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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나이만큼 길게 얘기한다. 다양한 분야의 관심을 나이에 딱 맞는 화법으로 말한다. 술을 마시면 얘기가 적당히 늘어진다. 사회의 많은 현상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사회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가끔 분노가 거칠게 표출되어 안 그래도 높은 혈압을 걱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남편이 저녁 식사를 마치는 시간에, 술도 한잔했음에도 짧게 핵심만으로 1분 스피치를 하겠다고 가족을 소집했다. 

남편의 얘기는 '사회적 알람'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사람에게는 다 '자기의 때'가 있다. 그러니 사회적 알람에 너무 스트레스받을 것 없다.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살아라. 나의 시간은 내가 통제하는 것이 맞다. 

말을 부연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가더니 명쾌하게 끝! 이라고도 외쳤다. 시간은 정확히 1분 20초 만에 끝났다. 

잠시 웃음이 있었고 아이들은 곧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우선 정확히 시간을 지킨 것에 대해 박수를 보냈다. 다음으로 그 말의 시의적절함에 대해 박수를 보냈다. 여전히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과 여러 상황을 두루 살피느라 마음앓이 중이었던 내게는, 사회적 알람이라는 말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마음속에 차곡차곡 무겁게 쌓이기만 했던 스트레스가 조금 덜어지는 것 같았다.
 
방송 화면 캡쳐
▲ 김미경 강사의 사회적 알람에 대한 강의 방송 화면 캡쳐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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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알람이란 김미경 강사가 강연을 통해 한 말이다. 10대에는 학교를 다녀야 하고 20대에는 대학을 다녀야 하고 대학 마치면 취업을 해야 하고, 30대에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고, 40대에는 집을 꼭 장만은 해놔야 하고... 등의 통념을 말한다. 

사회적 알람이라는 기준에 따르면 나는 아직도 꽤 많은 알람을 받는다. 매일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영락없이 알람이 울린다.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아? 그럴 나이도 됐잖아."

날마다 나가는 생활비와 식비, 잠깐 트는 에어컨에 민감할 때에도, 또 울린다.

"여태껏 일해서 벌어놓은 것도 있을 텐데, 식비나 에어컨 트는 것에 민감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매일 삼시 세끼를 챙기다 더는 못 하겠다고 비명이 나올 때쯤엔,

"맛있는 거 시켜 먹으면 되지. 먹는 거에 돈 아끼지 말고 그냥 팍팍 시켜 먹어."

아이들의 취업 때문에 내색도 못 하고 노심초사하면, 이렇게 울린다.

"아이들이 알아서 자기 역할 하지 않아? 어느 집 아들은... 다른 집 딸들은... 자식 걱정할 나이는 지났지 않아?" 

밖에 외출할 때도 그렇다.

"잘 갖춰 입을 만큼 옷장에 똑똑한 정장 몇 벌 정도는 갖춰져 있지 않아? 명품 백 그거 종류별로 하나씩, 밍크코트 정도는 다들 입지 않나?"

백화점에 가서 예쁜 것을 보면,

"하나 사. 쓰면서 살아도 돼. 그러려고 그동안 벌었잖아. 왜, 안돼?"

사회적 알람에 의하면, 내 나이 정도의 사람들은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어야 하고, 자녀들은 안정적인 직장에 이어 결혼도 했어야 하고, 모든 생활은 그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쉬고 놀고먹으며 즐기고 사고해도 걱정이 없어야 한다.

내 나이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평균이 정말 그런 것일까. 지금의 사회의 구조가 일반적인 통념대로 움직이고 있을까. 사람들은 모두 생활비 걱정 없이 모두 안정적으로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며 살 수 있는 세상일까. 넘치게 충족하며 사는 것, 그것은 정상일까. 

방송에서는 날마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우울증을 겪고 있고 그러한 증상들은 점점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한다. 나와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는 생계를 걱정하며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직업 전선을 전전한다고 보도된다. 젊은 세대는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여러 곳에서 뛰고 있고, 몇 개의 아르바이트로도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조차 없는 시급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을 잡기 위해 몇 년씩 고시 공부하듯 공부를 하는 캥거루 족의 이야기와, 겨우 몸을 누일 만한 좁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상황임에도 사회적 알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울린다. 행동 하나하나에 무의미한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고 진단받아야 하는 형국이다. 어떤 틀에 나를 넣고 싶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사회라는 무형의 기준은 그렇게 쉽게 알람을 울린다. 살 만큼 살아왔는데, 아직도 나를 구속하는 틀이 사방에서 나를 진단하고 옥죈다.

얘기를 꺼낸 남편은 사회적 알람을 극복한 사람일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 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절대적이라고는 믿지 않지만, 성격유형검사 결과에서도 남편은 남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라고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편과 나는 사회적 알람 때문에 친인척들과의 만남을 지양하는 편이다. 우리 부부를 향한 사회적 알람은 우리 스스로 다 막고 쳐낼 수 있지만, 자식들을 향한 사회적 알람에는 대범하지 못하고 아직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시간이 아이들에게 맞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호흡과는 상관없는 사회적 알람에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모든 것들이 세상의 변화만큼 달라졌다.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재단하고 경고하고 비난까지 하는 사회적 알람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기준을 염두에 두고 스트레스받고 있는 나의 불안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적어도 집만큼은 사회적 알람이 울리지 않는 공간으로 만들어 주자고 생각한다. 

덧붙여 나는 우리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였으면 한다. '사회적 알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잣대로 사람들 구속하는 것이 아닌, 쉽게 이해되고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중에서 인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모든 사람에게 의미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사회적 지위나 역할이 없다면, 개인에게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 삶 사이에서는 명확한 기능적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기능과 지위가 없는 개인에게 사회는 비합리적이고 믿을 수 없으며 형태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뿌리가 없는" 개인, 추방자에게-사회적 역할과 지위의 부재는 한 사람을 동료들이 있는 사회로부터 추방한다- 사회가 없는 것이다. 그는 악마적인 폭력만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반은 인식하지만 반은 무의미하며, 반은 빛 속에 반은 어둠 속에 있고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실제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채로 그의 삶과 생계를 결정한다. 그는 그가 규칙을 알 수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이상한 방에 있는 눈먼 사람과 같다.(피터 드러커, <산업사회의 미래>, 1942)

아주 오래전, 드러커가 말한 대로 개인의 자유는 지킬 수 있는 사회, 선을 크게 늘리기보다 악을 줄이는 일에 중점을 두는 사회,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국가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삶과 생계가 악마적인 폭력에 놓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좋아하는 것일지라도 거대한 집단의 압력에 의해 떠밀리듯 휩쓸려야 하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이 없으면서 폭력적인 사회의 기준에 아이들의 시간이 조정되는 사회는 더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더 절실하게 가져 본다. 

태그:#사회적 알람, #산업사회의 미래, #사회적 지위와 역할 부여, #바람직한 사회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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