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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72년이 되는 해입니다. 보이지 않는 테두리로 말과 신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이제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법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이 필요할 때입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겪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국가보안법의 과거, 현재를 짚어보며 사회적으로 환기하고자 합니다. 일상 속의 국가보안법, 나와 국가보안법을 연결하는 경험과 문제의식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연속 기고를 진행합니다.[기자말]
 국가보안법에 대해 다룬 영화 <변호인> 중 한 장면.
 국가보안법에 대해 다룬 영화 <변호인>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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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의 나이가 마흔여섯이 되던 봄, 막내아들이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4년 전 앓았던 자궁암이 말기로 재발했다는 벼락같은 시한부 통보를 받아 부둥켜안고 펑펑 울던 일이 채 얼마 되지 않아서다. 친구들의 권유로 학생회장에 당선 되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대학생활은커녕 산골짜기의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한 경순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이른바 '마찌꼬바(소규모 사업장)'라고 불리는 조그만 봉제공장 사모님이었던 경순은 말이 사모님이지 미싱사에 불과했고, 사장님 소리를 듣던 그의 남편도 정작 재단사일 뿐이었다. 항상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장손'도 '1녀'도 아니었던 막내아들을 시다(견습공)삼아 야근을 하기 일쑤였다. 

1980년대 서울에서는 작은 사글세에 아이를 두 명밖에 받아주지 않아 삼남매를 모두 데리고 살 수 없었다. 막내는 홀로 사는 시어머니 손에 키워야 했고 초등학교 입학식이 되어서야 서울로 데려와 함께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매일 같이 공장에서 함께 실밥에 엉키면서도 경순에게 막내는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었다. 제 손으로 키우지도 못했는데 해산물과 국수를 좋아하는 식성도 다섯 가족 중에 유독 막내만 잘 맞았다. 품안에 15년도 채 두지 못했는데 이렇게 집을 나가버리다니.

정보과 형사와 암투병

집을 나가고 나서 며칠이 지나 경찰서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다. '출두요구서'. 남편이 알면 큰 일이 날 것 같아 경순은 누가 볼세라 장롱 구석에 종이를 숨겨두고 막내가 알려준 학생회실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막상 출두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애한테 뭔가 생각이 있겠지'.

또 며칠이 지나니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렇지, 이제 집에 올 수 있겠구나' 했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쳤다. 형사였다. 아이가 집에 없다고 하는데도 몇 번씩 문을 두드리더니 아예 집 앞에 차를 대고 숙식을 했다. 그들은 경순이 항암으로 몽롱한 와중에도 찾아와 "아들이 구속 되면 앞으로 취직도 못하니 학교에 들어가 아들과 학교 앞 식당에 밥 먹으러 나오라"고 했다. 학생회실로 전화해 얼굴 한번 보자는데 오지 말라는 얘기만 반복하는 아들이 원망스럽다. 

얼마간 극성스럽던 형사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그보다 경순이 마지막 수술을 받아 병원에 입원해 집에서 그들을 맞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추석을 맞아 보고 싶다고 막내에게 전화를 하니 그제야 학생회관 앞에서만 만나는 조건으로 만나주겠다고 한다. 수배가 시작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그때의 경순은 링거를 주렁주렁 단 채 승합차에 간신히 누워 거동할 수 있는 상태였다. 짧은 만남 내내 주위를 두리번대던 아들은 결국 차 안에 들어와 보지도 않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런 아들이 경순의 곁으로 돌아온 것은 연말이 다 되어서였다. 술에 가득 취해 들어온 막내는 경순의 침대에 엎드려 울기만 했다. "괜찮다 용신아, 다 괜찮아."

만 스무 살의 국가보안법 수배자

대학 3학년 때 단과대 학생회장 역할을 수행했던 나는 빠른 년생이었던 탓에 갓 만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당시엔 1997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아래 한총련) 이적규정의 여파로 단과대 학생회장 이상의 직책에 당선되면 자동으로 이적단체 가입의 죄를 물어 수배자 신분으로 캠퍼스 안에서만 생활(대학과 종교시설에 경찰이 진입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불문율이었다)해야 했다. 그게 싫으면 제 발로 경찰서에 가서 '한총련 대의원 탈퇴서'를 작성해야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그것도 아니면 연행 뒤 구속되어 죗값을 치른 이후에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신생 단과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린애가 단과대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로 '이적단체 가입'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을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고, 수배가 되지 않기 위해 경찰서에 가서 탈퇴서를 작성해야 하는 모욕적인 절차를 젊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수배생활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고생한다며 응원해주는 학우들도 많았고 함께 수배생활을 겪는 선배들이 있었다. 수배자 중에서도 내가 막내였기 때문에 항상 챙김을 받는 조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잠자리에만 누우면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치 어린 시절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시골집에 어머니가 잠시 다녀갔던 날의 밤들처럼, 매일 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갯잇을 적시며 잠에 들었던 시절이다. 

연말이 되어 차기 학생회장 선거가 시작되고 공허함을 숨기지 못했는지, 갑자기 동기들이 바람을 쏘이러 가자며 나를 남몰래 차에 태워 강원도로 향했다. 긴장 속에서도 잔뜩 부풀어 춘천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강촌 근처 검문소에서 막혀버렸다. 렌트카 번호판이라 전원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평소 외우던 친구의 주민등록번호를 댔는데, 지문모양이 달라 검문소로 옮겨졌다. 앳된 학생이 이상한 행동을 하니 경찰이 어리둥절해서 제대로 불러보라고 부탁조로 이야기를 했는데, 내 주민등록번호를 대면서 눈물이 쏟아져버렸다. 별달리 슬픈 사연도 없는 열세자리 번호를 읊으면서 통곡을 하다니, 아무래도 이토록 우습게 잡히는 게 너무 억울해서였을 테다. 

