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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비원 고 최희석씨 사건을 계기로 경찰이 입주민 갑질 특별단속을 벌이고 있다. 지난 23일 국회에서는 전·현직 경비원들이 모인 가운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격인데다 그마저도 한참 늦었다. 그럼에도 갑질 문제가 개인의 미성숙한 인성과 잘못된 사회관념 외에 불공정한 제도 및 미비한 법안에도 기인한다고 본다면, 이제라도 국회 토론회가 열렸음은 환영할 일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신분과 나이에 따라 위아래를 가르는 수직문화가 지배적이었다. 무릇 좋은 자식이라 함은 부모의 뜻을 거역함 없이 받들어 모시고 순종해야 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 했으니 스승은 일방적으로 훈계하고 지시하는 자리에, 제자는 무조건 따르는 자리에 위치해야 했다. '하늘같은 남편'의 고봉밥 위에는 생선 가운데 토막이 올라가고 하늘 아래 사는 아내는 생선가시를 발랐다.

요즘에야 권위적인 부모보단 친구같은 부모가 대세고, 가정 내 남녀의 권력구도도 과거에 비해 많이 평등해졌다.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긴 커녕 교권이 땅으로 추락했다는 한탄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정도가 덜해졌을지언정 나이와 관계에 따른 수직적 상하관념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욱이 과거에는 그 관념의 바탕에 '효'나 '존경' 같은 미덕의 강조가 있었다면 요즘에는 그마저 희미해진 느낌이다.

또, 어느 공동체에서든 서열 매기기가 횡행한다.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군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학교나 직장 혹은 사적인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조금 과장하자면, 애초에 경력 혹은 나이로 서열을 매겨 머리를 조아려야 할 상대와 동등한 입장에서 편히 대할 상대, 내려다보아도 좋을 상대를 정해놓고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더 심각한 문제는, 수직관계를 나누는 기준이 과거에 주로 '나이'와 '경험'이었다면 요즘엔 그보다는 '직급'과 '돈'이라는 사실이다. 노동력을 제공받는 자와 제공하는 자, 돈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수직적으로 상하를 이루고, 오직 돈을 매개 삼아 갑과 을로 정의되는 관계에서 존중이나 배려 같은 '인간다움'은 찾기 어렵다.

상하관념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상'의 위치를 점한 자가 '하'의 위치에 있는 자를 억압, 통제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을'의 입장인 경비원이 봉급을 부담하는 '갑'의 입장인 주민에 의해 억압, 통제 당하는 상황이 생겨날 수 있다는 얘기다.

갑질 가해자들이 흔히 내뱉는 "내가 당신 봉급 주잖아!"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한 배경이다. 돈 주는 사람은 돈 받는 상대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오만함, 관리비 몇푼으로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라도 한 냥 착각하는 물질만능주의적 사고의 결합체와도 같은 말이다.

피용인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고용인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서 급여를 지불한다. 그 단순한 사실이 피용인에 대한 고용인의 무한한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돈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수직적 상하관계를 이룰 이유는 없다. '필요'에 의해 서로 다른 것을 주고받을 뿐이다.

피용인이 제공하는 것은 고용인에게 필요한 노동력이지 생사여탈권, 혹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해도 될 권리는 아니다. 고용인이 제공해야 하는 것은 정당한 급여와 인간답게 일할 환경이지 폭언과 폭행은 아니다.

노동력이 곧 상품인 자본주의 하에서 급여수준은 상품의 가치를 매기는 척도가 된다. 그렇게 치자면, 장시간 고된 육체노동을 제공하면서도 적은 급여를 받는 아파트 경비원이라는 직업의 상품가치는 높지 않다. 이는 경비원들이 갑질피해의 표적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남들이 마다하는 일을 하고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것이 평가절하와 부당한 대우의 이유가 될 순 없지 않은가. 오히려 경비원들이 제공하는 노동의 시간과 가치를 제대로 매겨 정당한 급여로 환산하는 것이 맞다.

자녀들의 독립이 점점 늦어지는 추세인데다 노후대책 마저 마련하지 못한 정년퇴직자들은 재취업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해마다 고령층의 재취업 비율이 늘고 있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퇴직 이후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란 씁쓸한 신조어가 등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퇴직을 하고 나면 경력을 살려 재취업하기란 불가능하며 불안정한 일자리에 매달려 '갑질'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만 60세 이상 취업자는 국내 취업자의 약 19%를 차지했다. 또 만 60세 이상 인구의 약 43%가 일을 하고 있다. <누구나 결국은 비정규직이 된다>는 나카자와 쇼고의 책 제목이 시사하듯, 입주민 갑질 사건은 어느 날인가 내 부모 혹은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경비원을 향한 갑질문제의 기저에는 고용인과 피용인 사이의 수직적 상하관념, 극단적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도사리고 있으므로 인식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다만 더이상의 갑질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법안과 시스템 개선 역시 시급하다.

2019년 7월부터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법이 경비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개정안이 이번 '국회 토론회'에서 논의되었다. 또한, 경비원들이 갑질을 당하면서도 조용히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인 '1년 미만의 단기계약', 즉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한 고용구조 역시 개선될 전망이다.

택배를 옮기고 고장난 곳을 수리하는 등 업무 외의 일들은 하지 않겠다 당당히 선언하는 것,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입주민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것, 그렇게 하고도 해고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이 당연한 일들이 실제로 당연해지는 날이 그리 멀지 않기를 바란다.

태그:#입주민 갑질, #경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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