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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이 엄수된 지난 7월 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대한민국순국선열 유족회, 독립유공자 유족회, 한국독립동지회 회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고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반대하고 있다.
 고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이 엄수된 지난 7월 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대한민국순국선열 유족회, 독립유공자 유족회, 한국독립동지회 회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고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반대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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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에서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안장식'이 엄수됐다.
 15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2묘역에서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안장식"이 엄수됐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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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중순 언론에서 백선엽 전 대장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일 때 필자는 이른 아침 인터넷으로 한국의 신문을 보다 옆에 있는 스웨덴인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장교로 만주 간도특설대에서 항일 독립투사를 토벌,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하다 해방 후 월남하여 남한의 장교가 되고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해 한국을 구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게 맞는가?"

아내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왜 그런 민족반역자를 해방 후 처단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한 대답이라 꼭 철퇴로 뒤통수를 크게 맞은 기분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스웨덴 여자가 어떻게 한국 역사의 아픈 점을 이렇게 냉철하게 꿰뚫고 있을까? 아내의 말이 맞다. 한국의 현대사는 미군정 시대부터 크게 어긋났다. '반공'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로 친일반역자들을 다시 한국 통치에 기용한 미군정 3년과 정부수립 후에도 이들을 처단하지 못한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를 역임하며 스스로 반민족 친일 행위를 한 박정희 정권으로 점철되는 한국 현대사가 오늘의 국립현충원 안장의 논쟁을 낳은 것이다.

슬픈 역사다.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부정하며 병탄한 일본제국주의를 해방이 되고도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친일 반역자들이 해방 후 다시 정권의 핵심으로 속속 들어왔기 때문은 아닌가? 철저하게 일제를 부정하고 일제 잔재를 청산하여 민족정기의 새로운 역사를 세웠어야 하지 않았는가?

독일과 프랑스를 보라. 이들은 2차 대전 시 서로 적대국이었지만 전쟁 후 오늘까지도 독일 나치전범자들과 나치에 부역한 프랑스 민족반역자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체포하고 처단하지 않는가? 최근 독일 연방 법원은 76년 전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직접 살인을 하거나 살인에 가담하지도 않은, 단지 경비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현 93세의 피고인에게 살인 종범으로 2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독일은 아직도 20건에 가까운 나치 시절 범죄를 조사하고 있다고 한다.

극과 극의 인물 평가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7월 15일 백선엽의 안장식이 있던 날 국립대전현충원 입구 한 편에서는 "백선엽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로 가야 할 반민족행위자"다, 다른 한 편에서는 "누구 덕에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줄 아느냐? 백선엽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외치는, 순수주의와 악마주의의 흑백논리가 강하게 대치했다. 대체로 진보진영에서는 친일반역자로 낙인하고, 보수진영에서는 6.25전쟁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다.

아내가 지적했듯이 청산하지 못한 슬픈 역사와 그로 인한 갈등의 역사가 아직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럼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은 먼저 사실 규명부터 하는 것이다. 백선엽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간도특설대에서의 역할.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의하면 백선엽은 "1943년 4월에 일본 괴뢰 만주국 소위로 임관되어 자무쓰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창설되어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7월 17일자 <노컷뉴스>에 의하면, 백선엽은 198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 게릴라 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서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면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다"라는 변명과 고백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최근 <조선일보>(5월 28일)와의 인터뷰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엔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간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없을 때"라며 "독립군과 전투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했다. 간도특설대 근무 시절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라고 한 것에 대해 "1930년대 간도특설대 초기에 피할 수 없었던 동족 간의 전투와 희생에 대해 같은 조선인으로서의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며 자신의 이전 고백을 부정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한국)인이었다. 일제가 한국인을 동원하여 한국의 항일독립투사들을 토벌한 아주 간악한 부대인 간도특설대에서 백선엽은 1943년 4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장교로 활동한 것이다.

2. 6.25 전쟁의 다부동 전투. 앞선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백선엽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서 8천 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을 한 달 이상 막아냈다"고 한다. 또 당시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으며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장병들을 독려하여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즉, 백선엽의 제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에 맞서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해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남한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백선엽의 이러한 전쟁영웅설에 대하여 <한겨레>(7월 19일)는 정반대의 기사와 논조를 펴고 있다.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6.25 전쟁사를 모르는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은 마치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인민군을 다 막아 대한민국을 구출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했다.

그는 "240km나 되는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즉 8개 사단이 합심하여 방어해낸 것인데 그 중 일부분이었던 백선엽이 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개탄했다. 박경석은 다부동 전투 승리는 미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고, 그것도 "한미연합군 8개 사단을 지휘한 미군 워커 중장의 불퇴전 결의가 승리를 낳았다"고 했다.

그런데 백선엽이 다 한 것처럼 영웅화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백선엽 자신이었다고 박경석은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백선엽은 1960년 예편한 후 30여 년 간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을 자원해 맡으면서 자신을 스스로 영웅화했다는 것이다.

3. 백선엽의 청렴. 성우회 등 보수진영은 전쟁영웅 백선엽이 '평생 군인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겨레> 취재에 의하면, 백선엽은 서울 강남역 앞에 2천억원대의 건물을 가족 명의로 소유했던 자산가이며, 소유권 문제로 수년간 가족 사이의 송사를 거쳐 비로소 2012년 온전히 장남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또 동생 백인엽과 함께 세운 인천 선인학원에서 일어난 부정입학과 편입, 그리고 졸업장 판매 등 사학비리는 동양 최대였다고 한다.

제대로된 백선엽 평가를 위해 할일
 
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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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린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동시에 전쟁영웅, 청렴의 표상이자 동시에 비리의 온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양극으로 대치되는 백선엽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논리로 이해하려거나 일축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매우 복합적인 존재이며 백선엽도 그런 인간 중 한 명이다. 그런 관점에서 복합적인 백선엽을 이해해야 된다. 둘째,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흑백논리다. 복잡다단한 사회적 현상들을 단지 흑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범주(정도)의 논리로 회색론을 펴면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지 않고 덮어버리는 것이다. 끝으로 옛날 얘기를 지금 들춰내서 뭐 하느냐 라는 시간 논리를 펴며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지나치기엔 백선엽은 너무나 중요한 역사의 한 현상이다. 개인적 차원에서야 결점 없는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아름다운 심성 한구석 없는 악마가 어디 있겠느냐?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들의 사실관계부터 명확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다. 간도특설대에 대한 일본과 중국의 사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이 부대에서의 백선엽의 활동에 대한 증언은 없는가? 백선엽이 다부동 전투를 위시하여 6.25 전쟁사를 왜곡했다면 어떻게 왜곡했는지,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등을 사실과 증언에 근거하여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 미국은 왜 친일반역자들을 다시 기용하고 백선엽에 대하여 영웅적인 평가를 하는지 냉철하게 분석하고 한미관계를 재조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재산 축적 과정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국가 차원의 연구기관에서 하지 않으면 역사학자, 정치학자 그리고 기자들이 조사하고 연구하고 파헤쳐내야 하는 문제다. 그래서 아내의 말마따나 왜 처단하지 못했는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일 하나를 잘 하면 잘못한 일까지 용서 받는지 그리고 나아가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보고, 바른 역사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태그:#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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