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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 추모제 참석자들이 '친일파 청산!'을 외치고 있다.
 허형식 장군 추모제 참석자들이 "친일파 청산!"을 외치고 있다.
ⓒ 김종성(구미인터넷뉴스)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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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許亨植) 장군님!

2020년 8월 3일은 허형식 장군이 돌아가신 지 78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전날인 2일, 당신을 기리는 친지 및 고향 후배들이 1915년 소년 허형식이 고향을 떠난 이후 자나깨나 그리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 264번지 당신의 고향 집터 바로 앞,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에서 모여 조촐한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당신의 생가 앞에서 추모제를 연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마치 '동토의 나라'에 봄소식을 전하고자 제비 한 마리가 찾아오는 그런 감동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위해 당신 조카 허창수씨가 대구에서 오셨고, 당신이 무척이나 귀여워했던 큰집 조카 허은의 아들 이항증 전 광복회경북지부장도 서울에서 오셨고, 당신의 생애를 국내에 처음 학술논문으로 알린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명예위원도 우중에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그래도 당신의 기일만은 그대로 넘길 수 없다고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여러분과 고향의 후배 인사들이 당신 고향 집 앞에 조촐한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허형식 장군
 허형식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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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만난 허형식 장군

지금으로부터 꼭 78년 전인 1942년 8월 3일 새벽, 당신은 북만주 헤이룽장 성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계곡에서 위만국(僞滿國, 괴뢰 만주국) 토벌대의 총탄을 벌집처럼 맞고 장렬히 산화하셨습니다. 만주 제일의, 최후의 빨치산 대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목은 일제 주구들에게 잘려 경안현 경찰서 앞마당 장대에 '공비대두목 이희산'(李熙山, 허형식 장군의 이명)이란 현수막과 함께 내걸렸습니다. 당신 부하의 증언에 따르면, 남은 시신은 산짐승의 먹이가 됐고, 다리뼈 하나만 남은 걸로 장사를 올렸답니다.

저는 허 장군님이 태어난 옛 구미면 임은동 고향집과는 조금 떨어진 구미면 원평동장터마을에서 태어난 작가 박도입니다. 허 장군님께서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듯이 저 역시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 제 할아버지는 금오산을 바라보시면서 고려시대 길재, 조선시대 사육신 하위지‧생육신 이맹전, 그밖에도 김숙자‧김종직‧정붕‧박영 등 숱한 지조 높은 선비들의 충절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들려주셨습니다.

아마 허 장군님께서도 어린 시절 집안어른으로부터 그러한 선비들의 행적을 많이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 저는 충절의 고장 선산 구미에 왜 근현대사에서는 그런 걸출한 인물이 없는지 한동안 절망 속에 지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9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이상룡 선생 후손 이항증 선생과 무장 투쟁 독립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의 후손 김중생 선생의 안내로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두루 답사했습니다.

그때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 장군님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동포사학자 서명훈 선생으로부터 허형식 장군의 행적을 소개받는데, 동행한 이항증 선생은 제게 말했습니다.
 
"허형식 열사는 구미 금오산 사람이에요."
"네에?"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동 바로 앞동네인 임은동에서 태어났지요."
"아, 네엣!"

저는 그 말에 온몸에 전류가 흐른 듯 전율했고, 동시에 가슴 뭉클, 황홀했습니다. 그제야 고향 출신의 항일명문 임은 허씨 왕산(旺山) 집안을 알게 됐고, 항일명장을 만났습니다. 그 뒤 동포작가 김우종 선생으로부터 허형식 장군이 부하를 위해 살신성인한 희생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수연 구미지부장이 경과보고 겸 인사를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수연 구미지부장이 경과보고 겸 인사를 하고 있다.
ⓒ 김종성(구미인터넷뉴스)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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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외세의 앞잡이를 거부한 당신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뒤 항일 반만운동을 잠재우고자 1936년부터 '만주국치안숙정계획'을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그들 관동군을 40만 명에서 76만 명으로 대폭 증강시켜 대대적으로 빗질 토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에서는 그 피해를 줄이고자 동북항일연군의 간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을 러시아 국경 너머로 대피케 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허 장군께서는 북만의 전구(戰區)와 그곳 인민들을 지키고자 단 한 번도, 끝내 러시아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또 다른 외세에 영합치 않으려는, 곧 외세의 앞잡이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은 제 힘으로 살지 못하면 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라는 당신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실로 당신을 흠모합니다.

