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김일성의 아이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의 아이들> 포스터.

<김일성의 아이들> 포스터. ⓒ 평창국제평화영화제

 
6.25 전쟁 당시 부모를 잃은 남한의 전쟁 고아들은 대부분 국외로 입양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여러 복지회에서 아동들의 입양을 주선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자라 정체성에 어려움을 겪는다든가, 한국이 '아동 수출국'의 오명을 썼다든가 하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매스컴에 실리는 곤혹스러운 일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북한의 전쟁 고아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2020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평양시네마' 부문에 오른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은 북한의 전쟁 고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담은 작품이다. 김덕영 감독은 2004년부터 이 다큐멘터리를 준비해왔다.

북녘의 전쟁 고아들에게는 새로운 부모를 찾는 입양이나, 북한 내 후방지역에 마련된 고아원에 맡겨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우랄 산맥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눈 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이들의 목적지는 바로 동구권이었다.

프로파간다로 시작된 '위탁 교육'
 
 <김일성의 아이들> 스틸컷.

<김일성의 아이들> 스틸컷. ⓒ 박장식

 
수천 명의 아이들이 비좁은 시베리아 횡단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렇게 달리기를 몇 주째, 아이들은 불가리아와 헝가리, 폴란드와 같은 동구권의 국가에 도착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위험한 북한 대신, 비교적 안전한 유럽 현지에서 '위탁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라는 것이었다.

이 일을 기획한 건 당시 동구권에 강한 영향력을 부여했던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었다. 동족산잔이던 6.25 전쟁의 전쟁고아를 돌봐주는 유럽인의 모습을 통해 '공산주의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프로파간다였던 셈이다. 그래서 70년 전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야기는 영상으로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영화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고아들이 열차에 오르던 풍경을 비추고, 이들이 루마니아와 헝가리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의 생경한 모습을 뒤로 하고 아이들이 전쟁을 피해 적응하고, 함께 체육활동을 하고, 수업을 듣는 모습도 흐른다. 북한의 아이들과 동유럽의 아이들이 함께 수업하고, 뛰어노는 모습도 화면에 나온다.

당시의 유럽 아이들은 이제 주름이 지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카메라 앞에 선 그 노인들은 한글로 된 노래를 불렀다. '백두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된 노래엔 '김일성 장군 만세'란 구절까지 나온다. 북한 아이들이 7년 동안 부르던 '김일성 장군의 노래'인 것이다. 

생이별을 부른 동유럽의 민주화,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의 아이들> 스틸컷.

<김일성의 아이들> 스틸컷. ⓒ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전체주의의 물결이 온 동네를 뒤덮었던 동구권이고, '당'이 사람보다 앞선 때였지만, 그럼에도 삶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북한 어린이들이 타국의 말을 배우기도 전에 우정은 싹텄고, 사제지간에도 우애가 생겨난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배우자, 사랑이 피어올랐다.

아이들만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성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사랑이 피어올랐다. 아이들에게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려 함께 루마니아로 왔던 조정호씨는 동료 교사 미르초유 사이에서 사랑이 싹텄다. 결국 당국의 허가를 얻어 결혼까지 허락받고 함께 딸을 낳았다. 이런 커플이 공식적으로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끼리는 스포츠를 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말을 배우면서 알아가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에는 '외국인과의 결혼 금지'라는 조항이 있었지만, 사랑과 우정은 국경과 악법마저도 넘어섰다. 함께 배구를 하고, 서로의 집에 놀러가고, 수업을 하면서 장난을 치다가 친해졌고, 어쩌다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 동유럽에서 지낼 것만 같았던 아이들의 상황이 바뀌었다. 1950년대 중반 헝가리의 민주화 항쟁으로 동구권에서도 민주화 열풍이 불타오른 것이다. 1956년 김일성이 불가리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친소파와 친중파가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적발된다. 김일성이 '외국 물을 먹은 이들'에게 공포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아이들은 북한으로 차례차례 송환되기 시작했다. 다시 시베리아를 넘어 돌아가는 기차의 창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끼리는 잡은 손을 놓지 못했고, 사랑했던 이들은 이별의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돌아가서 편지를 보내자고 했지만, 편지는 1961년 이후 북한의 검열 속에 완전히 끊겨버리고 말았다. 

이 아이들에게, '고향의 봄'은 무엇이었을까
 
 <김일성의 아이들>을 제작한 김덕영 감독이 평창국제평화영화제 GV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김일성의 아이들>을 제작한 김덕영 감독이 평창국제평화영화제 GV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 박장식

 
이별을 예감했는지, 현지에도 북한 어린이들이 남긴 흔적이 적지 않다. 이들이 다녔던 학교에는 '푸른 눈의 사람들이 보내준 감사를 잊지 못한다'는 현판이 출입문 옆에 있고, 학교 가까이 숲에는 이들이 이름을 남겼던 오벨리스크와 기념비가 곳곳에 있다. 기념비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한글로, 알파벳으로 그어졌다.

전쟁통 속에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북한의 전쟁 고아들은 이후 루마니아를, 헝가리를, 폴란드를 또 다른 자신들의 고향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후 그들은 7년 동안 새로이 꾸렸던 삶의 터전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고향을 잊지 못해 채소를 직접 길러다 김치를 담가먹었던 아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북한에 남아있을까.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온 '고향의 봄'이 말미에 가사 없이 흘러나왔다. 파란 눈의 친구들이 '그립다,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면서 북한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는 장면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들에게 '고향의 봄'은 강제로 '갈 수 없는 새로운 고향'을 그려내게 된 실향곡인 셈이다.

김덕영 감독은 "원래 제목을 '두 개의 고향'으로 지으려고 했다. 이 아이들은 두 곳의 고향 중에서도 한 곳을 잃어버린 실향민인 셈이니 그렇다. 그것도 체제에 의해서 강제로 이별된 것 아닌가"라면서 "보통은 남북의 '이산'만을 생각하지만, 이 아이들 역시 전쟁이 낳은 이산이라는 점에서 고향의 봄을 두 번 선곡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우리는 북한, 혹은 통일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질문 없이 살았다. '북한은 이상한 나라'로 규정도 했다. 취재를 하면서 이 일이 단지 과거의 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지금 우리를 규정짓고 있는 역사임을 느꼈다"라면서 "이 자료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2020 평창국제평화제에서 관객들과 처음으로 만난 <김일성의 아이들>은 오는 25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과거 반공교육을 할 때와 달리 요즘은 북한에 대한 많은 사실이 대중에게 전달되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또 익숙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다시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일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 남북관계 영화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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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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