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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재석, 이효리, 비가 뭉쳐 만든 혼성 그룹 '싹쓰리'가 큰 화제입니다. 덩달아 유두래곤, 린다G, 비룡이라는 세 사람의 '부캐'도 주목받고 있는데요. 이들처럼,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나만의 부캐를 찾아 활동하고 있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MBC 예능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성된 프로젝트 혼성그룹 '싹쓰리(SSAK3. 유두래곤(유재석), 린다G(이효리), 비룡(정지훈))
▲ "싹쓰리" 모두 싹쓸이! MBC 예능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성된 프로젝트 혼성그룹 "싹쓰리(SSAK3. 유두래곤(유재석), 린다G(이효리), 비룡(정지훈))
ⓒ 싹쓰리 위탁 매니지먼트 "놀면 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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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30대를 함께했던 <무한도전>이 끝나고 김태호 PD와 유재석이 다시 뭉친 새 프로그램을 보게 된 건 유재석이 '유산슬'이라는 부캐로 활동하고 나서다.

"유재석이 트로트 가수를? 부캐는 또 뭐야?"

부캐란 말을 모르고 있으면 왠지 시대에 뒤질 것 같은 두려움과 타고난 호기심이 융합되어 부캐의 뜻을 찾아 여기저기를 검색했다.

'온라인 게임에서 원래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캐릭터'. 즉, 부 캐릭터의 줄임말이며, 또 다른 나, 제2의 페르소나쯤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유재석과 이효리, 비가 자신만의 부캐를 가지고 '싹쓰리'로 다시 뭉쳤다.

'어라? 나도 부캐가 있는데?'

그렇다. 나의 본캐는 20년차 회사원 김 차장이지만, 부캐는 며칠 전 두 번째 책 <찌라시 세계사>를 출간한 작가다.

나의 부캐는 연예인의 부캐와는 금전적인 면에서 천문학적인 차이가 있지만, 행복 지수라는 측면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는다. 부캐를 가지게 된 계기는 43살에 좌천이라는 철퇴를 맞았기 때문이고, 그 내용은 '새해 첫날 출근했더니, 내 책상이 사라졌다'에 자세히 실려있다.

지옥 같은 출근을 버티는 힘

나의 본캐는 매일 아침 힘겹게 침대에서 나와 지옥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회사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과도한 업무도 피곤한 인간관계도 아닌 출근 아닐까? 출근 자체도 짜증 나는데 하루 왕복 세 시간을 길바닥에서 보내야 하니 이보다 더 성스러운 순례자의 길이 어디 있을까?  

이 고행을 버티는 원동력은 작가라는 부캐에 있다. 마을버스에서 지하철로 환승하면, 부캐 모드로 전환한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 읽기를 시작으로 지난 밤 작업한 글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글의 아이디어를 메모하며 회사로 향한다.

오전 8시 정각.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고민 끝에 결국 단골 커피집으로 향한다. 커피를 하루 두 잔만 마셔도 소개팅 처음 나온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오 이후에 섭취한 카페인으로 인해 잠을 못 이루는 몹시도 예민한 김 차장이지만, 부캐의 레벨을 높이기 위해서 커피 한 잔은 필수다. 커피를 마신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글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게 업무 시작 전, 9시까지 글을 쓰면서 하루에 문을 연다.

내일 잘려도 크게 놀랍지 않은 쉰 살을 목전에 둔 사무직 직장인의 의식으로는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너무나 버겁다. 퇴사를 당한 선배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달만 월급이 이체되지 않아도 가장 먼저 연락이 오는 곳이 은행이란다. 부자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서민에겐 절대 강자의 모습을 보이는 그곳 말이다.