'국가보안법 위반, 집회와 시위... 폭력행위 등...'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자 모니터에 수배 사유가 줄줄이 나왔다. 검문소 숙직실에서 자던 간부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그들은 모니터와 내 얼굴을 몇 번씩 번갈아보며 당황해했다. 그때는 아직 수배자 사진까지 전산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얼굴을 맞춰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만 20세'가 행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범죄였기 때문에 그들도 말문이 막힌 것이다. 검문소에서 가장 높은 직급의 경찰은 나에게 담배를 건네면서 "아니 이런 어린 학생이 뭘 어쨌다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검문한 의경조차 연신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 했을 지경이니 이 어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탈퇴서와 어머니의 죽음... 수배 이후 내 삶은 제사가 됐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다룬 영화 <변호인> 중 한 장면.
 국가보안법에 대해 다룬 영화 <변호인>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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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춘천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고 나니 다음 날 동트기 전에 담당 형사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 관할 경찰서인 청량리경찰서(현 동대문경찰서)에 내렸더니 건장한 체격의 낯이 익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모두 정보과 형사였는데, 오고가며 얼굴이 익었던 모양이었다. 여러 명에 둘러싸여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뒤에서 한 형사가 나를 툭 치고는 "너희 어머니 참 대단하시더라"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자식들아! 내가 말기암 환자야. 우리 아들이 뭘 잘못했다고 계속 찾아와. 나 죽으면 당신들 때문인 줄 알아. 다시는 우리 아들 찾으러 다니지 마."

집에 몇 번 찾아갔더니 어머니가 그리 고함을 지르면서 쫒아 내더란다.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소 얌전한 편인데다가 겁도 많고 누구한테 반말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도 봉제공장의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언제나 존대를 하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그렇게 절규를 했다니 믿기지 않았는데, 다른 형사들도 "그때 이후로 못가겠더라"며 맞장구치는 걸 보니 사실인 것 같았다.

이어진 조사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다. 의미 없는 질문이 계속됐고 나는 믿어지지 않는 어머니 모습을 상상해봤다. 아무리 집중해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구출하자' '석방하라'는 동료들의 구호가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하루가 지나고 나니 학생회 후배 한 명이 정보과로 들어섰다. '어머니 건강문제도 있으니 탈퇴서를 쓰고 나오라'는 동료들의 결정을 전달하러 들어온 것이었다. 정보과 쪽방에서 남자 둘이 껴안고 서로 미안하다며 한참을 울었지만, 사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갔는데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미안하기도 원망스럽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었다. 어머니는 그 후 5개월을 더 병상에 계시다가 눈을 감으셨다. 그날이 때마침 봄 농활 출발하는 날이어서 농활 참가자들의 버스가 장례식장에 들러 많은 학우들이 조문을 해줬다. 장례기간 내내 상상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그려봤다. 그때 어머니는 어떤 용기가 났던 걸까? 어머니는 나의 학생운동을 무어라 생각하셨을까? 3일간의 장례는 내게 '경찰이 본 어머니'에게 배신하지 않고 살겠다는 삶의 방향을 잡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내 삶은 어머니를 향한 길고 긴 제사가 되었다.

수천의 수배된 젊음들, 수천의 말 못할 사연들

1997년 한총련 이적규정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수배된 20대 대학생이 수천 명은 족히 된다. 나는 그중에서도 굉장히 짧게 수배생활을 한 축에 속한다. 수년 동안 가명까지 사용하면서 숨어서 살아야 했던 사람, 구속되어 집행유예를 받은 사람부터 실형을 받은 사람까지. 경찰의 권총협박을 받은 사람도 있고, 직계가족의 장례조차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경찰의 회유에 속아 부모가 자식을 학교 밖으로 유인해 경찰에게 넘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보통은 평생 한번 경험해보지 못할 '수배자'라는 주홍글씨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20대 청춘들에게 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을까. 그리고 수배생활과 옥살이를 지켜보고 뒷바라지해야 했던 수많은 어머니와 가족, 주변 사람의 가슴앓이를 상상해보면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파괴하고 감금해 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총련 수배자들은 수배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국가보안법의 올가미를 제 목에 묶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피해자'라는 호명이 적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것은 마치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운동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펼치며 "법률을 어기기 위해 법률을 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태도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범법자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으며 적극적으로 법을 어겨 국가보안법을 사문화시키는 '불복종운동'의 당사자였다고 기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 한총련 이적규정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호칭이 누군가에게 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더 어울리는 상처일 것이다.

수배생활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매일 밤 울던 대학생이 이제 두 아이를 둔 40대 아저씨가 되었는데도, '불효'라는 다시는 갚지 못할 죄의식과 '탈퇴서'라는 죄책감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면, 만약,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그때엔 이 긴 제사를 마치고 스스로 가둬온 감옥의 문을 열고 나설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조용신님은 진보당의 공동대표이며,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이 기고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기 위한 전시회의 일환으로 진행합니다. 전시회는 2020년 8월 25일(화)~9월 26일(토), 장소는 민주인권기념관(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진행할 예정이며,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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