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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이전 기사] 퇴사하고 마주한 코로나, 공황발작이 찾아왔다 http://omn.kr/1nuuu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로 격상하면서 다시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코로나 2차 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프랜차이즈 카페 좌석 이용 금지, 일반 음식점 21시 이후 포장 배달만 허용, 헬스장, 실내 체육시설, 독서실, 학원 집합 금지. 코로나 1차 파동 때보다 더 엄격하고 강화된 규제사항을 알리는 알람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울렸다. 

그 무렵 퇴사한 지 7개월째로 접어들었던 나는 집 안의 장식처럼 머물러 있었는데, 슬슬 부모님의 걱정을 사기 시작했다. "어휴, 경기도 어려워 죽겠는데. 퇴사는 왜 해서." 엄마는 오며 가며 한숨 쉬듯 내 등짝에다가 푸념처럼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꼼짝없이 집에만 있는 내 모습이 거슬린다는 엄마와, 말없이 고개만 숙이는 내 모습이 그즈음 우리 집의 흔한 풍경이었다.

집에 있으면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코로나 방역에 비상이 걸리기 전에는 부모님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한시도 집에 있지 않았다. 눈만 마주치면 나랑 관련도 없는 직종의 공부를 시작하라고 들들 볶았고, 내가 아무리 싫다고 대답해도 그 일은 지치지도 않고 반복됐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혐오의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여자애가 집에서 놀고 있는 거 부끄러운 줄 알아."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을 리 없었다. 자는 것, 먹는 것, 쉬는 것,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가 눈치 보여서 집 밖으로 나가서 지냈다. 나에게 카페라는 장소는 나만의 방이자, 작업실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써야 할 글을 쓰고 읽고 공부를 하면서 나에게 맞춰 필요한 일을 했다. 온종일 마스크를 쓰는 것이 불편하고 코로나가 불안했어도,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집 밖으로 나와야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기 전 이야기였다. 나는 진짜 물리적인 집으로 들어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방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잔소리가 난무하고 한순간도 편하게 쉴 수 없는 집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당장 1시간 뒤에 무엇을 해야 할지,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조차 세울 수 없었다. 

확진자가 늘었다는 문자는 자꾸 오고, 2.5단계를 유지하는 기간은 연장됐고, 비마저 멈추지 않고 내렸다. 습하고 어두침침한 폭우 속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으면, 어마어마하게 큰 슬라임이 내 온몸을 뒤덮은 것 같았다. 어떤 끈적한 것에 꼼짝없이 갇힌 기분이었다. 외출은 평소처럼 일주일에 한 번 신경정신과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공포 그 자체가 되어버려서 병원도 겨우겨우 다녀왔다. 모든 생생함을 잊어버리고 엄청난 무력감에 빠졌다. 그 무엇이든 시작조차 할 수 없을 때, 신경정신과에서 받아온 무기력약을 먹을 수도 있었는데 왜인지 그때는 그 약조차 먹을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 이런 내가 너무 싫다고 자책하면서도 가만히 있으면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렇게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만 잤다.

그때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 모든 상태를 말로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 즉 상담이었다. 코로나 파동이 있기 전부터 8개월 이상 꾸준히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이번 코로나 악화로 인하여 모든 상담이 비대면으로 전환 되었다. 집에서 상담을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것은 내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밀한 이야기를 부모님이 듣는 데서 한다고 상상한다면 얼마나 끔찍한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언제 대면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상담을 연기해둔 상태였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내 이야기를 할 수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다는 고립감이 굉장히 심했다. 잠만 자는 것도, 무기력해지는 것도, 우울한 마음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는 것 말고 아무것도 마음의 위로가 되지 않자 먹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먹으면 즉각적으로 기분이 나아졌고 그 감각에 중독되었다. 매 세끼를 어떻게 먹을지, 아니 얼마큼 과하게 먹을지를 궁리했다. 일과는 그날그날 해먹을 갖가지 식자재와 과자,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집으로 배달시키는 거였고, 그것마저 귀찮은 날엔 치킨, 떡볶이, 햄버거 같은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밥을 거하게 먹고 디저트까지 알뜰하게 챙겨 먹은 후에는 곧바로 누웠다. 소화되지 않은 위는 자주 탈이 났다. 운동량이 없으니 살만 쪘다. 

먹고 자고, 먹고 자는 내 모습이 혐오스러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ZOOM으로 하는 요가 수업을 신청해서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온라인으로 하는 운동은 너무나도 손쉽게 빠질 수 있었고 곧 실패로 돌아갔다. 총체적으로 엉망이었다. 백수라는 위치가 주는 불안감에 짓눌려 있는 상태, 코로나가 송두리째 뺏어간 일상. 무엇보다 매번 이렇게 외부사항의 변수에 맞춰 흔들리는 나 자신이 너무 무가치한 인간 같았다.

