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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난 것은 직장 파티에서였다'라는 아주 평범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서로에게 이끌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순탄한 흐름이다.

자녀들이 행복하게 뛰어놀고 무럭무럭 자라는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이 두 남녀의 이야기는 그 이후로도 특별할 것 없다 싶게 전개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은 해리엇이 다섯째 아이 '벤'을 낳은 후부터다. 벤은 다운증후군이다.

"이 가족의 생활 패턴이 정해졌다. 그리고 미래의 패턴도 그럴 것이었다."
- <다섯번째 아이> p.145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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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하고 다복했던 이 가정의 분위기는 '벤'의 출연 이후 완전히 뒤바뀐다. 벤의 거칠고 돌출적인 행동에 가족들은 모두 벤을 피하고 꺼린다.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만 하는 유일한 사람은 엄마인 해리엇이다. 남편인 데이비드마저 자신의 아이들은 '정상인 4명의 자녀뿐'이라며 벤을 외곽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낸다.

말이 요양원이지, 작품 속에 표현된 요양원의 실상은 수용자들을 약물로 마취시켜 반가사 상태로 만들어놓고 그저 숨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정신병동이다. 주로 기형아, 정신병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이니 오죽할까.

벤이 요양원으로 떠난 뒤 가족은 활기를 되찾는다. 주변 사람들과 파티도 하고, 가족 모임도 하고, 4명의 자녀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해리엇만이 그러지 못했다.

해리엇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다 남편 몰래 요양원으로 벤을 만나러 간다. 그곳에서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있는 벤을 보고,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벤을 데리고 나온다. 그것은 금기였다. 벤을 다시는 집에 발붙이게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남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모성'이라는 이 모진 책임감

벤을 다시 데리고 온 해리엇의 모성을 가늠해본다. 약물에 취해 곤히 잠자고 있는 벤을 보며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으리라. 엄마인 자신마저 이 아이를 외면하면 안 된다는 애틋하면서도 모진 책임감. 세상 사람이 다 외면해도 엄마인 내가 이 아이를 보듬고 껴안아야 한다는 무한 책임감. 모성이라는 것은 본성일까 아니면 학습된 책임감일까.

집으로 돌아온 후 전쟁은 시작되고, 해리엇은 벤과 사투를 벌인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4명의 자녀들은 외지로 학교를 가거나,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집으로 가는 등 나름의 이유를 대며 집을 떠나고, 남편마저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줄어든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가정을 꿈꾸며 구입한 대저택에는 오로지 벤과 해리엇이 덩그러니 남아 서로를 감시하고 미워하고 으르렁댄다.

해리엇은 사람들이 벤을 피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느낀다. 자녀 4명을 낳아서 키우는 동안에는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벤'이 태어난 이후에는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심지어 벤이 장애인으로 태어난 건 엄마인 자신의 책임이라는 인식에 해리엇은 괴로워하고 부당해한다.
 
'이건 정말 희한해요. 이전에 아무도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네 명의 정상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멋진 아이들을 갖다니 넌 정말 똑똑하구나! 그 애들은 모두 네 덕분이야. 훌륭한 일을 해냈어, 해리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말을 안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 – 전 그저 죄인이죠!' (p.140)
 
작가 도리스 레싱은 해리엇이 벤을 임신했을 때 느꼈던 공포와 고통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심지어 해리엇은 초산도 아니고 다섯 번째 임신임에도 불구하고 벤을 잉태한 순간부터 뱃속에 괴물이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벤'의 존재에 대한 복선이다.

그러나 사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임산부 시절, 그 공포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제대로, 죽지 않고 잘 낳을 수 있을까'라는 출산에 대한 불안함부터 '내 뱃속에 들어있는 게 사람 새끼가 아닌 이상한 동물이나 생물 덩어리이면 어떡하지?'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까지.

실제로 나는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개구리같은 이상한 파충류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한한 상상으로 악몽을 꾸기도 했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왠지 입 밖으로 꺼내면 부정탈까 봐 두려웠고, '에미가 별 소리를 다한다'며 자격미달의 눈으로 사람들이 바라볼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를 잉태한 엄마가 흔들의자에 앉아 마냥 숭고하고 평화로운 눈길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풍경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일 뿐이다. 임신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 또는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 남편 데이비드처럼.

벤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데이비드의 이상이 실현되는 듯 했으나 벤의 존재 앞에서 데이비드는 도망쳤다. 벤을 치워놓아야 자신이 생각했던 완벽한 가정이 이뤄지니까. 오로지 엄마인 해리엇만이 그 무게를 견디고 감내해냈다.

데이비드는 해리엇이 벤을 낳고 피임을 하자, 해리엇의 행동을 죄악시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자녀를 거부하고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리엇은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들은 다시 성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전 같지는 않았다. "이게 바로 피임법이 발견되기 전에 여인들이 느끼던 감정일 거야" 해리엇이 말했다. "공포 그 자체, 매번 그들은 월경을 기다리다가 그것이 오면 한 달간 처형 연기를 받는 거야. 하지만 그 여자들은 괴물을 낳을까 봐 겁내지는 않았겠지' (p. 88)
 
장애인 자식을 낳은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소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장애인 자식을 낳은 책임은 그 엄마에게 있는가? 그리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안쓰러워하면서도 힘겹게 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모성은 거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쉽게 결론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좀 더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또 하나. 이 소설에서는 다섯이나 되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해리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친정엄마 도로시가 있다. 도로시는 해리엇이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이 힘든 일임을 알기에 해리엇의 다자녀 출산을 만류한다.

데이비드처럼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단꿈에 젖어있던 해리엇은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다. 결국 해리엇 곁에서 벤을 끝까지 함께 돌보는 사람은 남편이 아닌 친정엄마다. 늙은 친정엄마들의 보이지 않는 가사, 육아 노동을 이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다.

장애인 자녀를 낳은 책임은 엄마가 져야하나, 아빠가 져야하나... 이런 이분법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좀더 깊은 담론들이 필요하다. 모성이라는 책임감, 장애인 자녀에 대한 책임, 자녀에게 애틋함을 느끼는 엄마와는 반대로 엄마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차갑고 냉혹한 눈빛을 지닌 자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 등. 부피는 얇지만 질량감은 꽤나 묵직한 소설이다.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지은이), 정덕애 (옮긴이), 민음사(1999)


태그:#도리스 레싱, #민음사, #다섯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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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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