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7 12:14최종 업데이트 20.12.2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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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를 시찰하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 이전 모습이다. ⓒ 국가기록원

 
한국 현대사를 강타한 유신체제는 같은 시점의 북한 유일체제 확립과 궤를 같이했다. 박정희 유신체제와 김일성 유일체제가 상호 연동됐다는 점은 1972년 12월 27일 하루 동안에 벌어진 사건만으로도 설명된다. 그날 남한에서 벌어질 사건은 27일 자 조간신문인 <조선일보> 1면 톱기사에 보도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27일 유신헌법이 공포·발효되는 데 이어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정부는 이날 오전 11시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갖고 제4공화국의 출범을 내외에 선언한다. (중략) 이에 앞서 정부는 오전 8시 30분 중앙청 중앙회의실에서 지난 11월 21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된 유신헌법의 공포식을 갖고 이를 발효시킨다.
 
같은 날 북한에서 벌어진 사건은 28일 자 <동아일보> 기사 '북한 새 헌법'에 보도됐다.
 
북한은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1회 회의에서 전문 11장 149조의 새 헌법을 채택했다. 동경에서 보도된 북한 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새 헌법의 특징은 (1) 수반으로 주권을 대표하는 임기 4년의 주석제를 신설했으며 (2) 행정집행기관으로 정무원(내각)을 두었으며 (3) 수도는 평양(종전에는 서울)으로 했다는 점이다. 신설된 주석에는 김일성이 선출될 것이 틀림없으며, 신헌법이 김일성 체제의 강화를 노린 것이라고 일본 신문들은 보고 있다.
 
남한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된 다음날인 1948년 9월 8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채택됐다. 이 헌법 제10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시다"라는 규정이다. 이 규정이 1972년 12월 27일 채택된 헌법 제149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평양이다"로 바뀌었다.

남한 사람들의 눈에 얼른 띄는 수도 변경 조항과 함께 그날 채택된 북한 헌법에서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를 바꾸는 조항들이 등장했다. 종전의 인민민주주의(사회주의에 자본주의 살짝 가미)를 대체하는 전면적 사회주의 체제와 함께 종전의 최고인민회의-내각 분점 체제를 혁신하는 주석 절대 체제를 담은 조항들이 그것이다.


이 헌법의 채택으로 내각 수상 김일성은 국가주석 김일성으로 격상됐다. 그는 최고인민회의에 의해 선출되고 거기에 책임을 지지만, 그로부터 소환되지는 않는 절대적 지위를 확보했다. 김일성 유일체제가 헌법 조문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12월 27일 공포된 남한 유신헌법 제40조에서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하면 대통령 휘하의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그 3분의 1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결국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뽑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규정이 북한 헌법에도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12월 27일 채택된 북한 헌법 역시 김일성의 권력과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그런 점에서 유신헌법과 맥을 같이했다.

태도 돌변한 이유

1972년 여름에 남북 두 정권은 7·4 공동성명으로 민족 전체를 충격과 환희에 빠트렸다. 당장에라도 통일이 이뤄질 것만 같은 환상이 확산했다. 그랬던 두 정권이 그해 겨울에는 유신체제·유일체제의 헌법적 제도화로 또 한 번 충격을 선사했다. 여름에는 통일에 올인하는 듯했던 두 정권이 겨울에는 자기방어 모드로 돌아섰다.

유신체제 확립 이전에 남한에서는 1969년 3선 개헌을 계기로 박정희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저항운동도 거세졌다. 북한에서는 1956년 8월 권력투쟁을 계기로 김일성 권력이 공고해지면서 사회 전체가 김일성 유일체제를 향해 나아갔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내부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고 김일성 유일체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지만, 1972년의 남북 두 체제는 지도자의 절대적 우위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1972년 현재, 김일성 정권은 27년간 집권한 상태였고, 박정희 정권은 11년간 집권한 상태였다. 양쪽 다 장기집권 상태였던 1972년에 양쪽이 똑같이 절대 체제의 헌법적 제도화에 나섰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충분히 설명된다.
 

1972년 개헌 1년 전의 김일성. 루마니아 지도자 차유셰스쿠를 영접하고 있다. ⓒ 위키백과

 
1월 1일에 쿠르트 발트하임이 국제연합(유엔)의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그해는 데탕트(화해) 기운이 전 세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까지 한층 더 확산한 한 해였다.

