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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의좋은 형제 공원' 안내판. 동생 이순의 집이 주차장에 붙어 있고('현 위치' 표시인 빨간 동그라미 뒤) 형 이성만의 집이 사진 한가운데쯤에 있다. 이성만의 집을 지나면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충남 예산 "의좋은 형제 공원" 안내판. 동생 이순의 집이 주차장에 붙어 있고("현 위치" 표시인 빨간 동그라미 뒤) 형 이성만의 집이 사진 한가운데쯤에 있다. 이성만의 집을 지나면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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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3(상중리 274-2)에 '의좋은 형제 공원'이 있다. 공원 이름은 보통 (서울) 효창 공원, (부산) 용두산 공원, (대구) 달성 공원 식이므로, 그에 견줄 때 아주 특이한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일도 없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익히 알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의좋은 형제'의 두 주인공인 형 이성만과 동생 이순의 집이 복원되어 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도 있고,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만들어진 물레방아도 있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1964년부터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국어 2-2〉 교과서에 실렸는데, 교과서의 본문이 새겨진 빗돌 앞에 서면 읽는 재미가 소록소록하다. 빗돌은 보는 사람들을 어린 시절로 고스란히 회귀시키는 추억 환기 '타임 머신'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옛날 어느 시골에 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읍니다(당시 맞춤법 기준, 현재는 '있었습니다.'). 형제는 같은 논에 벼를 심어서, 부지런히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잘 가꾸었읍니다. 벼는 무럭무럭 자라서, 가을이 되자 곧 베어들이게 되었읍니다.

"형님, 벼가 잘 되었지요. 이렇게 여물었어요."

"참 잘 되었다. 인제 곧 베어야 할 거야."

누렇게 익은 논을 바라보며 형제는 기뻐하였읍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형제는 벼를 베기 시작하였읍니다.

"형님은 동쪽에서 베어 오셔요. 저는 서쪽에서 베어갈 테니."

"그래라. 누가 더 많이 베나 내기를 할까?"

형제는 부지런히 벼를 베었읍니다. 뜨거운 해님이 쨍쨍 쬐었읍니다.

 
교과서 본문 중 첫째와 둘째 쪽의 내용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한 한국인은 아마 없지 않을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추수를 마친 형제는 벼를 똑같은 높이의 두 무더기로 나누어 쌓아놓고 귀가한다. 그 후 두 사람은 각각 밤에 몰래 논으로 가서 자신의 벼를 상대의 무더기에 보태놓는다. 형은 동생에게, 동생은 형에게 더 많은 벼를 주고싶은 마음인 것이다.

당연히 두 볏가리는 낮에 보면 높이가 같다. 형제는 어째서 그런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던 중 어느날 캄캄한 밤에 형제는 두 볏가리 사이에서 마주친다. 그제야 형제는 자신의 볏가리 높이가 왜 줄어들지 않았는지 깨닫게 된다. 서로의 우애를 확인한 두 사람은 감격한 나머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린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설화가 아닌 실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의좋은 형제'에 관한 이야기는 그냥 내려오는 전설이 아니라 실화이다. <조선왕조실록> 1420년(세종 2) 1월 21일자에 41명을 표창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맨 앞에 형제의 이름과 칭송받을 만한 행적이 거론되어 있다.
 
대흥 호장(大興戶長) 이성만(李成萬)은 그 아우 순(順)과 더불어 부모를 잘 섬겨 마음을 다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매양 봄 가을에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부모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초대하여 즐거운 잔치를 베풂으로써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형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고, 아우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며, 매양 아침 저녁에 형제가 서로 가고 오고 하며 한 상에서 같이 먹고, 비록 한 개의 음식을 얻어도 반드시 함께 먹었다.
 

실록의 기록은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울 때' 식의 민담과 확실히 다른 실화임을 증언한다. 게다가 1978년에는 두 사람의 효도와 우애를 기린 '효제비'까지 발견되었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실존 인물들의 실제 행동담이라는 사실을 재차 입증한 것이다. 1497년(연산군 3)에 건립된 이 효제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2호로 지정되었다.
   
충남 예산 '의좋은 형제 공원'에 세워져 있던 형 이성만과 동생 이순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충남 예산 "의좋은 형제 공원"에 세워져 있던 형 이성만과 동생 이순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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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역사에 이름을 남긴 형제들을 알아본다

함께 이룬 업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형제들을 알아본다. 인터넷에서 '** 형제'로 검색이 될 만큼 대단한 형과 아우가 대상이다. 독일의 야콥 그림(Jakob Grimm, 1785-1859)과 빌헬름 그림 (Wilhelm Grimm, 1786-1863) 형제부터 살펴본다.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였던 그림 형제는 수십 년 동안 독일의 민간 설화와 동화를 수집, 정리, 발표함으로써 독일 민족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도 빼놓을 수 없다. 라이트 형제는 미국의 비행기 제작자이자 항공계의 개척자로,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6-1920)와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71-1948)는 1903년 역사상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조종하여 하늘을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허훈·허위·허겸 3형제와 이건영·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 6형제가 역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마땅한 형제들이다. 조선 말기 의병장과 국망 이후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이들 중 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1945년까지 생존한 인물은 이시영 혼자뿐이었다. 당시 경북과 서울의 최고 수준 자산가였던 이들 가문은 모든 돈을 국권 회복에 쏟아붓고, 마침내는 대부분 순국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데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현재 시세로 수십 억 원의 포상금을 받은 이근호·이근택(을사오적의 한 사람)·이근상 3형제도 있다. 고대에는 아버지 연개소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남생·남건·남산이 세계 제국 고구려의 멸망에 한몫한 3형제로 유명하다. 전래의 형제 이야기 중에서는 놀부와 흥부가 가장 널리 알려진 형과 아우일 것이다.

좋은 모습으로 닮은 형제가 가장 우애 짙을 듯

1174만 관객을 끌어들인 2004년 2월 5일 개봉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포스터에는 제목 외에 열세 자의 글자만 인쇄되어 있다. 진태·진석 두 형제의 울부짖음, '우린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해'가 전부이다. 이 외침을 이상만·이순 형제는 '우린 반드시 우애롭게 살아야 해'라고 바꿔서 다정하게 말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그림 형제는 '우린 반드시 통일에 기여해야 해'라고 다짐할 것 같고, 라이트 형제는 '우린 반드시 비행기를 띄워야 해'라고 서로 격려할 것 같다. 형제도 각각 독립된 개체이므로 놀부·흥부처럼 서로 판이할 수도 있지만, 이상만·이순처럼 빼어 닮으면 더 좋을 듯하다. 다만 형제 모두가 친일·부패·독재 등 부정적 측면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의 예를 보여주는 경우는 제외하고.  

*이 글을 쓰면서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예산 문화대전>,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했습니다.

태그:#의좋은형제, #놀부 흥부, #라이트 형제, #그림 형제, #이근택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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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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