"1942년 8월 3일 새벽, 허 장군님은 진운상 경위원(경호원)과 함께 소부대활동 현지지도 중, 위만국 토벌대와 교전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신은 부하를 살리고 반일회원 비밀문건을 적에게 넘기지 않고자 토벌대의 총탄을 벌집처럼 맞고도 끝내 부하를 살렸습니다."

저는 김우종 선생으로부터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마치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그런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와 함께 제가 허 장군님을 만나기 위해 수륙만리 먼 길을 왔다는 작가로서 어떤 소명의식도 가졌습니다.

저는 다른 고장사람들에게 내 고향 구미가 5.16 군사 쿠데타 후 벚꽃이 만발한 고장으로 잘못 알려진 데 대해 매우 침통하게 지내던 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2000년 여름, 저는 혼자 북만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 헤이룽장성 경안현 청송령 들머리에 있는 허형식 장군의 희생기념비에 '들꽃' 한 묶음을 바쳤습니다(관련기사 : 박도 실록소설 '들꽃', 2014.11.6.~2015.2.14).

귀국한 뒤 현지에서 구한 장군의 사진을 액자에 담아 지금까지도 제 서가에 세워놓고 있습니다. 저는 날마다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허형식 장군님을 주인공으로 한 실록소설을 작품화하려고 여러 번 기필했으나 번번이 탈고치 못한 채 세월만 허송했습니다.

그런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제 나이 일흔을 맞은 2015년 연말부터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면서 독한 마음으로 집필했습니다. 그리하여 2016년 11월에 펴낸 작품이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조선의 무명옷처럼 순결한 허 장군님의 올곧은, 그러면서도 불꽃같은 장렬한 생애를 오롯이 그려 봤습니다. 이 <허형식 장군>이 그동안 '가짜'들에게 지치고 정의에 허기진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으로, 한 모금 생명수로, 이 나라 앞날에 대한 '희망'을 주고 삶의 활력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그새 75년이 지났지만 우리 시민들은 여태까지 줄곧 오만 잡스러움과 가짜들의 추악한 행태로 매우 지치고, 정의와 양심에 허기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일제가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독립군을 토벌했던 간도특설대원마저도 대한민국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반 역사적인 작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 추모사를 마무리하면서 장군님의 사촌누이 허길 여사의 둘째아들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시 '광야'를 다시 읊어봅니다. 저는 이 시에서 노래한 백마 타고 온 '초인'은 바로 이원록의 외당숙 허형식 장군 당신이라고 감히 단정합니다.
  
만주벌판 '광야'
 만주벌판 "광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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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렀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언젠가 이 땅에 거짓 장막이 모두 걷히면, 구미 금오산 기슭에 장군의 동상이 반드시 세워지리라 믿습니다. 저는 그날을 학수고대하면서 장군 영전에 제가 쓴 실록소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을 바칩니다.
 
기자가 젯상에 <허형식 장군> 저서와 함께 헌주하다
 기자가 젯상에 <허형식 장군> 저서와 함께 헌주하다
ⓒ 김종성(구미인터넷뉴스)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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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이시여! 
부디 하늘나라에서 이 나라, 이 겨레의 수호신으로 굽어 살펴 주옵소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땅의 모든 이들의 마음을 모아 술잔을 드리며 고개 숙여 명복을 비옵니다.

2020년 8월 2일
허형식 장군님 옛 집터 앞에서
고향 후배  박도 올림
  
2019년 8월 2일 허형식 기일 현지 답사
 2019년 8월 2일 허형식 기일 현지 답사
ⓒ 민문연구미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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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허형식 장군 78주기 추모제는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주최로 조촐하면서도 엄숙하고 진지하게 치러졌다. 참으로 아쉬웠던 점은 구미시 관계자 한 사람 얼굴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허형식 장군의 옛 집터의 새 건물에는 그 많은 꽃이름 중 하필이면 '벚꽃 하우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 나라요, 개인의 사유재산일지언정 민족정기와 미풍양속을 훼손시키는 이런 작태는 사회 윤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아마도 허형식 장군의 영혼은 귀향한 뒤 울면서 떠나셨으리라. 
 
동북열사기념관에 소장된 허형식 장군의 유품
 동북열사기념관에 소장된 허형식 장군의 유품
ⓒ 민문연구미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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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허형식 , #동북항일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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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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