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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공인 '똥손'인 나는 단연 소문난 '기계치'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운전면허를 땄을 때, 아버지는 기적이라도 단언하셨다. "너 면허 따면 내 틀림없이 차 한 대 뽑아주마!" 호언장담했던 건 시치미를 뚝 떼시고 말이다. 그렇다. 아버지마저도 당신의 하나뿐인 딸이 면허를 딸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래서 가족 간에도 계약서는 필요하다.

각설하고, 아버지 말씀대로 '기적'처럼 면허를 따긴 했지만 나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를 필두로 한 모든 가족의 열렬한 반대 때문이다. 네 살 터울의 오빠는 내가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서는 것 자체가 불법이란다. 하긴 면허를 딴지 십 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액셀과 브레이크가 여전히 헷갈리는 나로서는 딱히 할 말은 없다. 결국,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아무 때고 차를 몰고 훌쩍 떠나고 싶다는 나의 로망은 일단 보류 상태다.

나는 사실 종류 불문하고 모든 기계 조작에 서툴다. 컴퓨터나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2G 폰을 썼고, 이력서도 손글씨로 작성했다. 내 친구는 종이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에 풀칠을 하고 있는 나를 가리켜 '응답하라 1988' 덕선이의 실사 버전 같다고 진지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내게 '줌(zoom: 화상 회의 앱)을 활용한 실시간 화상 강의를 준비하세요'라는 미션이 떨어졌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야말로 눈앞이 다 캄캄했다. 코로나 시국에 내게 닥친 최악의 시련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나의 첫 번째 화상 강의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역시 '줌' 활용 강의를 준비하고 있던 친한 언니에게서 몇 시간에 걸쳐 혹독하게 특훈을 받은 결과다.

나는 언니에게 배운 대로 몇 번이나 혼자 사이트에 들어가서 '초대하기' 및 '화면 공유하기', '음 소거', '채팅' 등등의 기술을 익혔다. 하나씩 손에 익을 때마다 출근하지 않고도 재택근무로 강의가 가능한 세상이라니. 이런 신세계가 다 있나 싶어서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강의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인터넷이 뚝 끊기며 먹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황해서 이것저것 눌러 보았더니 '~한 다음에 ~하면 ~될 것이다'라는 요지의 해결 방법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이 무슨 외계어인가? 분명히 한국말인데 도무지 해석이 안 되었다. 결국, 나는 노트북을 껴안고 부랴부랴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맘고생 몸고생에 초췌해진 몰골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위층에 사는 신혼부부를 만났다. 혹시 그 집도 인터넷이 안 되느냐고 물으니 둘이서 사이좋게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아마 며칠 전 밤새 쏟아진 비 때문에 근처 전선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겠느냐고 내게 되묻는데 내가 뭘 아나, 그냥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나와 윗집의 인터넷이 동시에 끊긴 원인은 건물 세입자 중 누군가 불법 공유기를 잘못 설치한 탓이었다. 잘못된 신호를 차단해 두었으니 이제 문제없을 거란 기사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노트북을 켜니 바로 인터넷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문득 제아무리 최첨단을 내세운 21세기라 해도 결국 인터넷이 작동을 멈추면 모든 일상이 올스톱 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카톡도 서툰 일흔의 우리 아버지는 이 시대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이 시름이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다.
 
 'Quick response' 번역하면 '빠른 응답'이다. 갑자기 분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빠르다'는 상대적인 게 아닌가.
  "Quick response" 번역하면 "빠른 응답"이다. 갑자기 분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빠르다"는 상대적인 게 아닌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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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두기 2.5단계가 실행되면서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는 포장판매만 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나는 선물 받은 쿠폰을 쓸 생각으로 집 근처 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찾았다. 그런데 입구에서 직원이 대뜸 QR 코드를 찍어 달란다. 네? 뭐라구요? 내가 당황하자 이제 스무 살이 갓 넘은 듯 보이는 '21세기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게 핸드폰부터 꺼내라고 한다.

"핸드폰을 열고, 일단 카톡에 들어가서요, 그다음엔…" 내가 시키는 것을 바로바로 따라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자 직원은 답답했는지 "핸드폰 좀…" 하고 손을 내민다. 내가 핸드폰을 넘겨주니 직원은 이것저것 거침없이 누른다. 금세 바코드같이 생긴 것이 핸드폰 화면에 뜬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커피 하나 사는데 뭐 이리 복잡해?!' 투덜거렸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직원이 더 생글생글 웃어 보인다.

커피숍을 나서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QR코드의 QR이 대체 무슨 약자인지 궁금해서이다. 'Quick response' 번역하면 '빠른 응답'이다. 갑자기 분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빠르다'는 상대적인 게 아닌가?

커피숍에서 QR코드를 찍고 주문한 것을 찾아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 중에 눈을 씻고 봐도 우리 아버지 연배의 어르신들은 눈에 띄지 않은 탓이다. 나만 하더라도 직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 한참을 더 헤맸을 것이 틀림없다. 에라이, 안 먹고 말지. 포기하고 돌아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요즘엔 영화관을 가도, 패스트푸드 점을 가도 직원이 직접 손님을 응대하는 곳은 드물다. 물론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인터넷을 이용한 무인주문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부모님 세대를 생각하면 씁쓸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인주문기를 쓸 줄 몰라 햄버거 사는 것을 포기하게 되면 나중에는 햄버거 말고 더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바일로 좌석을 예매하는 것이 가능한 젊은 세대들은 기차를 타도 자리에 앉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어르신 세대는 오히려 서서 가게 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디지털 소외'의 단적인 예다.

인터넷 사용에 제약을 받는 사람들이 디지털 시대에서 생활의 격차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디지털 소외'는 비단 노년층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가정에서, 신체적 경제적 이유로 인터넷 사용에 제약을 받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한 시대다. 그러나 아직 '느림'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천천히'의 미덕으로, 그들을 위한 배려의 방법을 고민할 때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20세기 사람, 오늘따라 아날로그 감성이 더 그리운 덕선이 입장에서 문득 드는 생각이다.

태그:#코로나 시대, #디지털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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