이 시기의 데탕트 기운을 형성한 원인이 있다. 미국(1945년)과 소련(1949년)에 이어 영국(1952년)·프랑스(1960년)·중국(1964년)까지 핵실험에 성공함에 따라 미·소 양강 구도가 다극화될 조짐을 보인 것, 195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미·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비동맹노선(제3세계 노선)을 표방한 것, 미국의 경제지원을 받던 유럽이 경제성장에 힘입어 독자적 움직임을 보인 것, 1968년부터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고전을 겪게 된 것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미·소가 1945년 당시처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데탕트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에는 미국과 중국의 화해가 가속화됐다.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고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상하이 코뮈니케)이 발표됐다.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인 일본도 이 흐름에 보조를 맞췄다. 7·4 남북공동성명 3일 뒤 출범한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은 9월 9일 중·일 공동성명을 통해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달성했다.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냉전적 국제관계를 위험도에 따라 열거하면, 미중관계·북미관계·남북관계가 1그룹에 포함되고 중일관계·북일관계가 2그룹에 포함되고 한소관계·한중관계가 3그룹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소련과 일본의 관계는 1956년 10월 국교정상화로 냉전 상태를 극복했다. 일소관계를 제외한 7개의 냉전적 관계 중에서 1그룹의 미중관계와 2그룹의 중일관계가 1972년에 급격히 변동했다.

이에 더해 미·소 긴장을 완화하는 조치도 있었다. 5월 26일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 체결이 그것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그때는 냉전질서에 대한 남북한 정권들의 의존도가 훨씬 높았다. 남북 두 정권은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를 통해 내부를 단속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그런 양상이 절정에 달했다. 1968년의 1·21사태(북한 김신조 서울 침투)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이 그런 대결적 흐름 속에서 돌출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세계적 훈풍이 한반도에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굳어진 냉전을 기반으로 하는 남북한 정권에 이런 훈풍은 위기 신호가 됐다. 신속히 대응하지 않으면, 봄기운에 녹아드는 빙판에 서 있다가 강물 속에 빠지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양쪽은 7·4 공동성명을 통해 자신들도 데탕트에 호응하는 듯이 행동했다. 변화에 호응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그 변화가 가하는 타격을 피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남북 어느 정권도 그 제스처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적대적 분위기 조성으로 정권을 연장하는 데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종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다. 데탕트로부터 냉전체제를 지키려면 좀 더 강한 헌법적 보호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직후부터 유신체제·유일체제 확립을 통해 정권을 수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가을에 시작된 이 흐름이 겨울에 완성됐다.

남북한 정권들은 여름에는 의인처럼 행동했다가 겨울에는 본심을 드러냈다. 양쪽 모두 그해 하반기에 절대 체제 확립을 서두르다 보니, '상호 간의 일정 조율'도 없이 12월 27일 한쪽에서는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한쪽에서는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됐다.

1972년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가 신속히 거둬들이고 자기방어 모드로 확 돌아선 남북 두 정권의 태도는, 2018년과 2019년 두 해에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 북한 정권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도 어느 정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아직도 미·소 냉전 단계 못 벗어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9일 북한 평양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노동당 정치국 확대 회의를 열었다고 30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2020.11.29 ⓒ 연합뉴스=조선중앙통신

 
여전히 냉전 구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탈냉전화한 남한 문재인 정권과 달리 북한 김정은 정권은 훨씬 더 크게 냉전 구도에 의존하고 있다. 상대 진영과의 화해보다는 적대에 더 익숙한 과거 역사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북한 정권으로서는 남한·미국과의 화해 못지않게 그 화해가 정권 유지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여정의 막말과 김정은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는 남한의 대미의존적 태도와 그로 인한 남북경협의 부진에 대한 실망감에도 크게 기인했지만, 급격한 화해 분위기가 초래할지 모르는 정치적 기반의 약화를 우려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급격한 화해를 장기간 지속시키면서도 정권을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는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남한이 대미 종속적 태도를 극복하는 것 못지않게 북한이 냉전적 정권 운영 방식을 극복하는 것도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핵심 과제라고 볼 수 있다.

1972년과 약간이나마 유사한 현상이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는 점은, 한참 전에 미·소 냉전을 빠져나와 이제는 미·중 냉전으로 돌입하는 세계 주요 국가들과 달리 아직도 미·소 냉전 단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민족의 처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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