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 09:56최종 업데이트 20.09.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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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일대의 아파트 단지들의 모습 ⓒ 이희훈


사회에 '존엄의 울타리'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속에 포함되면 어느 정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고 울타리 밖에 있다면 존엄하지 못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은 가상의 울타리 말이다.

만약 그 존엄의 울타리가 이 사회에도 있다면, 이에 포함되는 사람과 포함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울타리는 과연 누가 만들고 관리하는 것일까? 가상의 것이긴 하나 그 존엄의 울타리를 챙겨야 하는 첫 번째 주체가 바로 국가이자 국가를 운영하는 정당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보통'이라는 개념은 그것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무언가를 비교할 때는 도움이 된다. 이 보통의 개념을 활용하여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보통의 삶과 2020년 현재의 보통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지점을 살펴보자. 이 지점은 지금의 울타리가 적절히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점검 지점이 된다.

울타리가 적절히 작동하지 못하면, 다시 말하면 제도와 삶의 간극이 크게 벌어지면 그 간극의 크기와 간극이 유지되는 시간 만큼 시민들은 소외된다. 국가의 제도가 시민의 삶에 이상적인 수준으로 적합하게 유지되긴 어렵더라도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국가는 누군가에게는 큰 혜택을, 누군가에게는 사회가 합의한 시민의 권리조차도 보장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능한 한 서둘러 그 울타리를 현실에 맞게 조정하여야 한다.

나의 부모님 세대가 사회에 진입했을 1980년대와 지금을 비교해보자. 30~40년이란 세월 동안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변화가 있었을 테고 그 변화를 나는 다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중 일부를 더듬어 가듯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가구와 인구의 큰 전환과 불평등의 간극이 줄어들기 보다는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보통'의 삶은 어떻게 변했나
  

한국 가구원수 비율(1980~2020) 1985~2010년 자료 : KOSIS(통계청, 인구총조사), 2020.09.06. 2015~2020년 자료 : KOSIS(통계청, 장래가구추계), 2020.09.06.

 
1, 2인 가구의 일반화, 인구의 감소는 한국 사회의 큰 지각변동이다. 한국사회의 제도는 많은 부분 다인 가구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다. 주택정책에서도 그렇다. 공공임대주택의 배분은 가점제로 이루어진다. 혈연 가구원이 많을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 1980년, 어르신을 모시고 자녀와 함께 사는 가족이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이었고 가족이 많을수록 그들의 삶이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당시에 있었다면 이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금 사회에도 그 기준이 적절한 것일까?

1980년, 단칸방에 네다섯 명이 사는 좁은 주거면적의 문제와 열악한 주거환경이 당시 중심 주거 문제였다면 지금은 그와는 중심 문제의 양상이 달라졌다. 혈연이라 해도 이전처럼 함께 살기가 쉽지 않은 사회이다. 되려 무연고 사망, 관계망이 없는 시민의 복지 사각지대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는다.

주거권 침해를 정량화하기 쉽진 않지만 비슷한 정도로 주거권을 침해받은 혈연 다인 가구와 1인 가구가 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공공자원을 우선 배분할 것인가?

대규모 택지개발이 답은 아니다

혈연 다인 가구 우선이라는 기준이 지금도 적절한지 한 번쯤 논의해 볼 만하다. 주거 영역에 있어 제도의 울타리를 어떻게 칠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인구 변화와 주택 공급에 대해서도 과거부터 이어온 조치가 현재도 적절한지 따져봐야 한다. 1950, 1960년 출생이 많았던 시기이자 최저주거기준에 부합하는 적절한 품질의 주택이 적었던 시기에 대규모 신축 주택 공급은 한국사회의 과제이자 도전이었다. 신도시, 대규모 택지 개발은 열악했던 한국의 주거환경을 빠른 속도로 개선해냈다. 1995년만 해도 전체 국민의 46.6%가 주거빈곤상태(최저주거기준 미달, 지하나 옥탑 거주,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였던 것을 2010년 15년 만에 주거빈곤율 14.8%로 낮춰냈다. 대규모 신규 주택을 공급으로 국민 전체의 삶을 크게 개선했던 것이다.
 

총인구, 인구성장률 출처 : e-나라지표(통계청, 장래인구추계), 2020.09.08.

   

한국고령인구비율(2000~2019) 출처 : KOSIS(통계청, 고령인구비율), 2020.09.06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 방식의 대규모 신축 주택 공급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조치일까? 그때와 달리 현재는 인구는 정점에 다다라 줄어들 예정이고 인구 구성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주택의 수도 1980년대와 지금은 다르다. 교통이 편리한 특정 지역에 신규주택 수요를 제외하면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보긴 어렵다.

