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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시래기.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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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가면 시래기를 팩으로 포장해서 판다. 드물게 눈에 띄지만 보이면 선택을 망설이지 않고 장바구니에 담는다. 가져오자마자 두어 시간 푹 끓여 두었다가 다음 날 한번 더 푹 끓여 둔다. 요즘같이 더운 날씨가 아니면 끓인 냄비 채로 밖에 두고 조금씩 꺼내 찌개에 넣거나 볶아 먹어도 상관없다. 

시장에 가면 포장된 것보다는 큰 함지박에 삶은 시래기가 뭉텅이로 들어 있다. 적당히 봉지에 넣어 주면 이천 원이나 삼천 원쯤 받는다. 바짝 마른 것을 삶은 것이어서 집에 와서 한두 시간씩 한 두 번 푹 끓여줘야 먹을 수 있다. 삶는 동안은 퀴퀴한 마른 풀내가 나지만 먹을 수 있게 조리되면 근사한 요리가 된다.

무청을 말린 시래기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웰빙 식품으로 최근 사랑받고 있다. 철분과 칼슘, 식이섬유가 많아 빈혈을 예방하고 콜레스테롤을 낮춰 동맥경화를 예방할 수 있다고도 한다.

시래기는 슬로우 푸드다. 무청을 따로 떼어 가지런히 해서 햇볕에 오랜 시간을 말려야 하고 바짝 마르면 차곡차곡 잘 묶어 보관한다. 그러다 싱싱한 채소가 바닥날 즈음 꺼내서 삶는다. 삶는 것도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부드럽게 먹으려면 두세 번은 뭉근하게 삶아 주어야 조리가 가능하다. 그 후로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밑간을 해서 간이 충분히 배게 한 뒤 끓이거나 볶는다. 슬로우도 이런 슬로우가 없다.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는 것은 무청이 먹는 시래기가 되기까지 이미 절반 이상의 긴 과정을 모두 통과한 것이다. 그렇게 가져와도 집에서 정성을 들여야 비로소 입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이전에 시래기 음식을 대할 때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생각하지 못했고, 급하게 조리해서 먹지도 못하고 양념만 들이고 버린 적이 많았다. 지금처럼 레시피가 일반화되지 않을 때라서 오래 푹 끓여서 먹으면 된다고 하시는 어르신들의 말을 듣고 집에 와서 음식을 하면, 그분들의 기준을 가늠할 수 없기도 했고 마음만 급해서 몇 단계는 건너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다 만 모양새가 되니 그나마 한 수고는 보람이 없어지고 음식 쓰레기만 넘치는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몸에 좋다고 말해도 내게는 해 봤자 소용없는 음식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몇 번의 시도가 이렇게 끝나버리니 다시는 시래기는 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이런 내가 시래기의 맛을 다시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남편이 시래기를 장바구니에 담고 집에 가져와 먹을 만하게 될 때까지 몇 번씩 끓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보고 난 이후부터다. 

처음엔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시장에서 사 온 시래기를 넣고 한 시간 센 불로 푹푹 끓였다. 이미 불어있는 것 같았는데도 물을 한껏 먹은 시래기가 냄비 가득이었다. 이젠 되었거니 생각하고 조금 꺼내 찌개에 넣었는데 질겨서 먹을 수가 없었다. 찌개에 넣은 것은 물론 버려졌다.

다음날 남편은 남은 시래기를 다시 한 시간 이상을 푹 끓였다. 그러고 다시 찌개에 넣으니 이전보다는 부드러워졌지만 아직도 질긴 기운이 남아 있었다. 역시 찌개는 버려졌고, 다시 다음날 얼마 남지 않은 시래기를 또 한 시간 이상 푹 끓였다. 그렇게 끓여 식히고 나니, 시래기는 먹기 딱 좋은 상태로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시래기의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실패의 과정을 거쳐 조금만 남아있는 시래기를 된장 양념으로 조물조물 무치고 볶아서 맛있게 먹었고 이후로 시래기 사는 것을 더는 망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시래기는 된장 양념으로 물을 자작하게 해서 걸죽하게 볶는 것과 찌개에 넣는 것 두 가지 요리법으로만 조리했다.

