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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의 한국사> 145쪽에 실린 '추미애가...' 시 내용. 저자는 <김립시집>에서 전해지는 시라고 쓰고 인용하였으나, 실제 출처까지 확인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꾸밈의 한국사> 145쪽에 실린 "추미애가..." 시 내용. 저자는 <김립시집>에서 전해지는 시라고 쓰고 인용하였으나, 실제 출처까지 확인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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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0월 1일 낮 12시 9분]
 
추미애가정신병(秋美哀歌靜晨竝)
아무래도미친연(雅舞來到迷親然)
개발소발개쌍연(凱發小發皆雙然)
애비애미죽일연(愛悲哀美竹一然)

가을날 곱고 애잔한 노래가 황혼에 고요히 퍼지니
우아한 안개는 홀연히 드리운다
기세 좋은 것이나 소박한 것이나 모두가 자연이라
사랑은 슬프며 애잔함은 아름다우니 모두 하나로 연연하다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이 지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이 한시는 사실상 누군가의 위작(僞作)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한시가 게재됐던 도서는 절판될 예정이다. 출판사는 해당 도서의 잔여수량을 모두 회수하고 폐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최근 추미애 법무부장관을 조롱·비난하는 용도로 출처 불명의 한시가 소셜미디어 및 카카오톡을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구체적인 소개 문구는 약간씩 차이를 보였으나, 이 한시를 소개한 사람들은 지은이를 김삿갓으로 특정하며 <김립시집>에 실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김삿갓이 시대를 뛰어넘어 추미애 장관을 비난하기 위해 이 시를 지은 것 아니겠느냐'는 의도다. 한시의 첫 문구를 검색해보면 '일간베스트 저장소'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특정 정치 성향의 카페·블로그 등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실제 김삿갓의 작품 중에는 이 한시가 포함되지 않았다.

실제 김삿갓 시집에는 '추미애가...' 실려 있지 않아

2020년 9월 현재 <김립시집>이라는 제목의 책은 없다. '김립'(金笠)은 '김삿갓'의 한자 표기다. 김삿갓은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을 따로 엮어서 출판하지 않았다. <김립시집>이라는 이름의 책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이응수씨가 수집해 발간했다. 현재는 이를 바탕으로 여러 버전의 김삿갓 시집이 출판됐다. 가장 최근에 출판된 건 이명우씨가 엮은 <방랑시인 김삿갓 시집> 개정증보판이다. 2017년 10월에 나왔으며 올해 초 2쇄에 들어갔다.

엮은이는 오랫동안 김삿갓을 연구해온 이로 <김립시집>은 물론 수집‧발굴된 시들을 포함해 총 288수를 <방랑시인 김삿갓 시집>에 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책 내 288수 중 '추미애가정신병'으로 시작하는 한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해당 시집에서만 누락된 건 아닐까? 그러나 인터넷에 떠도는 한시는 다른 출판사의 김삿갓 시집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세워진 김삿갓 기념 조형물.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에 세워진 김삿갓 기념 조형물.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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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시집>의 출판사인 집문당 관계자는 29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편집 과정에서 4수가량이 빠졌으나, 이는 출처 불명이거나 연구 결과 위작이라서 빠진 것"이라며 "빠진 시 중에서도 '추미애'로 시작하는 시는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시집 출판 작업에 동참했던 이 관계자는 인터넷에 떠도는 시를 두고 "처음 듣는다"라며 "<방랑시인 김삿갓 시집>은 과거 김삿갓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들과 2000년대 들어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발굴된 시들까지 망라한 총집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시집에 없는 시인데 김삿갓 시인의 작품이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며 '추미애'로 시작하는 한시는 김삿갓의 작품이 아닐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인터넷 떠도는 것 보고 썼다더라... 시 실린 도서 전량 회수 및 폐기할 것"

그런데 왜 출처 불명의 시 '추미애가...'가 '김삿갓의 시'로 널리 알려진 걸까? 일부 누리꾼은 이 시가 김삿갓의 작품이라는 증거로 다른 책을 지목한다. 2018년 1월에 나온 책 <꾸밈의 한국사>다. 이 책 145쪽을 보면, "김병연은 김삿갓으로도 불리며, 후세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모아 엮은 <김립시집>이 전한다"라며 "김병연의 시를 소개한다"는 설명과 함께 '추미애'로 시작하는 시를 실어놨다. "한문을 읽으면 조금 이상할지 모르나 해석을 하면 여간 마음에 와 닿는 시가 아니다"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다른 <김립시집>을 통해 이 시의 존재를 확인한 것일까?

<오마이뉴스>가 출판사에 문의한 결과 이 책의 저자 역시 '추미애'로 시작하는 시의 실체를 확인한 건 아니었다. 출판사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작가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확인하고 쓴 것이라고 하더라"라며 "출판사 입장에서 너무 부끄럽게 됐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시가 회자된 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추미애 장관이 정치 이슈 전면에 등장할 때, 추 장관을 비판하는 성향의 누리꾼들이 이 시를 수시로 끄집어냈다. 하지만 다음, 네이버, 구글 등을 통해 검색했을 때 최소 2000년대 이전엔 이 시가 실린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20년 가까이 온라인 공간에서 떠돌던 시이다 보니, 최초 작성자가 누구인지 역시 추적이 어렵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당시 탄핵 찬성파였던 추미애 장관을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할 뿐이다.

참여정부 이전에 이 시가 창작된 정황도 있다. 일부 누리꾼의 제보에 따르면, 해당 시의 최초 등장시기로 2001년 7월이 지목된다. 2001년 7월은 추미애 장관의 '취중 폭언' 파문이 일던 때였다(관련 기사: 그날 추미애 의원에게 일어난 일들 http://omn.kr/2n7o). 원글은 삭제되어 찾을 수 없지만, 실제로 일부 인터넷 카페에 2001년 7월께 해당 시를 공유한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김삿갓의 시'라는 소개는 없었다. 시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꾸밈의 한국사>의 출판사 측은 "역사책은 인용이 아주 중요하고, 출판사로서 (시의 진위 여부를) 당연히 확인했어야 했는데 저희의 불찰로 여러 분들에게 폐를 끼쳤다"라며 "의도를 가지고 실은 시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일부 사람들에게 인용되는 바람에 독자들과 추미애 장관 등에게 대단히 죄송하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출판사는 "온라인 및 일반 서점에서 회수 조치할 것이며, 절판 처리 후 전량 폐기하려고 한다"라며 "출판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다"라고 덧붙였다.

태그:#추미애, #추미애가,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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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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