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2020 KBO리그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5-0의 완승을 거둔 한화 선수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한화 선수들 ⓒ 연합뉴스


올시즌 KBO리그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대대적인 팀 쇄신 작업에 돌입했다. 이미 부동의 간판타자였던 김태균이 은퇴를 선언한 데 이어, 주장을 맡았던 이용규를 비롯한 윤규진, 안영명, 송광민, 최진행 등 주축 베테랑 선수 10여 명에 무더기 방출통보를 내렸다.

선수뿐만 아니라 송진우, 김성래, 장종훈 등 코치 9명에게도 재계약 불가를 통보했다. 특히 한화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헌신해온 상징적인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게 눈에 띈다. 아직 신임 감독이 결정되기도 전에 정민철 단장이 이끄는 구단 프런트 주도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는게 눈에 띈다.

어쩌면 한화이기에 더 낯선 풍경이다. 한화는 전통적으로 팀의 레전드와 베테랑에 대한 예우가 훌륭한 것으로 유명했다. 레전드급 스타는 말할 것도 없고 구단에 오랜 기간 헌신해온 인물들이라면 최대한 존중하는 문화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삼아왔다.

고 최동원, 이만수, 양준혁 등 다른 명문 구단들이 아무리 상징성이 큰 스타플레이어라고 해도 말년에 갈등을 빚거나 돌이킬수 없는 사이가 되면 무자비하게 '토사구팽'시키는 일도 빈번했던 것과 달리, 한화에서는 그런 비극이 적었다. 2000년대 초반 선수협 사태 당시 회장을 맡고도 한화에서 끝까지 명예롭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송진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오히려 '철밥통'야구나 '칰무원'(이글스=치킨+공무원)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구단의 지나친 의리와 온정주의가 변화의 발목을 잡는 부작용이라는 지적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랬던 한화가 이번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작심하고 칼을 빼들었다. 창단 첫 10위, KBO리그 역사상 최다연패(18연패) 타이기록, 구단 역사상 최다패(95패) 등 각종 '대참사'에 가까운 굴욕만을 남긴 2020시즌은 한화에게 큰 충격이자 위기의식을 절감하는 시간이 됐다. 구단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던 초유의 대규모 방출은 이번에야말로 한화가 오랫동안 미뤄온 팀의 혁신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한화의 행보를 바라보는 팬들의 반응은 아직까지 엇갈리고 있다. 최근 단행한 선수단 구조조정만 놓고봐도 '어차피 필요했던 수순'이라는 옹호론도 있는 반면, '노장 선수들만 희생양 삼았다'거나 '대안도 없는 무리수'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번에 방출된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팀내 주전급에 고액연봉자였지만 이용규 정도를 제외하면 팀 기여도가 크지않았던게 사실이다. 이들이 한화의 올시즌 최하위 추락을 비롯하여 장기간의 암흑기에 책임이 작다고는 할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선수들이 모두 효용가치가 전무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단순히 구단에서 오래 헌신했다는 의리나 보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야구는 결코 숫자로만 설명할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서배이자 멘토에서 베테랑 리더들의 역할을 무시할수 없다. 리빌딩은 무작정 젊은 선수들만 중용한다고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용덕 감독 사임 이후 최원호 감독대행체제에서 초반 준비가 덜된 젊은 선수들을 갑작스럽게 대거 기용했다가 한계를 느끼고 일부 베테랑 선수들을 다시 2군에서 불러들이며 연패를 탈출했던 것이 좋은 예다.

현대야구에서는 선수 '육성'이 가장 중요한 화두로 꼽힌다. 하지만 두산이나 키움처럼 좋은 육성시스템을 구축하여 선수들을 키워내는데는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 냉정히 말하여 한화의 육성시스템과 그 실적은 KBO리그에서도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한화가 비시즌간 얼마나 적극적인 전력보강에 나설지는 알수 없지만, 별다른 투자없이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만 막연히 기댄다면 몇 년간 최하위를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않을수 있다.

무엇보다 많은 팬들이 한화의 혁신 의지를 기대반 우려반으로 못미덥게 바라보는 가장 큰 불안요소는 '일관성'이다. 사실 한화에게 리빌딩이나 세대교체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이 짧게 잡아도 10년 전, 길게 보면 20년이 넘었다.

한화는 구단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1999년)을 이끌었던 송진우-정민철-구대성-장종훈 등 황금세대가 이미 대부분 30대를 넘기는 시점이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 김태균과 류현진 정도를 제외하면 차세대를 이끌어갈 대형 선수들을 키워내지못했다. 김태균이 은퇴하기 직전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큰 경쟁자 없이 4번타자 자리를 독점해야했던 것이나,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로는 제대로 된 토종 10승 투수를 한 명도 키워내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한화는 리빌딩의 필요성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감독과 프런트가 바뀔때마다 운영계획이 장기적인 연속성없이 수시로 흔들리기 일쑤였다. 김인식 감독 시절에는 즉시전력감을 유지하기위하여 노장이나 다른 팀에서 버려진 선수들을 끌어모으며 유망주 육성을 소홀히 하면서 말년에 암흑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한대화 감독 시절에는 젊은 선수들 위주로 강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으나 구단이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김응용 감독 시절에야 제대로 된 2군 훈련장이 설립되고 유망주 육성 시스템이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정작 1군 팀성적은 더욱 바닥을 쳤다. 김성근 감독 시절에는 다시 기존의 노선을 180도 바꿔서 단기간 외부 FA와 노장선수 영입에 돈을 물쓰듯이 썼다가 과도한 팀연봉 향상과 라인업 고령화, 투수들의 혹사 논란으로 성적도 못내고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초래했다. 한용덕 감독 시절에는 다시 '이글스 레전드'들을 소환하는 복고로의 회귀를 시도했지만, 리더십의 한계와 성적-세대교체 사이에 어정쩡한 노선으로 변화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말로만' 혁신을 한다고 호소하다가, 상황이 조금 달라지면 은근슬쩍 제자리걸음으로 회귀한 것이 지난 20년간 한화가 보여준 리빌딩 방식이었다. 감독이나 단장같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만 달라졌을뿐, 정작 '시스템'이나 '결과물'은 바뀐 것이 없다. 정민철 단장 역시 아직 프런트로서 성과를 증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여기에 '감독들의 무덤'으로 전락하며 앞으로도 당분간 고생길이 훤해보이는 한화의 차기 감독직을 이번엔 과연 누구에게 맡겨야할지도 아직 불투명하다.

한화가 변해야한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변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20년째 답을 찾지못하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선수단 대규모 방출과 신인 육성 프로젝트, 신임 감독 선임 등이 이번에도 그저 '보여주기'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주목해야할 것이다. 한화가 이번에는 양치기 소년이라는 조롱을 피하고 팬들이 기대하는 진짜 혁신을 이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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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이글스 정민철단장 리빌딩 한화새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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