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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잠은 잘 잤는지, 잠자리에는 일찍 들었는지 여느 날처럼 밤새 안부를 물었다. 고등학생인 딸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어젯밤에 엄마한테 가고 싶었는데 엄마가 방문을 닫고 있어서 못 갔어요" 한다. "아니, 할 말 있으면 문 열고 들어오지 그랬어" 하자 "엄마가 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서요..." 한다. 
 
아침부터 이불속에서 널브러지고 싶었던 걸 참고 참다가 하루 일과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그 문을 열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침부터 이불속에서 널브러지고 싶었던 걸 참고 참다가 하루 일과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그 문을 열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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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말이 맞다. 말로는 '오지 그랬어' 하지만 난 절실히 혼자 있고 싶었다. 특별한 일은 없는 하루였지만 내내 우울했다. 저녁 찬거리 만들기도 귀찮았고, 청소하기도 싫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루 보낸 이야기도 어제저녁에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아침부터 이불속에서 널브러지고 싶었던 걸 참고 참다가 하루 일과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굳이 아이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음으로써 가라앉은 내 마음이 전해졌던 거다. 감수성 높은 딸은 대번 내 마음 상태를 눈치챘던 거고.

"미안, 딸. 엄마가 필요했구나. 에구... 몰랐네. 지금은 괜찮아?" 다정하게 물었지만 딸은 뒤늦은 위로에 서운했는지 벌써 눈물이 눈에 고인다. '에휴, 녀석. 아직도 아기네...' 싶다.

내 마음이 축 처진 날, 하필 딸도 뭔가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딸은 마음이 무거울 때 대개 가족과 대화하며 풀곤 한다. 보통은 그런 신호를 지나치지 않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려 노력한다. 그런데 간혹 어제처럼 내 마음이 진흙탕인 날은 내 앞가림이 급해 아이들 마음까지 보살필 여력이 없는 때가 있다. 

온전한 나에서 엄마로 리셋 된 삶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그랬다. 내 마음은 종종 비 맞은 종이처럼 젖다 못해 너덜너덜한데 해맑은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내 주의와 관심을 끌며 반응과 행동을 요구해서 참 버거웠더랬다.

혼자 삭이며 조용히 지나가기도 했지만 영혼 없는 대답과 행동으로 응대할 때도 많았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감정을 폭발시켜 괜한 아이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내 마음 추스르기도 급급한데 혹여 아이들 마음 다칠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라니... 아, 엄마 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녹록지 않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살았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 남에게 피해만 안 준다면 내가 뭘 하면 즐거운지, 뭘 먹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뭘 사고 싶은지, 무얼 하든지 모든 사고의 중심과 기준은 '나'였다.

그렇게 사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결혼해서 어느 날 아들이 태어나고, 3년 뒤에 딸이 태어나면서 30년 가까이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나'만의 성채가 급격하게 금이 가며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내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어서 가장 사적인 볼 일마저 문 닫고 맘편히 볼 수 없었고, 친구와 전화 한 통화 온전히 할 수 없었다. 

온 시간은 물론, 모든 에너지마저 남김없이 기꺼이 투여해 주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한 삶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나'만 생각할 줄 알았던 존재는 그렇게 모든 사고와 행동체계를 아이들에 맞추어 리셋시킨 채 매일매일 고군분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던 것 같다. 
 
   빈 속을 채우는 건 사랑을 나누는 데서 느끼는 기쁨일 수 있다.
▲ 소라껍데기   빈 속을 채우는 건 사랑을 나누는 데서 느끼는 기쁨일 수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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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엄마가 된다는 건 자꾸 껍데기가 되는 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첫 애를 뱃속에서 쏙 빼낼 때를 시작으로 내 안의 알맹이를 끊임없이 꺼내 주니 말이다.

