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윤복, 유리. 학대받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영화나 드라마 속 아이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며칠 전 여행 가방에서 심정지 상태로 사망한 채 발견된 아홉 살 아동의 사망 원인이 부모의 학대로 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아이의 부모는 한 달 전에도 학대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아이는 학대의 현장인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졌다. 그리고 차가운 주검이 되었다. 이 아이의 죽음은 막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훈육으로 묵과되어온 양육자의 체벌과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사회 시스템 그리고 사람들의 무관심이 공모한 결과였다. 문득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떠올랐다. 이 아이들은 영화나 드라마 속의 가공된 존재들일까. 참혹한 현실은 영화보다 더한 학대의 잔혹사가 오늘도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알람을 울려대고 있다.

영화 <미쓰백>의 지은
  
 영화 <미쓰백> 스틸 컷

영화 <미쓰백> 스틸 컷 ⓒ (주)리틀빅픽처스

 
백상아(한지민)의 눈에 학대당하는 지은(김시아)이 들어왔다. 하지만 자기 앞가림도 힘든 하루살이 인생 상아는 이를 외면해보려 한다. 지은을 학대하는 친부 수장(김일곤)과 계모 미경(권소현)에게 은근한 경고를 보내보지만, 그 누구도 아닌 상아 따위의 경고를 인면수심의 인간들이 아랑곳할 까닭이 없다. 위태위태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지은은 마침내 탈출을 감행한다. 이런 지은에게 상아는 배운 거 없고 가진 거 없는 밑바닥 인생이지만 이런 자신도 괜찮다면 "지켜줄게"라고 약속한다. 지은의 그 누구도 아닌 상아는 왜 이런 약속을 해야 했을까.
 
상아 역시 학대받은 아이였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자신을 학대한 엄마를 지워내지 못하고 그 상처로 아직도 아프다. 그런 상아에게 지은은 곧 지난날의 자신이었을 것이다. 지은을 학대 속에 내버려 둔다는 것은 자신을 지옥에 봉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렵게 구출에 성공하지만, 문제는 구출 이후다. 자신의 학대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운 미경은 지은과 상아를 집요히 추적한다. 계모가 이토록 그악을 떨 동안 친부는 뭘 하고 있었을까.
 
그는 게임 중독자다. 어쩌다 게임중독자와 미경이 함께 살게 되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인생은 본래 사악하고 한심한 존재들인 양 등장한다. 정말 그럴까. 악인은 본래 악인이기에 아이를 학대하는 걸까. 단지 친부와 계모가 악인이었기에 지은이 학대당한 것이라 단정하면, 사회는 편안해진다. 일부 악인의 일탈로 범죄를 몰아가면, 나만 그 불행에서 비껴가면 된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그럴 수 없다. 지은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우리 또한 안전망의 부재로 덮치는 위험을 자신만의 노력으로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주조한 주술대로, 성악설과 성선설이 세상을 가르는 전부라면, 제도와 법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위기에 처했던 지은의 원 가족은 사회로부터 어떤 조력을 받았을까. 지은의 친부인 일곤이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 원만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어떤 조처를, 지은의 생모가 아이를 두고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어떤 제도적 구제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

이 위기의 부모가 삶의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지은의 원 가족은 지켜졌을지 모르고, 지은의 불행 역시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를 악마 부모의 악행으로만 치부한다면, 우리 사회는 너무나 무능하다. 지은에게 그 누구도 아닌 상아가 그 아이를 구해낼 동안 법과 제도는 무엇을 한 것일까. 아이의 행불행이 의로운 한 사람의 선의에만 기대는 것이라면, 법과 제도는 스스로의 무능을 고백하고 마는 꼴이다. 
 
드라마 <마더>의 윤복
  
 tvN 드라마 <마더> 포스터

tvN 드라마 <마더> 포스터 ⓒ tvN

 
윤복(허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기 이전, 혜나는 친모 신자영(고성희)와 계부 이설(손석구) 사이에서 학대당하며 산다. 자영은 어린 나이에 혜나를 낳고 혜나 아빠에게 버림받았다. 혼자 먹고살아야 하는 싱글맘 자영은 어린 혜나를 방치할 수밖에 없다. 게다 싱글맘이라는 오명은 그 자체로 수치이기에, 이 주홍글씨를 떼기 위해 남편이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상가족 혹은 남자 없는 못난 여자라는 콤플렉스에 대한 집착은 이설의 가학적 취향에 눈 감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영은 애초 틀려먹은 어미였기에 학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가 홀로 고립된 채 힘겹게 혜나를 양육할 동안, 법과 제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자영에게 돌을 던지기 앞서 우리는 이에 대해 먼저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 초등학교에서 수진(이보영)은 따돌림 당하는 혜나를 발견한다. 피해를 당하면서도 혜나는 "전 괜찮아요"를 연발한다. 보통의 아이라면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상황을 괜찮다고 하지는 않을 터, 수진의 렌즈에 혜나가 포착된다. 혜나는 여행 캐리어에 자주 감금된다.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방편이 없는 혜나는 캐리어 안에서 혹시, 자기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기다렸을까. 혜나가 의로운 누군가에 의해서만 구해질 운명이라면, 사회의 법과 제도는 무슨 효용이 있는 것일까.
 
