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소녀

야구 소녀 ⓒ 찬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해도 빼앗을 수 없는 한 가지, 즉 인간의 마지막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자신만의 길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는 2차 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란 책에 남긴 문구다. 삶과 죽음이 수시로 오가는 극한의 상황만이 가득한 수용소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에 대해, 더 나아가 인간 스스로의 존엄에 대해, 빅터 프랭클은 위와 같이 말한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야구를 놓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야구를 이어갈 길이 환하게 펼쳐지지 않아 고민하는 여자 야구 선수 수인에게 이 명제는 어떻게 다가갈까?
 
프랭클은 말한다. 운명이나 죽음처럼 시련은 우리 삶에서 불가결한 부분이며 문제는 그 시련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고 말이다. 그 보편의 '시련' 속에서 선택의 방식과 기준, 그리고 태도에 대해 영화 <야구소녀>는 이야기한다.
 
답이 없다

주수인(이주영 분)은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성 선수이다. 최고 구속 134km, '천재 야구 소녀'라는 화제성에 힘입어 고등학교에서도 선수로 활동했다. 그렇게 3년을 보냈건만, 고3을 대상으로 한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선 그를 위한 기회를 찾아보기 어렵다. 공장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는 이제 그만 야구를 포기하고 자신이 부탁해 기회를 얻은 공장에 와서 성실하게 일하라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지금까지 야구를 해온 수인에게 여자 핸드볼 팀으로 가보면 어떻겠냐고 권한다. 그러나 리틀 야구 시절 이래 야구만 하며 살아온 수인은 야구를 놓을 수 없다. 그녀가 하고 싶은 건 '프로야구'뿐이다. 
 
 야구 소녀

야구 소녀 ⓒ 찬란

 
영화에는 수인의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이 나온다. 수인과 가장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건 엄마로, 그는 할 수 없을 때는 포기하는 것도 괜찮다고 수인을 설득한다. 그리고 그 말처럼 엄마는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으로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 엄마의 말이 틀린 것일까?
 
최근 각종 강연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김창옥씨의 경우 군 제대 후 경희대 성악과에 입학하였지만 자신이 성악가로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깨끗하게 그 길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때로는 김창옥씨처럼 그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도 삶의 방식이다. 졸업을 앞두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수인을 보며 엄마는 부모로서 어쩌면 최선의 충고를 해준 것일 수도 있다.
 
수인에게 포기를 권하는 이는 또 있다. 야구부에 새로 부임해온 진태(이준혁 분)은 냉정한 잣대를 들이민다. 최고 구속 134km은 여성의 기록으로는 놀라운 수준이다. 하지만 진태는 말한다. 134km가지고서는 그 어떤 프로 야구 구단에 명함도 못 내밀 것이라고 말이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실력이 안돼서 안 되는 것이라고. 사실 수인은 리틀 야구 시절만 해도 덩치도 좋고, 힘도 좋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엔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함께 야구를 하던 친구는 수인보다 한참 웃자라 프로야구 팀에 스카우트 됐다. 수인의 키는 그 친구 어깨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체적 부족함을 채울 수 없다면,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른다면, 수인은 포기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수인은 포기할 수 없다. 너는 힘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자, 힘을 기르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찬다. 구속이 딸린다고 하자, 피가 안 묻은 연습공이 없을 정도로 '피나는' 노력을 한다. 여전히 수인의 꿈은 '프로야구 선수'다. 아직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지레 겁먹고 주저앉고 싶지 않다. 여기서 멈출 수가 없다. 
 
수인은 그렇게 집요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그 무모한 노력이 주변 사람들을 달라지게 한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실력이 안돼서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던 코치 진태를 비롯해 엄마까지, 주변인들은 수인의 노력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야구 소녀

야구 소녀 ⓒ 찬란


주수인의 행보를 통해 <야구소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가 오랫동안 명언으로 섬겼던 'boy's be ambitious'의 명쾌한 논리보다는 복잡한 속내를 지닌다. 2020년,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장기 불황이 예견되는 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어느덧 '꿈'은 사치스럽고 거치적거리는 장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야구소녀>가 말하는 건 빅터 프랭클의 그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멈추지 말고 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는 권유이다. 그건 그 일에 대한 성패와 어쩌면 무관할지도 모른다.
 
영화 <보이스콰이어>에서 보이소프라노로 헨델의 메시아를 성공시킨 주인공에게 변성기가 온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소년은 합창단에 남아 엘토 파트를 맡는 대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난다. 자신이 원하던 일에 최선을 다해본 사람만이 자신 있게 다음 도전을 행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주수인이 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리라. 아직 스스로 도달하지 못한 꿈을 위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가보고자 하는 것 말이다.
 
우리 사회는 조급하다. 꿈을 떠올리면 꿈의 성취와 영광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때론 가보는 것만으로도 충족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조급하게 삶의 주판알을 튕기지 말자는 것이다. <야구소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삶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빅터 프랭클이 말한 삶에 대한 자유 의지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무모해 보이는 꿈을 향해 자신의 태도를 정한 '젊은이'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다. 제 아무리 주수인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코치 진태가, 그에게 넌지시 주수인이 볼 컨트롤이 좋다며 귀띔을 해주는 감독이, 기꺼이 주수인의 외골수적 꿈에 기회를 준 구단이, 그리고 결국 지원군이 된 엄마가 없었다면 불가능하거나 더 고달팠을지도 모른다. 때론 무모해 보일지라도 자신이 가보고자 하는 길을 달리는 젊은이들을 위해 길 위에 있는 돌 하나라도 치워줄 수 있는 품성을 가진 어른이 필요함을, <야구소녀>는 이야기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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