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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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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언론... 그리고 변두리 의제 설정

한국 사회는 지난 1년 이상을 조국과 추미애 전·현직 법무부장관의 자녀 문제로 허송세월했다. 그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국가수반이자 행정 수반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들이 길게는 1년 이상을, 짧아도 6개월 이상을 다른 정치·경제적 사안들을 뒤덮을만한 국가적 의제(national agenda)였을까. 차분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처럼 국력을 소진시키고 사회갈등을 부추긴 중요한 원인 제공자 중 하나가, 두 사건으로 신문의 머리 기사와 방송 전면을 1년 이상 도배해온 '무책임한 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한국 사회는 부동산 문제, 인구절벽에 따른 대학 및 농촌 소멸 문제, 코로나19가 심화시키는 소득별 교육 격차 문제, 플라스틱 폐기물 처리로 대표되는 환경문제 등 보다 본질적인 사회적 의제들의 대안 도출에 실패하거나 아예 공론화조차 못하는 정책 부재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일각에선 언론개혁을 위해서, 신중하고 책임 있는 보도를 요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Punitive damage: 가해자 측, 통상 기업이 불법행위를 통해 이익을 얻은 경우,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때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손해배상을 부과하는 제도-편집자 주) 도입, 공영방송 국민추천 이사제 도입과 가짜뉴스 근절을 위한 방송관계법 개정 등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 개혁 이전에 더욱 중요한 과제는 한국 언론이 제대로 된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공론화와 대안을 모색하는 것. 즉 현실을 반영한 의제설정 능력의 신장이 우선돼야 한다는 점이다.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드는, 언론의 '실질적인 의제' 설정 능력 
 
 '중앙일보'는 2010년 9월 11일 지면을 통해 창간 45주년 기획 ' 예산 1% 통일기금 적립'을 소개했다. '중앙일보'는 2002년 신년기획 '업그레이드 코리아'부터 '예산 1% 통일기금 적립' 의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중앙일보"는 2010년 9월 11일 지면을 통해 창간 45주년 기획 " 예산 1% 통일기금 적립"을 소개했다. "중앙일보"는 2002년 신년기획 "업그레이드 코리아"부터 "예산 1% 통일기금 적립" 의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 중앙일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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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언론이 다룬 실질적 의제(real agenda) 중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2002년 <중앙일보>가 신년기획으로 다룬 우리 시대의 과제와 대안, 즉 '업-그레이드 코리아'였다. <중앙일보>는 2002년 대선을 맞아 회사 차원의 어젠다 위원회를 구성해 기획을 꾸렸다. 정치 분야의 경우 '제왕적 대통령에서 CEO 대통령으로', 경제 분야에선 '서해안 개발에 살길 있다', 행정 분야에선 '고시제도 확 바꾸자' 등 인권, 사회안전망, 여성, 교육 등 7개 분야에 걸쳐 한국 사회를 향한 실질적 의제를 설정했다.

특히 당시에 여야 모두로부터 관심을 끌었던 의제는 '남북관계 분야의 예산 1%를 통일비용으로 쓰자'였다. 당시 보수 성향의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의 논조가 "통일방안은 오직 흡수통일과 적화통일 둘 중 하나만 있을 뿐"이라는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음을 고려한다면, 매우 대담하고 신선한 제안이었다. 특히 그동안 수백억 원 규모에 머물던 산발적 대북지원을 넘어 연간 1조 원 수준의 국가 예산을 계획적으로 북한에 투자하자는 제안은 적지 않은 공감을 샀다.

최근에 언론이 심층적으로 다뤄 가장 반향이 컸던 의제는 경향신문(2019.11.21.)의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1면 기사였다. 지면의 하단 광고를 통째로 들어내고 20개월 동안 온갖 산업재해로 사망한 1200명 노동자의 이름을 지면에 가득 채웠다. 울림은 크고 깊었다.
 
 2019년 11월 21일 치 '경향신문' 1면.
 2019년 11월 21일 치 "경향신문" 1면.
ⓒ 경향신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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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의 표현에 의하자면, "11월 21일자 경향신문 1면에서는 퍽, 퍽, 퍽 소리가 들린다. (중략) 이 소리는 추락, 매몰, 압착, 붕괴, 충돌로 노동자의 몸이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다." 이어서 그는 피 맺힌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대통령님, 총리님, 장관님, 국회의장님, 대법원장님, 검찰총장님의 소맷자락을 잡고 운다. 나는 재벌 회장님, 전무님, 상무님, 추기경님, 종정님, 진보논객님, 보수논객님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운다. 땅을 치며 울고, 뒹굴면서 운다. 아이고 아이고. - <경향신문> 2019.11.25.

비록 늦었지만, 삶의 현장을 다루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언론의 역할 덕분에 다행히도 21대 국회에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246 대 4013
 
 김훈 작가가 7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앞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출범 3주년 및 이천 참사 즈음 안전한 나라를 위한 제안 - 재난, 산재 피해가족 및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김훈 작가가 지난 5월 7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앞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출범 3주년 및 이천 참사 즈음 안전한 나라를 위한 제안 - 재난, 산재 피해가족 및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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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가 김훈은 한국 사회에 대해 "이것은 킬링필드다. 제도화된 약육강식이 아니라면, 이렇게 단순하고 원시적이며 동일한 유형의 사고에 의한 떼죽음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고 방치되고 외면될 수는 없다"고 통탄하면서 '생명안전시민넷'의 공동대표를 맡아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난 1년 동안(2019.10.19.~2020.10.19.) 작가 김훈이 주요 종이신문에 인용된 횟수는 대략 246회에 불과했다. 반면 같은 기간 평론가 진중권 전 교수의 인용횟수는 대략 4013회에 달했다(한국언론재단 '빅카인즈', 2020.10.19. 검색, 대상매체 : (경향, 국민, 내일, 동아, 문화, 서울, 세계,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내 관심은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권력에 대한 언론의 비판과 감시가 덜 중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246대 4013이라는 수치는, 한국 언론의 관심사가 얼마나 한 쪽으로 편향됐는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누군가 필요하다고 생각만 하면 이미 아이디어 상품으로 출시되는 5G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와 음악, 예능과 스포츠 방면의 수준 역시 이미 세계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등 언론'이라는 오만과 편견이 아니라 4년 연속 세계에서 꼴찌인 언론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일일 것이다.

그 출발점은, 인터넷에서 직업 평론가의 입을 빌리는 데 있지 않다. 기자들이 직접 삶의 현장 속의 시민들에게 다가가 공정한 보도와 정확한 기사를 일궈내는 일이다. 사실 아주 상식적인 일이다.
 
연사로 나선 진중권 전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온국민공부방 제1강 '우리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강연하고 있다.
▲ 연사로 나선 진중권 전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사진은 지난 6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온국민공부방 제1강 "우리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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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칼럼을 쓴 정상호씨는 서원대 사회교육과 교수로 현재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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