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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가 시행된 18일 오전 서울 상암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교실 사진 (기사와 사진은 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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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그날도 다를 게 없었다.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때론 설득하며 나름 교사로서 충실한 언행으로 수업을 했다. 점심시간을 앞둔 4교시 수업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사에게도 더 많은 열정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그 누구보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의지가 강한 교사가 아닌가? 어떻게든 듣게, 보게 만들어 변화를 이끄는 교사가 아닌가? 아이들의 늘어진 몸과 마음을 긴장 시켜 수업에 좀 더 집중하게 질문해서 칭찬하고 벌을 줘야지, 생각했다.

수업을 멈추고 출석부에 있는 이름 중 하나를 불렀다. 그리고 수업을 조금만이라도 들었으면 알 수 있는 질문을 했다. 맹세코 절대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이름이 불려 손을 든 아이를 보자마자 난 답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못하면 뒤로 내보내서 '앉았다 일어났다'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기대가 없는 기다림이 지나고 아이는 내 명령대로 뒤로 나가 '앉았다 일어났다'를 했다. 질문은 이어졌고 아이들은 줄줄이 뒤로 나갔다. 예상했지만 화가 났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는데... 배신감이 더해져 아이들이 해야 하는 '앉았다 일어났다'의 횟수는 점점 더 늘어갔다. 

횟수가 늘어나도 자율적(?)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요령껏 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어떤 아이는 유치원 아이들 율동하듯이 하기도 했다. 

아이들과 나와는 그렇게 서로 암묵적인 거래가 있었다. 물론 간혹 진짜로 하는 아이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 아이를 난 애써 말리지는 않았다. 또 말릴 수도 없었다.

"아직도 그러세요?"라는 말의 충격

그렇게 아이들과 나의 싸움은 '똘똘한(?)' 아이가 가까스로 답을 맞히고서야 끝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수업을 하던 중 아이들이 앞문을 가리켰다. 

아이들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문 사이에 있는 작은 유리창 너머로 한 젊은이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아주 낯선 얼굴은 아니어서 혹시 제자인가 싶었지만 아닐 수도 있었기 때문에 누구시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괜찮으세요?"
"네. 말씀하세요."


수업 중인 선생님에게 말할 것이면 그리 길거나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당황시켰다.

"선생님, 아직도 아이들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키세요?"

뒷말을 끊었다. 성을 내거나 조롱하는 말투가 아닌 그저 평범한 어조였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비난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 무슨 상황인가 알고 싶어서 호기심에 불타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 또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당황하면 안 됐다.

지금은 수업 중이니 수업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옆에 있는 학년부 교무실에 가서 조금 기다려 달라'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청년은 '알겠다'고 하며 교무실 쪽으로 갔다.

청년을 교무실로 보내고 계속 수업을 했지만 누구지? 말속에 느껴지는 비난은 뭐지? 벌이 금지됐는데 벌주는 것을 문제 삼으려나, 조금 이따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지? 하는 생각으로 내 마음과 머릿속은 복잡했다.

정신없이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갔다. 가는 동안에도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 청년은 없었다. 혹시 다른 교무실에 갔나 해서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그 청년은 없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난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구구절절 내 열정을 보이고 합리화해야 하는 민망함, 그리고 아이들을 탓해야 하는 비겁한 상황에서 벗어난 것이 너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누구지? 하는 의문은 계속되었다. 선생님들에게 '그 청년 보았냐'고 물었다. 선생님 중 한 분이 4년 전에 졸업한 아이인데 스승의 날 즈음해서 선생님들께 인사드린다고 왔다고 했다. 난 그제야 '그' 청년이 기억났다.

내 기억 속의 청년은 수업 시간 칠판을 거의 보지 않고 웅크린 자세로 있다 질문을 하면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으레 뒤로 나가던 아이였다. 의욕 없는 태도에 몇 번인가 화를 내도 달라지지 않는 아이, 또 그런 아이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과 그에 비례한 분노. 아무튼 내가 기억한 '그 청년'은 결코 수업 중인 선생님에게 그러한 항의(?)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아이가...

청년의 말 중 특히 '아직도'라는 말이 주는 충격은 컸다. 그 말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이며 비인권적인 방법을 쓰느냐는 비난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 비난을 아무런 저항 없이 벌을 받던 아이가 한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알아서 요령껏 하겠지' 하며 아이들을 비양심적으로 만드는 교사가 나였음을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킨 지 5년 만에 깨달았다. 

또 그 벌을 받으며 아이가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 그 상처가 수업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 아무런 반항도 못 하지만 결코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소심하고 소극적인 아이가 몇 년 만에 찾아온 학교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 장면이 여전히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보고 얼마나 분노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이었다는 나쁜 변명

며칠 동안 난 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벌을 주는 이유를 생각했다. 그 후로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몇 번씩 속으로 말하곤 한다. 또 내가 화를 내려는 이유를 다시 생각한다. 

'분노조절장애'를 '열정'으로 포장하진 않는다. 강요하지 않아도 '진짜 열정'은 학생들에게 저절로 전해지는 것임을,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프다는 말조차 힘든 아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됨을 되뇐다.

'청년'은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미안하고 고맙다. 지금이라도 '그 청년'을 만나 아름다운 시절에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

요즘 뉴스를 보기 겁이 난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폭력적인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9살 아이에게 가학적 행위를 한 부모, 한 운동선수를 죽음으로 내몬 지도자들 모두 사랑이었다고, 열정이었다고 변명을 한다. 

결단코 그것은 사랑도, 열정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폭력을 변명, 합리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이들의 잘못은 만들어지고, 자신들의 잘못은 축소한다. 예전에 내가 그렇듯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깨우치기를 기대할 순 없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처벌이 강화되어야 한다. 더 이상 폭력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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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소재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입니다. 학교에 다녔던, 또 학교에 근무하며 생각하고 느낀 바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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