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 20:30최종 업데이트 20.07.0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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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술을 빚게 되는 동력은 무엇일까? 창의적인 집중력일까, 새로운 호기심일까,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고 싶은 욕망일까? 아니면 그저그저 세상을 따라가다 보니 술을 빚고 있는 것일까? 충청북도 청주에서 술을 빚는 풍정사계 이한상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와 긴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2012년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정철 교수가 인솔하는 술기행단에 합류하여 중국 쓰촨성(泗川省)을 여행했을 때였다. 우리는 쓰촨성 우량예(五粮液) 제조장 안에 있는 산 위에 올라가서 제조장을 내려다보았다.


아파트처럼 생긴 술 저장고가 산 아래 가득했고, 그 안에서 3만명이 일하고 있다는 말에 함께 놀라기도 했다. 쓰촨성 이빈(宜賓)에 가서는 1573년에 팠다는 술구덩이를 가진 루저우라오자오(泸州老窖) 제조장를 보았다. 그리고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일행이 30명이 넘어서,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다.

"중국에서 찍은 사진 줘!"

중국을 다녀온 뒤로 2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에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인사말도 없이, 대뜸 하던 그 말이 무척 낯설었다.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서 나는 그것을 건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도 나의 버릇 때문일 것이다. 현상하고 인화하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들었던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찍은 사진을 상대에게 건네는 게 특별한 일이었다.

그 버릇을, 디지털 카메라 시대로 넘어와서도 나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로는 너무 많은 사진을 찍어서 그중에서 완성도 높은 사진을 골라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진 선별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사진을 건네는 일은 아득히 먼 일이 되고 만다. 나는 곧바로 단체 사진 몇 장을 챙겨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 일이 있고, 한참 뒤에서야 이한상 대표가 얼굴에 미소 하나 없이 맡겨놓은 물건처럼, 사진을 달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전직, 사진관 사진사였다.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을 만나 깊어진 술과의 인연
 

이한상 대표는 앞으로 다단식 동증류기를 이용하여 풍정사계 소주를 만들 예정이다. ⓒ 막걸리학교

 
그는 젊은 날 포항제철에서 기술직으로 두어 해, 대전 신문사에서 사무직으로 다섯 해를 일하다가, 마흔 살 무렵에 사진 학원을 1년 동안 다닌 뒤에 1994년 청주시에 사진관을 열었다. 사진관이 붐을 이루고 있을 때여서, 동네 미장원과 사진관의 숫자가 비슷할 정도로 흔했다.

그 무렵 청주 시내에 사진관이 150개가 있었고, 겸업으로 사진을 찍어주던 업체가 100군데가 더 있었다. 그가 운영하던 샘스튜디오 주변에는 10개의 사진관이 있었다. 다리가 긴 삼각대 위에 무겁고 큰 중형 카메라를 얹어놓고 사진을 찍어야 폼도 났다. 해마다 새로운 장비를 두어 개씩을 갖춰야 경쟁에서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에 들어서 포토샵이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진을 인화하던 시간이 7일에서 3일로 짧아지더니, 30분 증명사진이 등장하고, 마침내 디지털 3분 완성시대가 되면서 사진값은 더 이상 오르지 않게 되었다. 사진관을 운영하기 어려워졌고 변신이 필요했다.

그는 경주 보문단지에서 사진 기자재 전시와 사진 기술 교육을 받으러갔다가, 비싼 경주교동법주 한 병을 사게 되었다. 알코올 도수가 17%로 독했지만, 술에서 백합 향이 돌고 맛이 좋았다. 그는 술이 약한 편이라, 그 술을 시렁에 올려두고 하루에 한 잔씩 생각날 때마다 야금야금 마시니 한 달이 걸렸다.

그는 경주 교동법주 같은 술을 빚고 싶어졌다. 사진관 컴퓨터로 검색하다가, 전주와 서울에 술 교육기관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서울은 너무 복잡할 것 같고, 2006년에 청주에서 전주 전통술박물관으로 술을 배우러 다녔다. 그곳에서 출강 온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을 만났고, 술의 인연이 깊어졌다.

