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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여부에 관한 국민투표, 그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등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결정 사안에 허위조작정보, 가짜뉴스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이 밝혀졌습니다. '탈진실의 시대'의 산물이자 주범인 가짜뉴스에 대한 세계적인 문제 제기가 일어나고 있는데요.

2017년에 발효된 독일의 네트워크집행법에 따르면, 혐오·차별이 담긴 온라인 콘텐츠를 운영자가 삭제·차단토록 하고, 법을 위반한 기업에게 최고 5000만 유로(약 66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선 2018년에 정보조작대처법이 발효돼, 허위 정보를 삭제하지 않은 온라인서비스사업자는 징역 1년에 벌금 7만5000유로(약 1억 원)의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2019년에 가짜뉴스 유포자를 최대 징역 10년에 100만 싱가포르 달러(약 9억 원)로 처벌할 수 있는 반가짜뉴스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러한 법적 제제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과 우려가 있지만, 공감을 얻고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허위사실을 보도한 언론사 및 언론인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두고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언론의 윤리성에 대한 재점검을 하는 이때, 가짜뉴스로 인한 조선시대의 비극적 사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세자 미워한 영조에게 전해진 '가짜뉴스' 
 
 51세 때의 영조를 그린 어진 곧 초상화
 51세 때의 영조를 그린 어진 곧 초상화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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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언을 처형했다. 나경언이란 자는 액정별감(궁궐 내 잡무를 맡은 하급관리) 나상언의 형인데,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을 탕진해 스스로 생계를 꾸리지 못하게 되자, 이에 세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워 형조(현 법무부)에 글을 올려, 환관이 장차 반역할 모의를 한다고 고발하였다... 나경언이 옷의 솔기에서 흉악한 내용의 글을 내놓으며 말하였다. "이 글을 임금께 올리고자 했으나 올릴 길이 없기 때문에 우선 형조에 청원서를 올려 뵐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나경언이 세자의 허물 10여 개를 낱낱이 들었는데 말이 정도에서 매우 벗어났다... 남태제가 말하였다. "나경언은 하찮은 사람으로서 이미 '세자를 모함하였다'는 자백이 나왔으니, 전하께서 온전히 살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대역부도(모반)의 법을 적용하소서." (영조실록 38년 5월 22일)

임금 가까이에서 근무하는 환관이 반란을 모의한다는 고발이 형조, 즉 법무부로 들어옵니다. 사안이 위중한 만큼 영조는 고발인 나경언을 직접 만납니다. 그는 임금을 대면하려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사도세자의 비행을 세세히 적은 글을 내놓습니다. 

그 내용이 실록에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지만, 영조의 마음을 흔든 무언가가 적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경언의 용기를 칭찬하고, 신하들에게는 '내게 왜 이런 사실을 아무도 알리지 않았냐'고 호통을 칩니다.

현재의 총리와 유사한 영의정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됐는지 그 흉측한 문서를 태우자고 합니다. 영조는 그의 요청에 따르지만, 어쩐지 나경언의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평소 보아온 세자의 미덥지 않은 모습을 보면 말이죠. 세자의 돌출행동과 이에 대한 영조의 심기가 담긴 그즈음의 실록 기사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임금이 좌의정 홍봉한에게 말하였다. "어제 서명응의 글을 보았는데... 서울 십리의 땅을 그가 출입하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지만 어찌 천리나 멀리 가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홍봉한이 세자를 찾아가 말하였다. "주상께서 서명응·윤재겸의 글을 가져다 보시고 비로소 저하께서 관서에 다녀오신 것과 동교에 집을 지은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습니다"... 세자가 명하였다. "동교의 초가는 삭지로 (재물을 출연하였고) 환관 박문흥을 위해 지었는데 대간(감찰·비판 기관인 사헌부·사간원)에서 글을 올린 뒤로 곧 헐게 하였다. 관서 행차는 4월 초2일에 길을 떠났다가 22일에 돌아왔으며... 전하의 명 아래 어찌 감히 조금인들 숨기겠는가?" (영조실록 37년 9월 21일)

"네가 왕손의 어미(사도세자의 후궁인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관서에 다녀오고, 북한산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 38년 5월 22일)

