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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시험 문제만 풀어주다 보면 공부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올해 수능을 앞둔 고3 수업을 담당하다 보니, 아이들 앞에서 기출문제 풀어주는 게 사실상 수업의 전부가 됐다. 알다시피, 단시간에 수능 점수를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풀어보는 것이다.

한국사 영역의 경우 매년 핵심 내용 위주로 출제되다 보니 쉬운 데다 절대평가 방식이어서 아이들에게도 부담이 적다. 반복된 문제 풀이로 일단 출제 유형만 눈에 익으면,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지장이 없다고들 한다. 나올 문제가 빤하다 보니, 교과서를 챙겨 읽는 것조차 소홀하게 된다.

'장재성'이라는 이름이 그런 내게 죽비가 됐다. 명색이 한국사 전공자로서, 그것도 광주에서 23년간 교편을 잡은 교사로서,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의 이름을 만난 건 시내 한복판 금남로 공원 입구에 세워진 '장재성 빵집'이라는 표지석을 보고서다.

'빵집'이 '항일운동'의 거점이라고? 
 
동지들을 규합해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갖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 금남로 공원의 "장재성 빵집" 표지석 동지들을 규합해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갖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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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한 고백이지만, 처음엔 광주의 오래된 빵집이 있던 자리쯤으로 여겼다. 전국에 창업자 이름을 브랜드화한 가게가 좀 많은가. 이름 아래에 덧붙여진 소개 글이 없었다면, 그저 한 번 힐끗 보고 지나쳤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이곳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거점이라니.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수능이나 각종 모의고사에서 일제강점기 단원의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가장 많이 출제되는 단골 내용이다. 90주년이었던 작년을 비롯해 여러 차례 수능에 출제된 바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모의고사에 등장해 아이들의 점수를 올리는 데 보탬을 주고 있다. 식은 죽 먹기라는 이야기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민족운동이었다는 것과,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성립된 신간회가 전국으로 확산시켰다는 점만 기억한다면 쉽게 맞힐 수 있다. 조금 어렵게 출제된다면, 신간회의 세 가지 강령을 연계시키거나 '정우회 선언'을 지문으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익숙한 유형이라 문제 될 건 없다. 참고로, '정우회 선언'이란, 1926년 공산주의 세력이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동 전선을 공식화한 사건으로, 이듬해 신간회가 발족한 계기가 되었다.

삼척동자도 아는 내용이지만, 그것이 우리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고작 광주와 나주를 오가던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조선의 여학생을 희롱한 일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정도를 더 알고 있을 뿐이다. 교과서의 삽화를 유심히 본 경우라면,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기념탑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3.1운동에 버금가는 거족적인 항일운동이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데도 우리의 호기심은 거기서 멈춘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뿐더러, 교과서에서도 더 이상의 언급이 없어 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자세한 내막을 알기 힘들다. 사건은 청사에 빛나지만, 정작 주동자가 누구인지는 감추고 있는 셈이다.

교과서가 아닌, 길거리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핵심 인물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사란 결국 '인물사'이며, 역사를 배운다는 건 과거 선조들의 삶을 통해 교훈을 얻는 일이다. 곧, 당시 사람들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단순한 나열에 불과할 뿐이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광주학생항일운동이 그랬다. 누구나 4.19 하면 김주열을, 5.18 하면 윤상원을, 6월 항쟁하면 이한열의 이름을 반사적으로 떠올리지만,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그 역사적 의의에 견줘 선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학교에서 그저 '수험용 지식'으로만 가르치고 배운 탓이다.

포털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입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력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국권 피탈 직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을 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명실공히 '광주의 청년'이었다.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넘어, 1920년대 이후 지역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친김에 주말을 이용해 그의 자취를 생애 순서대로 더듬어보기로 했다. 잠시의 일본 유학과 도피 생활 등을 제외하곤 거의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는 '광주 토박이'라, 한나절이면 족할 것으로 여겼다. 그가 태어난 곳도, 배운 곳도, 배움을 실천한 곳도, 심지어 옥에 갇혀 죽임을 당한 곳 역시 이곳 광주다.