불안함에 바짝바짝 말라가는 나날
 
집에서 코로나 우울 백신 개발 중 보건복지부가 새로운 질병분류코드를 적용하기 위해 ‘코로나 블루’에서 '코로나 우울'로 용어를 바꿨다.
ⓒ pixabay
 
모두가 출근하고 아무도 없는 집을 지키던 나는, 먹고 자고 굴러다니기만 하는 것 말고도 온갖 집안일을 떠맡아야 했다. 그중 하나가 고추 말리기였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며칠 만에 말랐을 고추가, 몇 날 며칠이고 내리는 비 때문에 쉽게 마르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갑자기 비가 오면 옥상에 널어져 있는 고추를 걷고, 비가 그치면 고추를 다시 옥상에 널어놓는 일이었다. 

만약 비가 계속해서 그칠 생각을 않고 내리면 임시방편으로 전기장판 위에 고추를 널어놓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경쇠약에 걸려 죽을 것 같았다. 이유는 불이 날 것 같다는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머리가 아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마음의 문제는 늘 어려운 법이니까.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을 겪은 뒤로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래서일까. 종일 빛을 반짝거리면서 켜져 있는 전기장판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기장판이 켜져 있는 날이면 잠도 자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온갖 소리와 냄새에도 예민해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뭐가 터지는 소린가? 타는 냄새인가?' 나쁜 생각은 눈덩이같이 커져서 어떤 날은 '그래 내가 오늘 죽는 날이다'라고 마음을 먹어야 겨우 잘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엄마한테 말해봤지만 유별나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 내 불안에 협조할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전기장판이 꺼지면 습한 날씨에 고추가 썩으니 그것도 문제긴 문제였다. 결국 나는 온종일 전기장판 옆에 붙어 지내기로 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장판에 딱 붙어서. 고추를 말리다가 나까지 말라 죽겠다는 심정으로 그 곁을 지켰다. 이 불안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한테 만큼은 위협적인 일이지만, 남들에겐 너무 유치하고 별거 아닌 것 같아서. 눅눅한 장판 위에서 내 마음만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고추말리기는 끝이 났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초췌하고 피폐해진 나날이 지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2단계로 내려가면서 3주 만에 상담하러 갔다. 전기장판 옆에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먹고 자기만 하는 내가 얼마나 무가치했는지를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전기장판 옆에서 불안해하는 내 모습이 마음의 작용과 참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불안함'이라는 감정에 모션이 있다면 딱 그런 모습일 것 같다면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눈빛은 초조하고, 오감에 날을 세우는 모습. 즉 백수라서, 살이 쪄서, 코로나 때문에, 전기장판 때문에 불안했던 나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저런 모습이나 다름없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전기장판 옆에 누워서 부풀린 생각은 또 어떤가. 멀쩡한 집에 불이 날 것만 같고, 코로나에 걸릴 것만 같고, 내 이웃을 혐오하게 되고, 이 백수 생활이 영원할 것만 같다는 절망에 빠져 지냈으니. 불안은 나도 모르는 새 덩치가 어마어마해져서 또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한 마디로 코로나가 건설해 놓은 세계.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말하기 창피한 모습인 줄만 알았는데 어쩌면 모두 이런 불안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과 같은 시국이라면 더욱더. 툭하면 모든 게 부서질 듯 예민해지는 나날이기도 하니까. 그제야 지난 2주간의 내 행동이 이해됐다. 나는 그저 불안했을 뿐이었다. 누구나 도처에 널려 있는 이 불안에 적응할 때까지 우여곡절이 있는 법이니까.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낮아졌지만 아직도 불안하기만 하다. 카페에 가면 좌석을 이용할 순 있어도 명부 작성, 열 체크, 좌석 띄워 앉기를 실행하고 있다. 내 앞날은 어떻게 될까. 엄마의 눈길을 피해서 다시 집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아닐 텐데. 얼어붙은 취업 시장은 좀 활기를 띨까. 그렇게만 되면 엄마는 내 등짝에 대고 더 이상 한숨을 쉬지 않게 될까. 

여전히 내 머릿속의 회로는 어딘가에도 소속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강렬하게 반응한다. 그다음엔 똑같은 수순이다. 불안이 눈덩이처럼 커지겠지. 결국 깨닫는다. 불안은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게 불안의 속성이니까. 오히려 그럴 땐 자는 것, 움직이는 것, 먹는 것 같은 작지만 중요한 부분부터 공을 들여 수리하자고 다짐한다. 

코로나 개인 수칙부터 잘 지켜서 집에서만 생활하는 나날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말이다. 이렇게 막막하고 불안한 나날을 살아낼 방법은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다. 작고 사소한 곳에 힌트가 있다. 그사이에 고추 말리는 일이 끝이 났다. 나의 불안의 일부가 사라질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거기서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불안을 더하고 빼면서 다시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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