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랜짓> 포스터

영화 <트랜짓> 포스터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영화 <트랜짓>은 파시스트의 점령으로 혼란스러운 파리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라디오 수리공인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가 작가 바이델에게 아내 마리(폴라 비어)가 쓴 편지와 멕시코 대사관에서 온 비자 허가서를 전하란 부탁을 받고 바이델의 집에 도착하지만 그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그 길로 그는 다리가 아픈 친구를 데리고 마르세유로 가는 기차에 몸을 맡긴다. 그 안에서 게오르그는 작가가 남긴 원고를 읽는다. 마치 영화의 내레이션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차에서 친구는 죽었고, 신분의 위협을 느낀 게오르그는 열차를 탈출한다.

게오르그는 방을 구하기 위해 호텔을 찾지만 주인은 이곳에 묵으려면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을 증명하라고 말한다. 마르세유는 일종의 경유지기 때문에 통과하기만 할 것을 증명해야 하는 거다. 마르세유는 많은 망명자, 유랑자, 이민자, 난민에게 정착을 위해 꼭 지나가야만 하는 신비로운 장소다.

하지만 그는 등록증이 없는 불법체류자이기에 호텔 주인의 요구대로 전 재산을 털어 일주일치 방값을 지불한다. 때문에 작가의 원고를 돌려주고 수고비라도 받으려 멕시코 대사관을 찾는다. 극심한 굶주림은 그를 대사관으로 이끌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을 안고 온 사람들로 인해 긴 기다림을 감수해야만 했다. 드디어 이름이 불리고 대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대사는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착각한다.
 
 영화 <트랜짓> 스틸컷

영화 <트랜짓> 스틸컷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그리고 대사관을 나와 친구의 죽음을 전하러 갔다가 친구의 아들 드리스와 아내 멜리사를 만나 친분을 나눈다. 그러다 드리스가 아파서 의사인 리처드(고데하르트 기에세)를 찾는 과정에서 리처드의 연인 마리를 만나게 된다. 마리는 게오르그가 마르세유에 도착했을 때부터 자신을 누군가로 착각해 마주친 여인이다. 이름이라도 물어보고 싶지만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고 떠나 몹시 궁금했었기에 반가움과 궁금함이 교차된다.

점차 게오르그는 마리에게 이끌리듯 매료되어 간다. 그러면서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미래를 꿈꾼다. 자신을 진짜 바이델로 믿기 때문에 비자 발급도 가능한 상태라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게오르그는 이참에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

영화는 독특한 화법과 분위기로 과거의 이야기를 현대로 치환한다. 첫째는 문학을 영화로 옮긴 듯 간간이 들려오는 내레이션이다. 이러한 구성은 죽은 바이델의 원고를 읽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을 영상으로 읽는 듯 신비로운 형식이 인상적이다. 점차 게오르그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을지 모를 묘령의 여인 마리 때문에 흔들린다.

둘째는 읽다가 만 부분을 표시하는 책갈피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마리다. 마리는 현재 리처드와 살고 있지만 남편 바이델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중이다. 마치 과거(작가)와 현재(의사), 미래(수리공) 세 남자를 유유자적 흐르는 시간과도 같다.

마리는 어디에도 얽매지 않고 세 사람을 통과해 존재한다. 3주 전 리처드와 마리는 마르세유를 떠날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승선한 직후 마리가 내렸고 리처드도 따라 내렸다. 리처드는 마리와 함께 떠나고 싶지만 마리의 통행증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남편 때문에 혼자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치 데자뷔처럼 게오르그도 새 출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마리로 인해 좌절되며 혼돈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독특한 배경이다. 현재의 유럽이지만 파시즘, 인종청소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떠오른다. 21세기 유럽의 문제 중 하나인 난민과 인종차별이 혼재한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를 현대로 바꾸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유럽을 떠나려 했다. 지금의 난민들도 나라를 떠나 각기 다른 지역으로 편입되길 원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그들이 품었을 불안과 상실, 고통과 슬픔의 감정이 전해진다.
 
 영화 <트랜짓> 스틸컷

영화 <트랜짓> 스틸컷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영화는 실제 긴 망명 생활을 했던 작가 안나 제거스의 자전 전인 소설 <통과비자>를 바탕으로 각색했다. 소설은 2차 세계대전 파시즘과 망명에 대해 다루지만 영화는 이를 고스란히 현대로 옮겨와 판타지 공간처럼 구성했다. 따라서 21세기 유럽의 갈등이 되고 있는 난민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친구의 가족인 멜리사와 드리스의 집이 새로운 난민 가족으로 채워진 장면,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 연행되는 난민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오늘은 내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내일은 내가 될 수 있어 불안한 마음이다.

난민과 불법체류자는 어떤 이유로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모진 수난을 겪는 사람들이다. 나라를 떠나 가족과 떨어지더라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고유의 '언어'를 쓰는 것으로 발현된다. 일제 시대 일본이 우리의 말과 글을 말살시킨 역사는 총과 칼의 무력보다 더 강한 교화 방법이란 생각에서다. 모국어는 뿌리를 잃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몸부림이다.

따라서 독일인지만 파시즘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쳤고 다시 멕시코로 가려는 게오르그를 통해 떠도는 삶의 애완과 슬픔을 충분히 느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옮겨 상상해 보자면 나라를 잃은 독립군이 만주로 향해 있던 시절이기도 하며 모든 경계에서 발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은유한다. 영화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현재 유럽의 난민 문제처럼 우리나라의 불법체류자 문제까지 확장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트랜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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