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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을 나와 라파예트 공원을 지나 '대통령의 교회'로 불리는 인근 세인트 존스 교회로 걸어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옆의 건물 벽에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의 낙서가 적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을 나와 라파예트 공원을 지나 "대통령의 교회"로 불리는 인근 세인트 존스 교회로 걸어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옆의 건물 벽에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의 낙서가 적혀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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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는 백인이고 상류층이고 대통령이긴 해도, 미국 흑인들보다는 까마득한 후배다. 그의 할아버지인 프레더릭 트럼프가 미국에 이민한 것은 1885년이다. 독일인인 할아버지의 원래 성은 드룸프(Drumpf)였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고자 독일식 성인 드룸프를 버리게 됐다.

이 가문이 아메리카대륙에 정착한 1885년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을 한 지 22년 뒤였다. 링컨은 남북전쟁 중인 1863년 1월 노예해방선언을 단행하고 약 310만 명의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다.

그렇다고 흑인 차별이 종식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흑인의 지위가 이전보다 한 단계 진일보한 상태에서 트럼프 집안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터를 잡았다. 1885년은 미국 백인이 흑인 문제를 어느 정도 봉합한 뒤 인디언과의 전쟁까지도 대략적으로 마무리한 시점이다. 이 시점에 이민 갔으니, 트럼프 가문은 미국 흑인들보다 까마득한 후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선배들'을 상대로 막말을 퍼붓고 있다. 최근 그는 흑인 시위대를 폭도로 부르고 있다. 연방군 투입을 예고함은 물론이고, 근거도 없이 시위대를 '좌파'나 '외부 세력'과 연계시키고 있다. 워싱턴 시각으로 1일 열린 주지사들과의 화상 회의에서는 폭력적인 일부 시위대를 상대로 '인간 쓰레기'라는 말까지 내뱉었다.

또 '시위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얼간이로 보일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흑인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얼간이로 보일 거라는 발언은 그의 지도자 품격뿐 아니라 평소의 관점(觀)까지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과연 흑인을 같은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의심케 하는 발언도 있었다. 지난 5월 29일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남긴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도 시작된다'는 글귀가 그것이다. 이 때문에 트위터 측이 "폭력을 미화하는 행위"라며 그 글을 감추기까지 했을 정도다.

흑인들보다 훨씬 늦게 정착한 이민 3세 트럼프가 선배들을 저처럼 천시하는 것은 미국의 흑인 인권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된 해는 고종 임금의 전임자인 철종이 있을 때였다. 그렇게 오래 전에 노예해방선언을 해놓고도,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인권 탄압을 여태까지 자행하고 있으니, 새삼스레 놀라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와 백인들의 그 같은 태도로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은, 흑인 문제가 백인 정치권력의 의지만으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버락 오바마가 3선 금지 관행을 깨고 몇 번 더 집권한다 해도, 앵글로색슨족과 유대인이 이끄는 백인 지배체제 하에서는 근본적 해결이 쉽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들은 노예제를 정말 반대했을까

이 문제가 백인 지배층의 시혜적 결단에 의해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점은, 흑인노예들의 친구였던 링컨과 그 지지자들의 한계점으로부터도 드러난다. 링컨은 노예 해방론자로 불리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 점은 남북전쟁 1년 전인 1860년 대통령선거 때의 분위기에서도 증명된다. 노예제도가 최대 이슈가 된 그해 대선의 논쟁점은 '노예제를 유지할 것이냐 폐지할 것이냐'가 아니었다.

쟁점은 '노예제를 확대할 것이냐 아니냐'였다. 공화당 후보인 링컨은 후자 편에 섰다. 그는 노예제 확대를 반대했다. 그가 반대한 것은 노예제 자체가 아니라, 노예제의 확대였다. 경쟁자인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라스는 '노예제 확대를 막지 말자'는 주장을 내놨다.

링컨의 기본 입장이 노예제 폐지가 아니라 존치였다는 점은 1860년 2월 27일 뉴욕 맨해튼의 사립대학인 쿠퍼 인스티튜트에서 진행한 강연회에서도 입증된다. 이때 그는 "우리는 노예제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상태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며 "이 나라에 노예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한 부득이함 때문에 그 정도의 양보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노예제를 필요악으로 간주한 것은 링컨뿐만이 아니었다. 북부 사람들 대부분 그랬다. 그들은 노예제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링컨이 노예제 확대를 반대한 것은 어느 정도는 흑인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농업 중심의 남부 경제를 이기기 위한 전략적 목표 때문이었다.

