서 결국 기레기로 전락됐다는 친절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그 반대편에 선 인물이 또 다른 주인공인 이지수(윤아)다. '먹고사니즘'에 의해, 홀어머니에게 입사 사실 조차 숨긴 '인턴' 이지수는 또 하필 한준혁의 아픈 고리인 방송사 PD의 딸이다. 처음부터 한준혁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위치의 이지수는, 그와는 별개로 상당히 도전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언뜻 '진짜 기자'로 거듭나는 한준혁에게 동기부여를 방송사 파업을 주도한 언론인의 딸이라서 일까. 그 외에 '성격'말고는 고작 '인턴 나부랭이'인 이지수가 팀장급 선배에게 어쩜 저리 당당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허쉬>는 이렇게 초반부터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캐릭터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전개를 채택한다.

또 다른 인턴 오수연(경수진)의 자살은 초반부 <허쉬>의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이자 한준혁이 변화를 다짐하는 가장 큰 변곡점이다. 여러 언론사 인턴을 전전하다 매일한국에서조차 지방대 출신이란 이유로 정규직 전환에서 탈락할 위기를 맞자 오수연은 야근 중 극단적인 선택한다. 고통 없인 수확도 없다는 뜻의 'No Pain, No Gain'란 메시지를 담은 유서를 인터넷 기사로 송고한 채.

세간의 작위적이란 비판을 더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현실 속 노동자들이나 청년들의 안타까운 선택을 언론사 인턴의 죽음으로 끌어온 <허쉬>가 그만큼의 현실성과 공감대를 획득했느냐가 관건일 터.

자기연민을 언급한 것이 그래서다. 일선 기자들이 저널리즘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동기부여를 위해 드라마 속 인물, 그것도 20대 청년 인턴의 죽음을 딛고 올라선다는 설정자체가 심히 게으르거나 불온하다고 할까. 더군다나, <허쉬>의 원작은 11년 간 어느 보수일간지에서 몸담았다 지난해 아예 소설가로 전향한 전직 기자가 2년 전 발간한 소설이 아닌가.

<허쉬>는 <미생>이 아니기에
 
 드라마 <허쉬> 한 장면

드라마 <허쉬> 한 장면 ⓒ JTBC

 
그런 자기연민은 어쩌면 직업드라마의 필수 요소로 볼 측면도 없진 않다. 다만, 기자라는 직군, 특히나 일간지 기자라는 직군 자체가 일종의 기득권이자 특권층이라는데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미생>과 같이 직장인들의 자기 위로와 응원을 주제의식으로 취하기 어려운. 기자 직군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대체로 정의감이나 윤리 의식이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 주제와는 또 별개로 <허쉬>의 약점은 또 있다.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평면적이고 획일적이다. 자기연민을 눈 감더라도, 그러니까 딱 둘라 나뉜다. '진짜 보도를 할 가능성이 있는가'와 '그냥 조직에 충실한 인간형'인가다. 한준혁 주변으로 뭉치는 인간형은 전자요, 나머지는 죄다 후자로 분류된다.

다시 말해, 단순한 흑백 논리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우연찮게 같은 기자 소재 드라마인 <날아라 개천용>이 오히려 그러한 뚜렷한 선악구조를 극 전체의 활력이자 전개의 동력으로 내세운 것과 비교되는 지점이기도 하고.

또 하나, <허쉬>가 내세우는 언론의 모습이 얼마나 동시대성을 담보해내는지도 의문이다. 앞서 언급한 직장 드라마로서의 문제제기 외에 <허쉬>가 지금껏 지적한 언론 지형의 문제는 포털 실시간 검색을 이용한 '어뷰징' 기사나 인터넷 '복(사)붙(여넣기)', 과거 표현으로 '우라까이' 기사 정도다. 한준혁이 쓴 기사를 데스크가 '킬'하는 상황이 '현재성'을 담보하다고 보기는 더더욱 어렵고.

그러니까, '언론개혁'이 화두가 떠올랐을 지경인 2020년대를 풍경화하기보다 2000년, 2010년에 했어도 무리 없을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가 장악한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드라마 속 디지털 뉴스팀의 풍경도 딱 그 정도 수준이라고 할까.

<허쉬>는 그런 핍진성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중반부를 향해 가는 동안 캐릭터들의 사연을 나열하고 자기연민을 설명하는 데 장시간을 할애했다. 황정민을 비롯해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다수 포진한 이 야심찬 드라마가 후반부까지 활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침, 지난 연말 휴지기를 가지고 8일 방송된 8화는 시청률 2.7%(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1화(3.4%), 2화(2.6%)보다 더 떨어진 수치다.
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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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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