대출금 걱정을 시작으로 전무한 상태의 노후 대비로 생각이 이어지면, 멀쩡한 가족의 건강이 걱정되고, 온갖 불행이 나에게 닥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밀려온다. 걱정은 걱정 인형에게 맡기면 좋겠지만 김 차장의 예민한 멘탈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 번 걱정이 시작되면 불면의 밤이 시작되고, 수면 시간이 부족하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다. 이런 상태로 출근을 하면 회사에서 실수하고, 퇴근하면 걱정이 이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래서 부캐가 필요하다. 작가라는 부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낙제점이다. 그러나,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나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남들도 다 참고 다닌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조언 속에서 에너지 음료를 마시고 싸구려 셔츠를 걷어붙여도 전혀 힘이 나지 않지만, 내가 작가라는 생각을 하면 없던 힘도 솟아난다. 부캐의 수입이 본캐의 수입을 앞지르는 날까지 잠시 회사에 다니는 것이라고 최면을 걸면 회사 생활이 신나지는 않아도 버틸 만하다.

오전 9시가 되면 김 차장으로 모드 전환을 한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회사 업무에 집중한다. 그리고 점심시간이나 퇴근 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글을 쓴다. 전업 작가가 아닌 이상 이런 식으로 시간 활용을 해야 한다.
 
필자가 부캐 활동으로 낸 책, <찌라시 세계사>
 필자가 부캐 활동으로 낸 책, <찌라시 세계사>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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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하는 일의 기쁨

어떤 이는 '어떻게 회사 일에 글 작업까지 할 수 있냐'고 묻는다. 몸은 당연히 힘들지만, 정신은 오히려 단단해지기 때문에 가능하다. 회사원이라는 본캐는 생존을 위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만, 작가라는 부캐는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다. 부캐로 지내는 시간은 몸은 고되지만 신난다, 행복하다. '어쩔 수 없는 남의 일'인 회사 일에서 얻는 기쁨과,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 오는 기쁨의 크기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퇴근길은 출근길의 반복이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오롯이 부캐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즐기려고 한다. 업무상 스트레스가 쌓였거나 글도 잘 써지지 않는 날은 본캐, 부캐 모두 잠시 멈추고 나에게 휴식을 준다. 퇴근길에 명상하거나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잠시 멈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책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고 있다.

집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부캐의 활동이 이어진다. 식사 후, <한국인의 밥상>이나 <한국 기행> 등을 보며 머리를 식힌다. 그리고, 짧은 시간 극한의 에너지를 태울 수 있는 타바타운동이나 심신에 모두 좋은 요가를 한다. 부캐 없이 김 차장만 존재하던 시절엔 퇴근 후 운동은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연례행사였다. 그러나 작가라는 부캐를 찾은 후로는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오래 하기 위해 운동을 빠트리지 않는다.

운동을 마치고 글쓰기를 하는 동안에는 김 차장이 하던 모든 걱정으로부터 해방이다. 내일 회의 걱정은 회의 10분 전부터 하면 된다.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기분 좋은 피로감에 젖으면 잠도 잘 온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부캐를 찾은 최근 몇 년이 가장 행복하다. 부캐 덕분에 좌천으로 인한 공황장애도 극복했고, 그 무섭다는 월요병도 물리쳤다. 나는 부캐에 심취한 중년이다.

이제는 로또 당첨을 꿈꾸는 대신 부캐의 꿈인 전업 작가가 되는 날을 상상해본다. 아침에 몸에 맞지 않는 커피 대신 차를 마시고, 작업실에서 오전 작업을 한다. 오후에는 하루키처럼 호수공원을 달린다. 밤이 되면 아내와 친구들, 혹은 책과 관련된 사람들과 더불어 근사한 저녁을 할 것이다. 이런 상상의 정점은 역시 여행 아닐까?

원고 마감 후, 회사 눈치 보지 않고 최소 2주간 장기 휴가를 갈 것이다. 먹고 마시고 수영하고 멍 때리며 나무늘보처럼 늘어지고 싶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주간 회의 시간에 미쳐 날뛰는 부장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살기를 욕망하면서 남들이 가는 길만 따라간다. 니체는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남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가다 본캐를 선택 당했지만, 부캐만은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해 보는 건 어떨까?

태그:#부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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