최근 시래기가 들어간 장칼국수를 먹으며 시래기의 새로운 조리법을 알게 되었다. 칼국수에 된장을 풀고 적당히 삶아 진 시래기를 쫑쫑 썰어 넣은 장칼국수의 맛은 집에서도 시도해볼 만큼 맛이 있었다.

냄새는 토속적인 시골의 향이지만 맛은 고급 요리에 준하는 깊고 진한 맛이었다. 거기에 삭힌 고추를 잘게 다져 양념으로 넣어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삭힌 고추와 시래기, 다른 종류의 쿰쿰한 것들이 만나 잘 어우러진 별미가 되었다.
 
제천역 근처의 시래깃국
▲ 제천 시락국 제천역 근처의 시래깃국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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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예찬하고 시간이 지나 한참을 잊고 있던 시래기의 다른 맛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제천으로의 여행에서였다. '시락국(시래깃국의 경상도 말)'을 파는 곳이 제천역 근처에 있었다. 시래기에 대한 호감도 있었고 아침 식사로 시래깃국이 좋을 것 같다고 출발 전부터 고른 메뉴였다. 

시락국 간판이 걸린 집은 외벽이 한눈에도 오래돼 보였다. 역시나 근대문화유산이란 팻말이 입구에 붙어 있었다. 시락국을 주문했고 따로 달걀말이도 추가했다. 허연 깍두기와 장아찌가 반찬으로 나왔고, 고추 다진 것과 고추씨로 만든 양념이 국에 넣어 먹도록 차려졌다. 따로 주문한 달걀말이가 바로 나왔고 배고프면 먼저 천천히 드시라고 말했지만,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 메인 음식인 시래깃국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반찬 두 개, 양념 두 가지의 단출한 상, 간단한 음식이었지만 만족도는 그동안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높았다. 쿰쿰하면서도 따뜻했고 제멋대로 억셀 것 같은 모양인 데도 입에 감기는 부드러운 질감이었다. 거기에 슴슴한 간까지, 최고의 선택이라고 엄지 척 내세우며 둘은 서로를 향해 말했다.

실내에는 시래기와 관련된 시도 걸려있었다. 김기옥 시인의 <시락국>과 도종환 시인의 <시래기>. '촌스러운 이름으로 뒹구는' 음식이지만 '손끝 아린 정성이 오롯이 녹아 들었'다는 내용 그대로의 음식이었고, 깊고 진한 그 맛에는 '어사화라도 내릴 법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겉잎이지만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고 '까다로운 입맛'도 충족시키는 음식이 정말 맞다고 생각하였다. 하찮게 여겨진 것에 되려 감사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맛이 주는 감동은 덤이었다.
이런 맛이/왜 촌스러운 이름으로 뒹구는지/나는 모르겠다/손끝 아린 정성이 오롯이 녹아들어 탕국이 되고/변신과 변색으로 맛깔나게 얼룩진 장아찌와 나란히 앉아서/까탈스러운 양반들 입맛 돋구는 이 촌놈에게/어사화라도 내릴 법 하건만...(김기옥, <시락국> 중)​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 온 저들을/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도종환, <시래기> 중)

'먹신'이라 불리는 이영자씨는 식당을 가면 늘 사인을 부탁받는다고 했다. 맛있는 집은 '다시 태어나도 온다'거나, '귀신이 되어서도 온다'는 등의 찬사를 아낌없이 사인지에 적지만, 맛이 없는 집은 맛에 대한 평가는 없이 '지나다 들렀다'는 정도로 적는다고 했다. 프로 먹방러의 표현을 따라 시래깃국을 얘기한다면, '꼭 다시 먹으러 오게 될' 음식이 틀림없었다.

​또다시 내 생에 최고의 음식 재료로 등극한 시래기, 그것으로 끓인 시래깃국. 통영 가면 바닷장어로 끓인 시래깃국도 유명하다는데, 이쯤 되면 대한민국 시래기 투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태그:#시래기, #제천 시락국, #시래깃국, #통영 시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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