게다 자영은 아이를 혼자 낳고 키울 동안 혜나의 아버지인 친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싱글맘의 대부분이 이른 출산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미혼모라는 사실과 아이의 출산 이후 아이 아버지와 관계가 단절되고 아이의 양육비 또한 한 푼도 조력 받지 못한다는 이 엄혹한 현실은, 싱글맘 미혼모의 삶을 쉽게 폄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사회가 허울뿐인 정상 가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미혼모를 결손가정이 아닌 정상가족의 범주에 편입시켜 한 가정으로 잘 살아갈 수 있게 조력했다면, 아이의 양육 현실은 현격히 달라졌을 것이다.

홀로 씩씩히 아이를 키워내라는 주술을 강요하거나, 백마 탄 왕자의 구원으로 정상가족에 편입하는 것이 미혼모의 행복이라는 고루한 관념이 여전히 미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혼모 자영과 그의 아이 혜나에겐 함께 돌봐줄 사회가 필요했다.
 
법과 제도에 기대 수진과 혜나가 가족이 되어보려 하지만 사회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의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 위기의 혜나는 죽을 것이다. 혜나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수진은 혜나의 엄마가 되어 탈출을 감행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이름을 윤복으로 바꾼 후 먼 나라로 떠나기 위해 잠행을 시작한다.

엄동설한에 쓰레기 봉지에 담겨 밖에 놓인 채 동사할 위기에 처했던 윤복은, 누가 자신을 지켜줄 사람인가를 동물적 감각으로 깨닫는다. 수진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된 윤복은 수진을 엄마로 승인하고 끝까지 그 승인을 철회하지 않는다.

윤복은 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가 아무리 강한 아이였다 하더라도, 수진이 캐리어에서 그 아이를 꺼내지 않았다면 윤복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윤복이 학대당해왔다는 정황은 이미 포착되었고 윤복의 담임 교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두 모른 체했다. <미쓰백>의 지은처럼 이번에도 의로운 의인인 수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 아이를 구해낼 수 있었다. 이 천운에 가까운 우연이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유일한 구원책이라면, 이 사회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영화 <어느 가족>의 유리
  
 영화 <어느 가족> 스틸 컷

영화 <어느 가족> 스틸 컷 ⓒ 티캐스트

 
학대당하는 유리(사사키)는 아파트 베란다가 방이다. 거의 매일 그곳으로 쫓겨나고 아주 춥거나 더워도 그곳에서 견뎌야 한다. 어느 추운 밤 베란다에서 떨고 있던 유리는 오사무 시바타(릴리 프랭키)에게 발견된다. 그날 밤의 발견 이후로 추운 베란다에서 구출된 유리는 시바타 가족의 집에서 살게 된다. 정작 놀랄 일은 유리를 원 가족이 전혀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없어져도 그만인 아이와 그 부모가 대체 무슨 가족이라는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정상 가족이라고 부르는 허명의 실체다.
 
학대로 상처받은 유리를 시바타 가족들은 따뜻이 회복시킨다. 회복된 유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식구들과 강한 친밀함과 푸근함을 나누며 살게 된다. 그러면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 가족은 가족이 아닐까. 각각의 아픔을 안고 모여 살게 된 어느 가족은, 생활이 넉넉지 않아 좀도둑질로 연명하는데, 이 부분은 윤리적 논란을 일으킨다. 친부모라면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시키겠냐는 세간의 영화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말 그럴까.

아이를 방치하는 것도, 아이를 (성적) 학대하는 것도, 아이가 알바로 겨우 벌어온 용돈을 갈취하거나 아이를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도 친부모라는 사실은, 친부모를 윤리적이라 상정한 위의 주장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내보이고 만다. 친부모는 그 자체로 획득되는 자녀 사랑 혹은 올바른 양육의 면허증이 전혀 아니다.
 
이 가족은 결국 유리를 납치했다는 신고로 종말을 맞게 되는데, 그래서 부모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리는 행복해졌을까. 유리는 여전히 베란다에 방치됐고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학대의 공포에 떨고 있다. 법과 제도는 오히려 유리가 마지막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말았다.

아이가 학대로 위기에 처해있어도 적실한 도움의 눈길에 포착되지 않는 한, 아이는 불행한 채로 살아가거나 죽는 운명에 처한다. 학대 신고를 받고도 아이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학대하는 부모에게 다시 돌려보내는 법이 현실이지 않은가. 아직도 훈육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의 매'가 공인되는 사회적 폭력에 아이는 맨몸으로 홀로 던져져 있다.
 
죽은 아이들에게 이런 말 하기도 미안하지만, 더 늦지 않은 조처가 시급히 있어야 한다. 학대 사망 사건이 일어나면 수선을 떨며 우르르 일제 조사를 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실효적인 보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아이를 때려도 허용되는 민법의 친권에 기반한 징계권은 하루빨리 철폐되어야 한다. 친권은 양육자의 권리가 아니라 책무다.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은, 윤복, 유리가 더 이상 한 사람의 선의로 구출되어서도 안 된다. 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보이게 하기'위해 사회는 마땅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아동학대 미쓰백 마더 어느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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