43년의 생애 대부분을 광주에서 보냈지만, 그의 삶을 떠올릴 만한 흔적은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 그의 행적에 관한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어 위안 삼을 뿐이다. 학창 시절 비밀 결사체를 꾸리고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그의 모교가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문패를 바꿔 단 채 남아 있을 따름이다.
 
4년 전 백일초등학교에서 성진초등학교로 개명했는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성진회'에서 따온 것이다. 백일은 간도특설대로 복무한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으로, 교명의 교체는 광주 지역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움직임의 신호탄이었다. 학교 앞 도로명도 백일로에서 학생독립로로 바뀌었다.
▲ 성진초등학교 담벼락의 역사 안내판 4년 전 백일초등학교에서 성진초등학교로 개명했는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성진회"에서 따온 것이다. 백일은 간도특설대로 복무한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으로, 교명의 교체는 광주 지역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움직임의 신호탄이었다. 학교 앞 도로명도 백일로에서 학생독립로로 바뀌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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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열여덟의 나이에 '성진회(醒進會)'라는 항일 학생 모임을 조직한다. 민족의식과 공산주의 사상을 '깨우치고' 조선의 독립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1926년 조선 민족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항일 의식 고취를 위한 교양 학습 모임으로 출범하였다. 금남로 공원의 '장재성 빵집'은 이를 위한 아지트였던 것이다.

이후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맞서 동맹휴학을 이끄는 한편, 여러 학교에 독서회 설립을 주도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자 신간회와 연계하여 전국적 확산을 도모하기도 했다. 고작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다. 그의 누이동생인 장매성 역시 '소녀회'라는 모임을 꾸려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을 외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4년으로 감형되기는 했지만, 당시 같은 혐의로 구속된 이들 중에 최고형량이었다. 이후에도 그의 항일 투쟁은 이어졌고, 그때마다 투옥과 출소가 반복됐다. 해방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임원으로 일하며 통일 정부 수립 운동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로 나온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근처로, 도심공동화 현상을 겪고 있다. 남동 한복판에 자리한 남동 성당은 5.18 당시 시민대책수습위가 꾸려졌던 곳으로, 5.18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 장재성이 태어난 동네 그가 태어난 곳은 광주군 광주면 금계리로 나온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근처로, 도심공동화 현상을 겪고 있다. 남동 한복판에 자리한 남동 성당은 5.18 당시 시민대책수습위가 꾸려졌던 곳으로, 5.18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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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실한 공산주의자였다. 학창 시절 러시아 혁명의 바람이 전 세계를 휩쓰는 모습을 똑똑히 봤고, 공산주의야말로 민족의 해방을 앞당기는 사상이자 최선의 방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방 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에 매진한 것도, 북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에 참석한 것도 그래서다.

결국 이를 빌미로 다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지만, 미소 냉전이 첨예하던 시기 미군정조차 그의 신념과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1948년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 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6.25가 터져 예비검속이라는 미명 아래 학살됐다. 이후 그가 주도한 항일운동은 역사에 찬연히 남았으나, 그의 이름은 깨끗이 지워졌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선 목숨을 내건 항일 투쟁도 공산주의자라면 인정받을 수 없다.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인 김원봉도, 한글학자 김두봉도, 소설가 홍명희도, 경제학자 백남운도 모두 '빨갱이'일 뿐이다. 그들은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참여해 6.25 남침에 대한 책임이라도 물을 수 있지만, 전쟁 중에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그에겐 가혹한 낙인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후퇴하면서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형무소에 수감된 수많은 사상범을 재판도 없이 즉결 처분했다. 그렇게 학살당한 민간인만 최소 수십만 명을 헤아린다. 그들 중에는 장재성처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지만, 되레 해방된 조국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그의 모교인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기념탑 앞에 장재성의 서거 70주년을 추모하는 꽃이 시든 채 놓여있다. 지난 7월 초 이곳에서 조촐한 추모식이 있었다고 한다.
▲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 그의 모교인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기념탑 앞에 장재성의 서거 70주년을 추모하는 꽃이 시든 채 놓여있다. 지난 7월 초 이곳에서 조촐한 추모식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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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은커녕 '빨갱이'라는 낙인이 아직도 서슬 퍼렇지만, 최근 광주에서 그의 공적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얼마 전 그의 서거 70주년을 추모하는 행사가 모교 교정에 세워진 광주학생항일운동 기념탑 앞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때 헌화한 꽃은 비록 시들었지만, 장재성이라는 이름만은 오롯하게 남았다.

