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2020-2021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부산 kt와 안양 KGC의 경기. kt 허훈이 드리블하고 있다.

지난 10월 22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2020-2021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부산 kt와 안양 KGC의 경기. kt 허훈이 드리블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20년은 대한민국 사람 모두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한국농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로 인하여 KBL(남자프로농구)와 WKBL(여자프로농구)는 모두 2019-20 프로농구 정규시즌을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하고 조기에 종료되는 아픔을 겪었다. 프로화 이후 우승팀이 나오지 않은 채 시즌을 마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올해는 한국농구가 긴 암흑기를 딛고 모처럼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던 시점이었기에 더 아쉬웠다. 여자농구 대표팀은 지난 2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최종예선에서 악전고투 끝에 본선행 티켓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12년 만이자 통산 7번째 본선진출이었다.

남자프로농구는 허훈, 김종규 등 젊고 스타성을 갖춘 국내 선수들이 잇달아 등장하며 많은 농구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지난 시즌 조기종료 직전까지 유관중으로 진행된 205경기에서 총 64만1917명(평균 3131명)이 경기장을 찾은 것으로 알려지며 이전 시즌(총 270경기, 76만3849명·평균 2829명)보다 약 10.7%p의 관중이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12월 31일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치른 부산KT와 창원LG의 '농구영신' 매치가 19-20시즌 정규 경기 최다 관중인 7833명을 기록하는가 하면, 1월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개최된 올스타전은 9704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전년도 대비 약 86%p가 증가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무관중 경기와 조기종료라는 악재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았을 것이기에 농구계로서는 두고두고 안타까운 결과였다.

한국농구 '별들의 퇴장'
 
 프로농구 울산 현대모비스의 양동근이 11일 오후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열린 자신의 은퇴식에서 아내의 편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프로농구 울산 현대모비스의 양동근이 10월 11일 오후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열린 자신의 은퇴식에서 아내의 편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농구의 한 시대를 이끈 '별들의 퇴장'도 많은 아쉬움을 줬다. 지난 2019-20시즌을 끝으로 KBL 역사상 '올타임 넘버1' 선수로 꼽히던 울산 현대모비스의 레전드 양동근이 은퇴를 선언했다. 2004년 프로에 데뷔한 양동근은 상무 시절을 제외하고 현대모비스에서만 14시즌을 활약한 원클럽맨으로서 챔피언 결정전 6회 우승, 정규리그 5회 우승,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4회 등 역사에 남을 위대한 업적들을 수립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시즌이 조기종료된 이후 너무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면서 양동근은 공식 은퇴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2020-21시즌 개막 이후 뒤늦게 치러진 은퇴식 역시 무관중 경기속에 언택트로 진행되어 KBL 역대 최고의 선수를 떠나보내는 과정이 너무 조촐했다는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귀화혼혈선수 1세대'를 대표하는 전태풍, 문태영 등도 소속팀과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현역생활을 마무리하고 새 출발을 시작했다. '신명호는 놔주라고'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었던 수비의 달인 신명호, 늦깎이 MVP 신화의 주인공 박상오 역시 은퇴를 선언했다.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꼽히던 애런 헤인즈는 SK와의 재계약에 실패하며 KBL 무대를 떠나게 됐다.

별들이 진 자리에는 또다시 새로운 별들이 떴다. 올해 한국농구는 '90년대생들'의 약진이 본격화된 한 해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농구대통령 허재의 아들로 유명한 부산 KT 허훈(95년생)은 지난 시즌 데뷔 3년차 만에 프로농구 최고의 별로 떠오르며 김종규를 제치고 MVP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허훈은 2019-20시즌 단일 경기 9연속 3점슛과 최초의 20(득점)-20(어시스트) 클럽 가입같은 놀라운 기록을 남기며 농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종규, 두경민, 이승현, 최준용, 이대성, 변준형, 송교창, 양홍석, 허웅, 김낙현 등 90년대생 선수들이 어느덧 각 팀마다 핵심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며 프로농구의 세대교체와 함께 새로운 '황금세대'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게 고질적인 약점으로 거론됐던 프로농구는 최근 국내 스타선수들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다.

외국인 선수제도가 폐지된 여자농구에서는 '박지수 천하'가 활짝 열렸다. 98년생인 박지수는 데뷔 2년차에 이미 통합우승과 최연소 MVP를 석권한데 이어, 2020-21시즌에는 득점, 리바운드, 블록슛 등 주요 부문 1위를 모두 독주하며 '1990년대 서장훈' 이후 가장 독보적인 토종 최강 센터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부동의 에이스답게 12년 만의 올림픽 본선진출을 이끄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한편 보수적인 농구계가 소통과 변화의 중요성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프로농구는 최근 다양한 뉴미디어 채널과 영상-인포그래픽 등 자체 콘텐츠를 개발하며 경기 외에도 팬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감독이나 선수들에게 마이크를 착용시켜 경기중이나 라커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실제 상황들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시도가 많은 호응을 얻었다.

허재-서장훈-현주엽-하승진-전태풍-박광재 등 전-현직 농구인들의 공중파 예능이나 유튜브, SNS 생방 등 각종 미디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농구의 인지도가 높아졌고 관중동원에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허훈-박지수-이대성 등 젊은 선수들은 개인 SNS나 인터뷰를 통하여 자신의 개성을 과감하게 드러내는가하면, 때로는 한국농구의 현 주소와 문제점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소신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개선해야 할 것들
 
 프로농구팀 인천 전자랜드 선수들의 모습.

프로농구팀 인천 전자랜드 선수들의 모습. ⓒ KBL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고 더 발전해야할 부분들도 많다. 농구의 질적인 측면(경기력 수준, 볼거리)에서 아직도 팬들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하다. 과거의 허재-서장훈-이충희같이 레전드급 선수들에 비해 훨씬 좋은 환경에서 뛰도 있음에도 실력이 그들만 못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프로선수가 노마크 3점 찬스조차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부정확한 자유투로 구설에 오르기도 하고, 어이없는 턴오버를 남발해 눈총을 사기도 한다. 국제무대에서는 2류 이하의 팀들을 상대로도 기본기에서 밀리는 모습들 보일 떄도 있어 반성이 필요하다. 또한 역대 최악의 신인 흉작으로 꼽힌 지난 시즌은 해마다 하락하는 젊은 선수들의 잠재력과 프로 조기진출 열풍에 가려진 국내 학원농구의 육성 시스템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한편으론 한국 농구 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일선에서 활약하는 지도자들의 리더십부터 달라져야한다는 평가도 많다. 시대가 변화하고 있음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아직까지 권위적인 '꼰대' 리더십과 체력-조직력을 강조하는 한국형 농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문규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이 올림픽 본선행이라는 업적을 일궈내고도 혹사와 구시대적인 농구라는 비판 여론에 휘말리며 낙마한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하승진-전태풍 등 은퇴한 농구선수들이 현역 시절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국농구가 재미없는 이유'에 대해 말하며 지도자들의 권위적인 리더십에 일침을 놓은 장면은, 농구팬들과 많은 후배 농구선수들의 공감대를 자아내기도 했다.

한국 프로농구는 여전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버티고 있는 모래성과 같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스폰서와 관중수익 등이 감소하며 프로구단들은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다.

당장 올시즌을 끝으로 인천 전자랜드가 구단 운영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당장 내년부터 1997년 이후 유지되어 온 10개 구단 체제의 존립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여자농구도 지금의 6개구단 체제를 간신히 유지하기도 벅찬 상황이다. 발전과 퇴행 사이의 과도기에 서있는 한국농구가 살아나기 위하여 구성원들의 절박한 책임감과 위기의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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