젖을 먹이면서 내 속의 양분을 내어 주고, 어릴 적 재미있었던 놀이들을 오래된 기억 속에서 꺼내어 함께 논다. 아이의 자유분방한 질문에 있는 지식 없는 상식 다 끄집어내 설명해 주고, 아플 땐 뜬 눈으로 밤새가며 진을 빼며 간호하는 게 엄마 노릇이니 말이다.

요즘처럼 잔손 갈 일이 없는 청소년기에도 그렇다. 새로 한 반찬들을 녀석들 쪽으로 밀어 먹이고는 "엄마, 다녀올게요" 소리 들으며 다 먹고 난 빈 그릇들을 설거지 할 때... 나도 모르게 속이 쏙 빠져나간 소라껍데기가 된 기분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제 생각을 고집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걸 볼 때 이제 내 삶을 살 때가 되었구나 싶어 홀가분하다가도 가슴이 못내 허하다. 이유가 뭘까. 내 속에 내가 없어서. 알맹이 다 꺼내 주고 껍데기가 돼버려서가 아닐까.

어느 날, 놀이 강연을 참석하게 되었다. 강사님이 자기 아이와 함께 한 놀이들이라며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셨다. 6년간 육아휴직을 하셨다고 한다. 그간 아이와 함께 된장과 김치를 담그시고, 집 주변 산의 나무에다 그네를 매어 주시며, 동네 아이들과 산에서 노는 걸 옆에서 보는 그런 사진들이었다.

삶은 콩을 주무르고, 빨간 김치 속을 절인 배추에 버무리는 사진 속의 강사님 아이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일견 진지한 표정이다. 나무에 맨 그네를 탈 때는 함박웃음을 짓다 못해 입이 얼굴을 넘칠 기세다. 

길고 얇게 자른 신문지를 가로 세로 맘대로 사방팔방에 교차해 붙여 놓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건너 다닌다. 비 오는 골목길에 돗자리를 펴고는 활짝 핀 우산 너덧개를 이어 우산 무리를 만들고 그 아래에서 태평히 누워 빗속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 

강사님은 놀이가 별 게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돈 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설명을 하셨다. 정말 돈은 들이지 않았는데, 아이와 온 시간을 함께 보낸 엄청난 헌신의 사진들이었다. 사실 일상을 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정성을 들여 함께한다는 건 돈 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사님은 결혼한 지 9년 만에 얻은 아이라 그리 헌신적일 수 있었던 걸까. 어떻게 저렇게까지 아이를 위해 사실 수 있는 걸까. 저분은 속이 허하진 않으실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사랑을 덜 나눠서 우울했을까

강사님 마음이 허한지 안 허한지 따로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느껴진 게 있었다. 사진 속의 그분의 아이가 너무나 생기 있고 행복해 보였다는 점이다. 마음껏 제대로 놀아 마음이 정돈되어 보이는 아이, 키우는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아 사랑을 한껏 머금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감동이었다. 아무 관련이 없는 내가 봐도 그 아이가 품을 세상이, 펼칠 나래가 자못 기대될 정도로 말이다.

왠지 우울해져 껍데기 되는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데에 마음을 쏟고 있다가 정신이 퍼뜩 든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참 뿌듯해지고, 저런 아이를 키워내 주신 강사님께 감사하다. 그 아이가 우리 아이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갈 거란 사실에 힘이 난다. '우리 애들도 잘 키워야지' 하는 다짐도 또 불쑥 일어난다.

놀이 강연 덕분에 잊히려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사랑하는 자가 받게 되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주는 자의 기쁨! 껍데기인 나를 다시 채울 수 있는 건 결국 내 안의 사랑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줄 때 느끼는 기쁨일 수 있다는 삶의 평범한 지혜. 이왕이면 물질보다 시간과 정성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요 며칠 우울했던 건 혹시 덜 나눠서가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내 시간과 열의를 나눠주고, 가능하면 주변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필요한 걸 나눠주며 허한 속이 다시 채워지길 기대해 봐야 할까 보다. 갱년기를 맞은 엄마의 우울감은 언제든 또 올 수 있겠지만.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려있습니다.


태그:#엄마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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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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