북부 입장에서는 관세정책을 비롯한 각종 경제정책을 북부 공업지대에 맞게 운영해야 했다. 그러자면, 남부 자본가들의 발언권을 떨어트리고 그들의 이윤 추구에 타격을 줄 만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부의 농업 자본가들은 노예 노동을 기초로 이윤을 획득한 반면, 북부의 공업 자본가들은 자유 노동자들의 노동을 기초로 이윤을 획득했다. 그래서 북부 자본가 입장에서는 일반 대중이 노예 노동자가 되기보다는 자유 노동자가 되는 게 훨씬 유리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의 상공업 부르주아들이 귀족주의 구체제를 혁파하고자 한 것도 '귀족 영주 대 농노 노동자'를 축으로 하는 중세적 봉건질서를 완전히 도태시켜야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제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예노동을 감소시키기 위한 북부의 운동은 자신들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노동자 예비군을 확보하는 동시에 남부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흑인 노동력은 남북전쟁 뒤 남부에서 북부로 점차 이동했다. '아침에 눈 떠 보니 우리 집 주위가 새까맣게 됐다'는 말이 북부 백인들 사이에서 유행했을 정도로, 남부의 노예 노동자들은 북부의 자유 노동자들로 서서히 변모해갔다.

북부 백인들의 흑인 인권운동이 북부의 경제적 목적을 위한 일이었다는 점은 1863년 노예해방선언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전투력이 남부를 제압할 정도가 못 됐다면 북부가 애초의 목표(노예제 확대 반대)를 벗어나는 노예해방선언까지 내놓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이처럼 북부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흑인 문제가 취급됐기 때문에, 남북전쟁 이후에도 흑인 인권이 비약적으로 신장되는 데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에 맞춰서, 미국 자본주의의 수용 가능 정도에 맞춰서 흑인 인권이 혁신적 방식이 아니라 개량주의적 방식으로 점차 개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흑인 인권은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1866년에 의회를 통과한 수정헌법 제14조 제1항이 "합중국에서 출생 또는 귀화하고 합중국의 관할에 속하는 모든 사람은 합중국 및 그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흑인도 미국 시민임을 인정했지만, 흑인의 참정권은 물론이고 기본 인권조차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흑인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1965년 입법이 있을 당시까지도 미국 남부의 상황이 어땠는지에 관해 1968년에 단국대 <법학논총> 제9권에 실린 이영규 교수의 논문 '미국의 흑인 문제에 관한 사적(史的) 고찰과 분석에 대한 일(一)시안(試案)'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 당시 남부 각주에서는 문맹 테스트라고 하여 일정한 시험을 과(課)하여 이에 통과한 자에 한하여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고 투표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백인도 포함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흑인에게 가혹하였기 때문에 많은 흑인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노예해방선언 100주년을 넘긴 뒤에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흑인차별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 공립학교에서 흑·백 학생들을 분리하는 것이 헌법 위반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도 '무려' 1954년이다.

또 그 이듬해에는 쿠바 위쪽의 미국 남서부인 앨라배마주에서 여성이 백인에게 버스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까지 있었다. 임산부나 노약자가 아니라 백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하여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흑인들의 항의운동이 격렬해졌고, 이를 계기로 두각을 보인 인물이 14년 뒤 죽게 될 25세의 청년 목사 마틴 루터 킹이었다.

세계 시민들이 함께 목소리 내야 하는 이유
 
 미국의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가 29일(현지시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시위 현장에 배치된 주 방위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미국의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가 지난 5월 29일(현지시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시위 현장에 배치된 주 방위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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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권과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라고 자부하는 미국에서 남북전쟁 100주년이 다 돼가는 시점은 물론이고 160주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흑인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 이는 흑인들의 투쟁 역량이 아직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실에도 기인하지만, 흑인 편으로 알려진 백인들도 실상은 흑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인 자신들을 위해 흑인 인권운동을 한 데에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링컨을 비롯한 백인들의 흑인 인권운동은 어느 정도는 흑인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백인의, 백인에 의한, 어느 정도만 흑인을 위한 것이고 실은 백인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그런 운동은 한계를 띨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흑인 운동이 그런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미국 흑인들의 상대가 너무나 막강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미국 흑인들을 억누르는 앵글로색슨족-유대인 연합 권력은 미국 흑인들이 홀로 대적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다. 이것이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흑인 인권운동'의 성장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지배권력을 흑인 홀로 상대하기 벅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세계 시민들이 흑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응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이란·중국이 핵무기를 갖고도 상대하기 힘든 대상이 미국 지배권력이다. 그런 미국 지배권력을 흑인들이 홀로 상대하는 것은 벅찬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시민들의 지원으로 미국 흑인들이 보다 더 강한 역량을 확보할 때에만, 트럼프 같은 '새까만 후배들'이 '폭도'니 '인간 쓰레기'니 하며 '선배들'을 모욕하는 일도 줄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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