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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경찰의 흑인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경찰의 흑인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이날 프랑스에서도 과거 경찰에 연행돼 숨진 흑인 청년 사건에 경찰의 책임을 묻는 시위가 벌어졌다.
▲ 프랑스에서도 "경찰의 흑인 폭력" 항의 시위 열려 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경찰의 흑인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경찰의 흑인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이날 프랑스에서도 과거 경찰에 연행돼 숨진 흑인 청년 사건에 경찰의 책임을 묻는 시위가 벌어졌다.
ⓒ 파리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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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50만이 채 안 되는 중소 도시인 영국의 브리스톨(Bristol)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벌이던 군중이 콜스톤(Edward Colston, 1636-1721)의 동상을 강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졌다. 브리스톨 중심가에 있던 콜스톤의 동상은 캐시디(John Cassidy, 1860-1939)의 작품으로 1895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는 흑인만이 아니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단순히 인종차별 반대만을 생각하고 여기에 참여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더 근본적인 분노 곧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이들의 가슴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군중이 왜 하필 콜스톤의 동상에 분노를 표출한 것인가? 그의 동상이 브리스톨에 세워진 이유는 학교, 구호소, 병원, 교회 등을 지어 이 도시에 기부한 '자선가'였기 때문이다. 역사가인 휴선(David Hughson, 1760-1820)에 따르면 그가 평생 자선 사업으로 지출한 금액은 7만 파운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590만 파운드, 한화로 약 90억 원 정도에 이르는 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돈의 출처에 있는 것이다. 콜스톤은 1680년 44세의 나이로 당시 아프리카 서안의 금, 은, 상아의 착취와 비인간적인 노예무역을 독점하던 영국 '왕립아프리카회사(Royal Africa Company)'에서 일을 시작, 9년 만에 제2인자의 자리인 부총독에 올랐고, 그후 3년 뒤인 1692년 은퇴하게 된다. 그가 이 회사에 근무하는 12년 동안 약 8만 4천 명의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카리브와 미국으로, 노예로 '수출'되었다. 그들 가운데 약 1만 9천 명이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흑인들은 주로 담배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 노동을 하였다. 아메리카로 이들이 실려 간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들이 일하는 농장의 기후가 아프리카 서안과 유사하여 백인들에 비하여 적응을 잘하고 무엇보다도 노예로 일하는 관계로 생산 비용이 극히 적게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고전적 자본주의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잉여 이익을 남기는 데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콜스톤은 주로 런던에서 일을 하였지만 그의 가족이 브리스톨에 정착하여 사업을 벌여 이 도시와 깊은 연고를 맺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상업과 사탕 정제 사업을 운영하였다. 그 외에도 금융업과 무역에도 손을 대었다. 이러한 사업을 통하여 콜스톤과 그의 가족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이다. 돈이 되는 일이면 고리대금도 마다하지 않은 집안이었다.

콜스톤은 성공회 신자이면서도 매우 엄격한 고교회파(High Church)에 속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전통 형식을 매우 중요시하며 근대화를 극도로 반대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 이른바 수구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공회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보수 가톨릭의 전례를 매우 선호하였다. 참고로 오늘날 성공회 안에서 이들과 맞서는 파벌을 지칭할 때 저교회파(Low Church)라고 부른다. 저교회파는 형식주의를 혐오하여 성직자의 권위를 별로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복음을 강조한다. 그에 비하여 고교회파는 가톨릭의 보수성을 매우 선호하고 있다.

그러한 보수적인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콜스톤은 자신의 종교관과 정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세운 자선 기관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그는 선별적 자선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현재 영국의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Tories)을 강력히 지지하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아일랜드어로 불량배를 의미하는 '토리(Tory)'에서 나온 토리당의 무리들은 가톨릭 신자였던 제임스 2세 국왕의 추대 세력으로 집결한 이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지지 계층은 전통적인 대지주들로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부르주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근대 무역과 상업으로 거부가 된 콜스톤이 지주 계급과 한 무리가 된 것은 특이한 일이다. 게다가 노예 매매에 깊이 관여한 것이 밝혀져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동상을 브리스톨 시내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래서 2018년에는 브리스톨의 노동당 소속 의원인 데보네어(Thangam Debbonaire)가 시의회에 콜스톤의 동상 철거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브리스톨 시에서는 콜스톤의 동상 앞에 그가 보수당원이며 노예상으로서 벌였던 행적을 담은 공식적인 안내판을 설치하려고 했으나 브리스톨 시의회의 보수주의자인 에디(Richard Eddy) 의원과 한때 콜스톤도 회원이었던 상업모험가회(Society of Merchant Ventures)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된 바가 있다.

그러다가 일견 플로이드에 대한 인종차별적 살인과 무관해 보이는 '자선가' 콜스톤의 동상이 결국 2020년 6월 7일 플로이드와 관련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서 마침내 무너지게 된 것이다. 어쩐지 이는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누가 알겠는가? 플로이드의 먼 조상이 바로 콜스톤이 아프리카 서부에서 미국으로 '수출'한 무고한 이들 중 한 명일지.

태그:#콜스톤 동상, #노예무역, #인종차별, #플로이드, #자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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