세자의 고질병이 날로 심해져, 궁궐에서 잡무를 보는 난폭한 무리들과 더불어 밤낮으로 유희하는 일이 정도를 벗어났고, 주변인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끝이 없으니, 내사(왕실 재정을 관리하는 관청)가 모조리 비어, 시장 상인의 물건을 거두어 올렸다. 궁궐에서 잡무를 보는 자들이 세자의 위세에 기대 상인의 것을 빼앗아서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하였다. 임금이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알고는 상인들에게 각기 빚으로 준 것을 말하도록 명해, 호조(현 기획재정부)·선혜청(세금을 관리하는 관청)·기조(현 국방부)로 하여금 갚아주라 명하였다. (영조실록 38년 5월 24일)


사도세자는 아버지 몰래 종종 외유를 했는데, 심지어 평양 일대까지 이십일 간 유랑을 떠났다가 들킨 전력이 있습니다. 다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 평양행을 두고 영조는 단순 여행이 아니라, 사도세자가 반란을 도모한 것이라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자는 몸집이 크며, 군사학 교재인 '무기신식(武技新式)'을 집필할 만큼 무예가 출중했는데요. 정신질환을 앓아서,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궁을 비롯해 주변인들을 여럿 살해했습니다. 언젠가는 자신마저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위기의식이 영조에게 있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세자가 학습을 멀리하고 천박한 무리들과 어울려 다니며 재물을 헤프게 쓴 나머지, 시장 상인들에게 빚을 져서, 검소함을 중시하는 영조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처럼 영조의 불신이 한껏 높아져 있는 때에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낱낱이 고합니다. '불에 기름 부은 격'이란 말은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겠죠.

사도세자 굶겨 죽인 '임오화변'이 있기까지

다시 나경언을 심문하는 궁궐로 돌아가겠습니다. 나경언이 세자를 모함했다는 자백을 합니다. 세자의 잘못된 행동들을 반역으로 과장해 나라를 시끄럽게 한 죄를 물라는 신하들의 요구가 이어지자, 영조는 머뭇거리다가 나경언을 처형하도록 명합니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미움과 의혹은 깊어집니다. 결국 이 일은 다음 달에 일어난 임오화변(壬午禍變)의 도화선이 됩니다. 임오년 곧 1762년에 일어난 재앙과 같은 사건, 이것이 임오화변의 의미입니다. 영조 가족에게는 그야말로 재앙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쌀통에 가둬 굶겨 죽였으니까요.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안에다 단단히 가두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실성하였다... 정축년(영조 33년)·무인년(영조 34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발작할 때에는 궁궐의 계집종과 환관을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늘 엄한 말씀으로 호되게 꾸짖으니, 세자가 두려워 병이 깊어졌다. 임금이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두 궁 사이가 막히게 되고, 또 환관·기녀와 함께 무절제하게 놀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인사를 모두 그만두니, 임금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다른 후계자가 없으므로 임금이 늘 나라를 위해 근심하였다. 한번 나경언이 고발한 후부터 임금이 세자에서 쫓아내기로 결심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영혼이 된) 정성왕후(영조의 정비)께서 간곡하게 나(영조)에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임금의 명은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아뢴 바를 대략 진술했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생모 이씨로 임금에게 밀고한 자였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사도세자가 사망하였다. 임금이 명을 내렸다.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사랑과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후일 정조)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세자라는) 호를 회복하고, 아울러 시호(사망 후에 붙인 이름)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이전의 잘못을 돌이켜 뉘우친 것을 '사(思)'라 한다... 나이가 어릴 때 죽은 것을 '도(悼)'라 한다. (시법해(諡法解))


본디 좋았다고 할 수 없던 부자 사이는 약 십사 년간의 대리청정이라는 후계자 수업을 거치며 골이 깊어집니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부친의 가혹한 책망은 아들의 정신질환을 중증으로 몰아가고, 발작하면 가까운 이들을 살해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아버지가 두려운 아들은 문안 인사마저 가지 않고, 둘 사이의 소통은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아들이 영 못마땅하지만 대체 가능한 후계자가 없기에 아버지는 그저 두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경언의 고발이 있고, 그날부터 매일 아들은 밤새 찬 바닥에서 벌을 섭니다. 대죄(待罪) 혹은 대명(待命)이라 불리는 이 행위는 이십일 넘게 지속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이런 영조를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 인물들이 실록에 제시됩니다. 바로 사도세자를 아끼던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고인이 된 세자의 법적 모친 정성왕후, 또 한 명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입니다. 영조는 역모가 곧 일어난다며 정성왕후의 영혼이 경고했다고 말합니다. 다소 억지스러운 이 주장은 영빈 이씨가 유언비어를 전하며 힘을 얻습니다.