'사람은 사라진' 역사

어느덧 6.25 전쟁 70주년이다. 평화와 통일이 운위되는 마당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공산주의자의 몫이 절반이라는 사실을 이제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들의 공을 치하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부정되는 것도 아니고, 숨기고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질 역사도 아니다.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끈 두 개의 수레바퀴였다. 운동 방식을 두고 갈등이 빚어지고 반목했을지언정 추구하는 목표는 같았다. 민족유일당 운동처럼 서로 협력을 모색하기도 했고, 해방 후 극심한 이념 대립의 와중에서도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 협상을 전개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사건만 남고, 사람은 사라진' 역사가 어디 광주학생항일운동뿐이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낡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민 채,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의 절반을 지우고 외면하는 현실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차라리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빨갱이'가 주도했다고 교과서에 솔직히 기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해방 후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던 곳이다. 이곳에서 6.25를 맞았고, 영문도 모른 채 재판도 없이 학살되었다.
▲ 일제강점기 광주 형무소 터 해방 후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던 곳이다. 이곳에서 6.25를 맞았고, 영문도 모른 채 재판도 없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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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지막을 보낸 광주형무소가 있던 자리엔 지금 '민들레 소극장'이 세워져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홍보부장으로 참여한 박효선 열사가 평생을 바친 곳이다. 그는 연극을 통해 5.18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렸고,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그렇게 빚 갚고자 했다. 윤상원, 박관현 등과 함께 '들불 7열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5.18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장재성을 비롯한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6.25 당시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무대에 올린 연극은 30년 터울인 6.25와 5.18을 넘나들며 불의한 공권력의 민간인 학살을 주제 삼아 그 지평이 넓어졌을 테다. 그도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받기 전까지는 '빨갱이'로 낙인찍힌 처지였다.

장재성이 태어난 동네부터, 그가 다녔던 학교, 동지들을 규합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던 빵집 터와 수감된 형무소 터까지, 모두 둘러보려니 하루해가 짧았다. 빵집 표지석 외에는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일이야말로 지금껏 '수험용 지식'에 불과했던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역사적 생동감을 입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6.25 당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과 국군이 영산강 위에 놓인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공방전이 벌어지기 전, 광주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좌익계 인사 수백 명을 집단 학살한 곳이기도 하다. 다리 건너편이 광주 시내 방향이다.
▲ 6.25 전적지 "구 산동교" 전경 6.25 당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과 국군이 영산강 위에 놓인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공방전이 벌어지기 전, 광주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좌익계 인사 수백 명을 집단 학살한 곳이기도 하다. 다리 건너편이 광주 시내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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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하나. 얼마 전 백선엽이 국립 대전 현충원에 묻힌 날, 몇몇 아이들끼리 그의 공과를 두고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통일은 바라지도 않고, 북한이 일본만큼이나 싫다고 선선히 말하는 아이들이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친일파가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분명한 건, '빨갱이가 친일파보다 나쁘다'는 말의 위력이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점이다. 요즘 아이들은 '빨갱이'도 싫고, 친일파도 싫지만, '빨갱이'와 맞서 싸웠다고 해서 독립군 토벌하던 친일파를 용서할 순 없다고 잘라 말한다. 고래 심줄보다 질긴 생명력을 뽐내온 '빨갱이'라는 말도, '빨갱이'에 기대어 자신의 죄과를 세탁해온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의 뻔뻔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개학하면, '장재성 빵집'으로부터 시작된 오늘 답사를 주제로 계기 수업을 진행할 요량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했던 한 인물에 대한 무미건조한 설명보다,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토론을 이끌어 내는 게 더 효과적일 성싶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청춘을 바치다 6.25 당시 수감된 형무소에서 학살당한 공산주의자와, 일제의 주구가 되어 독립군을 토벌하다 국군에 중용된 뒤 6.25 당시 공을 세운 친일파 중에 누구를 더 기억해야 하는지를.

태그:#광주학생항일운동, #장재성, #성진회, #6.25 전쟁, #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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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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