인구가 줄어들 것을 고려하면 이전과 같은 대규모 택지개발은 우려스럽다. 1980년대보다 임금 대비 주택가격 격차가 커진 것을 고려한다면 지금은 주택 자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담 가능한 주택이 필요하다. 대규모 주택 공급으로 주거비를 안정화하겠다고는 하나 대규모 주택 공급만으로 주택가격이 저렴하게 유지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주거환경 면에서도 달라졌다. 인구가 고령화됨에 따라 휠체어를 타더라도 이동에 불편함이 적은 주택이 다수 필요하다.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개념이 주택에 도입된 것이 최근임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지어진 주택 중에 엘리베이터가 있고 화장실 문 폭도 넓어서 휠체어를 타고도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주택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월세 수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한 호당 면적을 가능한 좁게 하여 여러 호를 공급하고 엘리베이터를 두지 않는 주택이 유행하듯 지어지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고령 1인 가구가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은 비율적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에서도 다른 선택을 고려할 수 있다. 과거엔 판잣집, 불법 주택 등 리모델링을 통해 재사용하기 어려운 주택이 다수였다면 지금은 리모델링을 통해 재사용 할 수 있는 주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환경 문제를 고려하면 부수고 새로 짓는 것보다 리모델링 비용이 더 든다고 하더라도 리모델링으로 주택을 공급할 수도 있다.

이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주택이 필요하며, 그 주택은 어떻게 공급돼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지고 논의해야 할 때다.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문제해결 방식이 현재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만큼 사회가 많이 변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정당의 역할

분야마다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적합한 대응이 논의되고 있을 것이다. 개별로 그러한 노력이 이뤄지더라도 공통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그 변화의 토대를 만들 정치적 합의를 만드는 일이다.

공공 자원을 배분하는 기준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어떤 시각에서의 합리성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전제로 한다. 그 합의가 있어야 여러 가지 시도들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다. 그 합의를 만드는 것은 정당의 역할이다. 정당이 사회 변화의 토대가 될 시민적 합의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와 관련한 제도를 현실에 맞추어 바꾸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정당은 변화되는 사회에 필요한 합의를 구축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노력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기존의 질서에서 과소대표되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맞는 정치적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집단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곳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모든 당에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정당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만나야 할 유권자 집단으로 3가지 집단을 우선 제시하고 싶다. 1, 2인 가구 정체성을 가진 시민, 비정형 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시민, 세입자 정체성을 가진 시민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과거와 달리 1인 가구가 일반적이며, 비정형 노동이 다수화되고 있다. 소득으로 주택을 구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다수의 사람이 4인 가구로 살고, 이미 정규직이거나 정규직이 될 수 있었으며, 주택이 공급되면 월급으로 주택을 살 수 있었던 시대에는 4인 가구, 정규직, 소유권자라는 기준점이 정책설계를 위한 사회적 표준지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이젠 그 익숙한 '생각'과 '제도'를 다시 돌아볼 때다. 새로운 집단의 이해를 포함하여 새로운 '생각'과 '제도'를 세워야 한다.

앞서 글에서 '1인 가구 집단'이 아니라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시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1인 가구로 지금 살아가고 있음에도 '언젠가 4인 가구가 될 테니깐 4인 가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이라고 자신의 필요를 조정하거나, 세입자로 살고 있음에도 예비소유권자로 스스로를 여기는 일이 흔해서이기 때문이다. 1인 가구, 비정형 노동, 세입자로 살아가는 시민이 현재 삶에서 느끼는 필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지금은 더욱 필요하다. 현재의 처지를 스스로 임시화하고 주변화하는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들 수 있다.

현실을 반영한 이전과 다른 방식의 '존엄의 울타리'를 쳐야 한다.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 필자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모양과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정규직이 아닌데도 안정적 소득과 계획 가능한 노동, 혈연 관계망이 아니면서도 삶의 불안을 나누고 돌보는 공동체, 주택을 소유하지 않고도 주거계획을 세울 수 있는 집에 대하여 말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비정형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1·2인 가구로 지내는 사람들, 빌려 쓰는 수 많은 시민들을 삶을 사회가 외면하게 두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 변화에 맞는 사유와 제도를 찾기 위해 그를 추동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적 합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정치적 공간에서부터 현실을 드러내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합의 가능한 지점을 제안하고 찾아야 한다.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한 인력과 자원을 다룰 기구가 정당별로 설치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 시작이 지금도 그리 이르진 않다.
 

빌려쓰는 사람들 대표 권지웅 ⓒ 권지웅 제공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권지웅님은 빌려쓰는 사람들 대표, 전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이며 청년정치 와글와글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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