아버지는 칼을 들이대며 아들에게 자결하라고 명하지만 신하들이 말려 실패합니다. 울고불고 개과천선하겠다는 아들을 평민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곧 쌀통에 가둡니다. 그 여드레 뒤에 아들은 사망합니다. 영조는 죽은 아들을 평민에서 세자로 복귀시키고, 사도라는 시호(諡號)를 내립니다. 시호란 고인의 삶을 평가하여 붙이는 이름입니다. '생각 사(思)'와 '슬퍼할 도(悼)'로 이루어져, '너를 생각하며 슬퍼하노라'라는 영조의 회한이 담긴 바가 아니라, 그저 시호를 붙이는 공식에 따른 '잘못을 뉘우치고 요절한 자'라는 이름이 '사도'인 것입니다.

'가짜뉴스'에 대한 정조식 해법
 
 19세기 경 조선의 통신사 수행화원인 김달황의 호랑이 그림
 19세기 경 조선의 통신사 수행화원인 김달황의 호랑이 그림
ⓒ 부산광역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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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이 태자를 따라 (조나라 서울) 한단에 볼모로 가며 위나라 왕에 말하였다. "지금 한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한다면, 왕께서는 그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믿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면, 왕께서는 그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믿지 않을 것이다." "세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면, 왕께서는 그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과인은 그 말을 믿을 것이다." 방공이 말하였다. "시장에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만, 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가 있는 것이 됩니다. 지금 한단은 위나라에서의 거리가 시장보다 멀리 있습니다. 신을 비방하는 자가 세 사람을 넘으니, 왕께서는 이를 살펴 주십시오." 방공이 한단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왕을 만날 수 없었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 상(內儲說上)')

'세 사람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 삼인성호(三人成虎)의 유래입니다. 한 사람이 전하는 말은 힘이 약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입을 모으면 그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설령 거짓이더라도 반복 노출되면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참말로 받아들여집니다. '설마'가 '혹시'를 거쳐 '역시'가 되는 이것이 유언비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특히 유언비어는 사람들 사이의 벌어진 틈을 파고듭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신에 대한 유언비어가 일어날 것이니 경계해달라는 방공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거리를 적극 이용한 이간질을 위나라 왕은 극복해내지 못합니다.

화완옹주(영조의 딸)는 또한 오랫동안 궁궐에서 거처하며 그의 아들(정후겸)을 위해 갖가지로 흉계를 도왔고, 을미년 겨울에 (정조에게) 대리청정하라는 명이 내린 날에는, 홍인한의 알 필요가 없다는 세 가지 말을 전하여, 기필코 큰 계책(정조 즉위)을 힘껏 저지하려 하였다... "정후겸은 멀리 귀양 보내고 옹주는 이미 궁 밖으로 나갔으므로, 더 이상 논할 것이 없다."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5일)

(사망한) 김상로의 관직과 직위를 거둬들였다... "(영조가)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임오년의 조짐을 길러낸 것이 곧 하나의 김상로일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삼가 머리를 숙여 명을 듣고서 가슴속에 명심했었다." (정조실록 즉위년 3월 30일)

"후궁의 거처 깊은 곳에 난여(임금의 수레)가 행차하게 되면, 문성국이 그의 누이(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와 함께 우리 양궁(사도세자·혜경궁 홍씨)을 헐뜯어 (영조에게) 이간질 하였다." (정조실록 즉위년 5월 13일)


문녀(숙의 문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대신과 삼사(법을 맡은 세 관청)에서 번갈아 상소를 올려 아뢰며 법에 따라 조치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 때문이었다. (정조실록 즉위년 8월 10일)

정조는 즉위한 해에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숙청합니다. 나경언의 거짓 고발이 임오년의 비극을 불러왔다지만, 평소 영조 주변에서 전해진 가짜뉴스가 차곡차곡 쌓인 상황에 작용한 도화선일 뿐입니다. 사도세자의 비행을 전하거나 부풀려 공신력을 손상시키고, 또 사도세자가 영조를 살해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옮긴 그들을 정조는 처단했습니다. 임금의 정치 행위이면서 동시에 불신과 공포를 먹고 자라는 가짜뉴스에 대한 정조식 해법이기도 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짜뉴스는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회적 살인은 물론 물리적 살인까지 포함합니다. 자신의 취향·가치관에 맞는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의 정보 소비자를 양산하는 인터넷 환경에서는 가짜뉴스의 파괴력이 더욱 큽니다. 따라서 단순 오보가 아닌 악의적으로 조작된 정보를 생산·유통하는 개인·언론·조직 등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공공성 회복과 개인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한 시작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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