그는 박록담 소장으로부터 술을 배우면서 홍삼 법주를 알게 되었고, 그 술을 반복해서 빚게 되었다. 그는 "백 가지 술을 만드는 것보다 한 가지 술을 잘 만들어 내 술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2008년까지만 해도 그가 빚은 홍삼 법주가 무척 달아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단맛을 줄이려고 쌀양을 줄이고 물양을 늘려도 보고, 누룩량을 조절해 보기도 했다. 2010년쯤 되자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술맛이 나왔다. 그 술을 발전시켜 지금의 풍정사계 술에 이르게 되었다.

"내 누룩이 있어야 내 술이 있다"
 

풍정사계 양조장 옥상에 매달린 누룩, 밀과 녹두로 만든 향온곡이다. ⓒ 막걸리학교

 
그가 또 하나 중요하게 여긴 것은 누룩이었다. 2007년 6월 여름부터, "내 누룩이 있어야 내 술이 있다"는 생각으로 누룩 만들기에 정성을 들였다. 누룩연구회 모임을 만들어, 같은 누룩으로 술을 빚어 비교해보기도 했다. 그는 좀 특별한 누룩을 만들고 싶어서 녹두 10%에 밀 90%로 배합한 향온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누룩을 지금까지 만들고 있고, 풍정사계 술맛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2013년에 양조장을 차렸고, 2015년에 처음으로 풍정사계 약주 춘을 만들었고, 2016년에 소주 동, 탁주 추, 과하주 하를 만들어서 춘하추동을 완성했다. 2016년 가을에 열린 대한민국우리술품평회에서 약주 춘 15%와 소주 동 42%가 동시에 최우수상을 받았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우리술품평회에서 약주 춘으로 대상을 받았다. 그 수상 이력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 방문을 했을 때, 약주 춘이 만찬주로 나왔다. 그렇게 풍정사계는 이름을 얻고, 세상에 존재감을 알렸다.

그는 풍정리 고향 집에서 술을 빚고 있다. 그가 사는 집의 옥상에 누룩 제조 공간을 만들고, 방들을 나눠서 제조실과 발효실을 만들고, 냉장 보관실은 마당 한 켠에 새로 지었다. 직접 허리를 굽히고 팔을 휘저어 항아리에 술을 담고, 아내와 딸의 도움을 받아서 술을 거른다.
 

고향집의 공간을 활용하여 만든 풍정사계 양조장, 윗층에 누룩 제조공간이 있다. ⓒ 막걸리학교

 
그에게 풍정사계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풍정(楓井)은 단풍나무 우물이 있었던 그가 사는 고향 마을 이름이란다. 고향에 돌아와 술을 빚으면서 마을 이름을 담았고, 네 종류의 술을 빚고 싶어서 풍정사계로 이름지었다. 그 우물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어렸을 적 기억 속에만 남았고 마을이 변하면서 없어졌다고 했다. 그가 변해온 것처럼, 그가 사는 동네도 변화의 바람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현대식 장비로 새로운 도전

그는 말수가 적다. 충청도 사나이니까 그러는가보다 한다. 그런데 어쩌다 나누게 되는 말들은, 요점 정리가 된 것처럼 짧으면서도 분명하다. 너무 분명해서, 서론이 없는 본론 같고, 때로 본론도 없는 결론 같다. 그래서 단순하고 무뚝뚝하고 거칠어 보인다.

그는 간명하게 말한다. 그를 지금에 도달하게 만든 것은 세 가지라고, 법주, 누룩 그리고 박록담 소장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거칠지만 집요함이 있고 의리가 있다.

그런 그가 올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초정약수터 부근, 산능선이 편안하게 모이는 지점 아래쪽에 제2 양조장을 지었다. 소주 전용 제조장인 제2 양조장에서는 500ℓ 용량의 다단식 동증류기로 소주를 내린다.

그가 고집했던 양조 도구인 전통 옹기 항아리 대신에, 동과 스테인리스로 된 현대식 양조 장비들을 들였다.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변신하는 것만큼이나 그에게는 큰 변화고 도전이다. 그의 무뚝뚝한 뚝심이 또 어떻게 세파에 맞설지 궁금하다. 다음에 그를 만나면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해야겠다.

"새 증류기로 빚은 술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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