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막연하게 '쉰이 넘으면 은퇴를 해야지' 생각했었다. 학원 강사로 일한 지도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강사 말고 내가 무엇으로 또 다른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이삼 년 사이의 일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덜 무섭고 말도 통하는 쌤이다. 물론 '꼰대' 티를 안 내려고 무진 노력한 덕분이다. 그런데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때가 오면, 그땐 나도 아이들과 아름답게 이별하려고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은퇴의 첫 번째 조건이다.
 
그런 날이 오면, 나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작은 마을에 아담한 집을 짓고 싶다. 그리고 거기서 예쁜 책방을 여는 것이 꿈이다. 일흔이 넘으면 책방 한구석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종종 땋은 인디언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추리소설을 읽고 싶다. 그 옆에는 나를 닮은, 늙은 고양이도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다.
 
나뿐만 아니라 분명 우리 모두 언젠가는 지금 하던 일을 내려놓고 삶의 마지막 트랙을 뛸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축제'라 생각하며 그 안에서 매일매일 소박한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으로 나이 들기 위해선, 지금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한 걸까?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70'이란 나이에도 불구하도 보란듯이 인턴으로 재취업하는데 성공한 벤이 '신사의 품격이란 바로 이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보여주는 코미디영화 '인턴'이다.

 70세 할아버지의 인턴 취업기
 
 영화 <인턴> 스틸컷.

영화 <인턴> 스틸컷. ⓒ 배급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인턴'은 <로맨틱 홀리데이>와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로 우리에게 친숙한 낸시 마이어스가 메가폰을 잡고 제작과 각본까지 함께 맡은 2015년 개봉작이다.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국내에서도 팬층이 두텁기로 소문난 앤 해서웨이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고, 탄탄한 각본과 연출,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까지 삼박자가 고루 맞아떨어지며 300만 명이 넘는 관객몰이에 성공했다.(국내 기준)
 
줄스는(앤 해서웨이 분) 이제 고작 서른 살일 뿐이지만 인터넷 의류 업체 'About the fit'을 창업 1년 만에 직원 220명의 번듯한 기업으로 키워 놓은 성공한 여성 CEO다. 또 벤은(로버트 드니로 분) 아내와 사별한 이후 무료한 일상의 반복에 지쳐있는 일흔 살의 노인이다.
 
벤이 은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정책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 초반, 이력서를 동영상으로 찍기 위해 긴장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은 벤의 대사는 무척 인상적이다.

"뮤지션은 은퇴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더는 음악이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한대요. 내 마음속엔 아직도 음악이 있어요. 확실해요."

새 출발을 준비하며 들떠있는 벤과 달리 줄스는 애초에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 자체가 못마땅하다. 줄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까지나 '신속함'이었고, '빠릿빠릿'하지 못한 일흔 살의 노인을 자신의 회사 직원으로 고용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줄스는 의무 고용 기간인 6주간만 참아 볼 속셈으로 벤을 자신의 개인 비서로 받아들인다.
 
벤은 줄스로부터 업무 지시가 담긴 이메일이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지만, 줄스는 벤이 제풀에 지쳐 회사를 나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부러 벤에게 아무 일도 맡기지 않는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 벤. 벤은 특유의 친화력과 연륜에서 오는 여유로움으로 회사의 다른 젊은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줄스도 그런 벤에게 슬슬 호기심이 동한다. 그리고 벤을 향한 줄스의 호기심은 차츰 인간적인 호감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사실 성공한 여성 사업가의 이면에 가려진 줄스의 사생활은 알고 보면 위태롭기 짝이 없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늘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부족한 줄스는 일에 치여 사느라 하나뿐인 딸아이와도 제대로 놀아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전업주부인 동네 엄마들에게는 은근히 따돌림을 받는 신세다. 게다가 남편은 외도를 하고 있다.
 
벤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는 줄스. 벤은 그의 보스를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고, 줄스는 마침내 벤의 품에서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영화의 막바지에 줄스가 벤에게 던지는 담담한 한마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당신은 내 인턴이자 가장 친한 친구예요."

'어른다운 어른'으로 늙는 것에 대하여
 
 영화 <인턴> 스틸컷.

영화 <인턴> 스틸컷. ⓒ 배급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속에 벤은 일흔이라는 나이를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경험은 늙지 않는 것이라 확신하며,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도록 곱게 접은 손수건을 늘 가슴 속에 품고 다닌다. 이 마성의 노신사에겐 심쿵 포인트가 한둘이 아니다. 보고 있으면 절로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저렇게 늙어가야지!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아는 '어른다운 어른'으로 늙어 가는 것, 그것이 이제 내 노년의 새로운 '로망'이다.
 
'인턴'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미디 영화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메시지 만큼은 제법 묵직하고 신랄하다.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일흔 살의 벤, 일과 가정 사이 완벽한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는 서른 살의 줄스, 두 사람의 상처는 이 시대 우리의 고민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어느 세대고 할 것 없이, 모두가 힘든 시기다. 누구나 마음의 여유를 잃으면 제일 먼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인색해지기 마련이다. 요즘 들어 별것도 아닌 일로 가장 가까운 사람과 다투고 상처 주는 일이 늘고 있다면 함께 이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 벤과 줄스가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를 이해하며 끌어안는 과정에 화해의 답을 담겨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나처럼 은퇴 이후의 삶이 고민스러운, 청년과 노년 사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당신이라면 '겸허하게, 그러나 용감하게 나이 드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따뜻하게 웃긴 이 영화 '인턴'이 딱이다.
코로나 블루 웃음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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