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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도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에는 헬기사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탄흔이 남아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도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에는 헬기사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탄흔이 남아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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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을 본다. 나경택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찍은, 지금은 '5.18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그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굉음을 냈을 헬기가 전남도청 상공을 날고 있다. 지금은 매일 오후 5시 18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쏟아내는 시계탑이 말없이, 그러나 굳건히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40년 동안 탄흔을 품어왔던 전일빌딩 꼭대기엔 '해태 아이스크림' 광고판이 우뚝 솟아 있다.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은 몰랐을 거다. 2년 후 자신이 만든 프로야구 판에 '해태 왕조'가 세워지리란 것을. 광주시민들이 '무등(無等, 차별이 없음)'이란 이름이 붙은 야구장에서 김대중의 노래('목포의 눈물')를 부르리란 것을. '내란수괴' 전두환은 몰랐을 거다. 야구선수 김성한과 이종범이 5월 18일만큼은 패배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줄은. 그래서 18년 동안 원정 경기를 치러야 했던 '그날'의 승률이 8할2푼에 달할 줄은.

하찮은 항쟁이 어디 있겠는가. 항쟁에 중심이 따로 있고, 변두리가 따로 있겠는가. 항쟁에 어제가 따로 있고, 오늘이 따로 있겠는가. 지금은 이름이 바뀐 '챔피언스필드' 푸른 잔디 위 야구공에도 누군가는 항쟁의 혼을 담아내고 있지 않겠는가.

지난 18일을 떠올려본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옛 전남도청 앞(5.18민주광장)에서 기념식이 진행됐다. '40'이란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며 경쟁하듯 기사가 쏟아졌다. 광장 곳곳에 차려진 방송사의 스튜디오를 보며 '어디는 얼마가 들었고, 어디는 얼마가 들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반짝이는 스튜디오가 그날 저녁 TV 화면을 장식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5월 19일 다시 찾은 광장은 한없이 고요했다. 천막을 거두는 몇몇의 웃음소리가 오히려 고요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어제 하루는 무엇이었을까. 어릴 적 어디선가 봤던 박제된 호랑이가 떠올랐다. 잔뜩 벌린 입과 그곳에 박힌 날카로운 이빨. 어렸지만 그게 하나도 안 무서웠다. 오히려 그러한 과장된 표정이 박제된 호랑이의 '의미 없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5.18을 그렇게 만들고 있진 않은가.

'박제된 역사'를 거부한 사람들

이혜영의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광주·전남 편>(내일을 여는 책)은 박제된 항쟁의 역사를 거부한다. 5.18뿐만 아니라 광주·전남 지역의 여러 항쟁사가 담겨 있는 이 책에는 땅과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가 함께 스며들어 있다.
 
홍성담 화가도 80년 5월을 겪었다. 20대였던 그에게 5.18의 상징은 보리밥알이다. 홍성담과 한 시민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금남로 골목으로 조심조심 끌어왔다. (중략) 청년의 배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끌려온 것은 창자였다. 그는 이미 죽은 후였다. 작렬하는 태양빛 속에 뭔가가 반짝였다. 위장 속에서 아직 삭지 않은 보리알이었다. 생의 마지막 밥을 그 청년은 어디서 먹었을까. 누군가 건네준 주먹밥을 먹고 거리에 섰을지 모른다. 그 무렵 시내와 가까운 시장과 골목에서 여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먹이고, 시민군 트럭에 실어 보냈다. 주먹밥은 광주시민들이 실현한 '자치공동체'의 상징이었다. - 130쪽
 
"우리도 헌혈하게 해주세요!" 한 무리 여자들의 항의에 의료진이 멈칫했다. (중략) 이 젊은 여인들은 '황금동'에서 왔다. 광주의 대표 환락가였다. 몸을 팔며 도시의 그림자 속에 살던 '황금동 여인들'은 5.18 때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중략) 5.18 자치공동체는 증언할 기회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의 힘으로 지탱되었다. 실제로 넝마주이, 구두닦이, 거지 등 연고가 뚜렷하지 않은 하층민들이 계엄군에 희생된 모습이 무수히 목격됐다. (중략) 역사의 수면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 157~159쪽  
이혜영의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광주·전남 편>
 이혜영의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광주·전남 편>
ⓒ 내일을 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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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발품이 이 책을 지탱하는 힘이다. 5.18 현장 곳곳은 물론이고, 타잔으로 불린 박흥숙의 무등산,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의 전남대, 학원민주화 투쟁의 조선대, 들불야학의 광천동, 여순사건의 여수·순천,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의 함평, 수세거부 투쟁의 나주, 그리고 김대중의 고향 신안·목포까지. 걷고, 머물고, 걷고 머물고. 작가는 이를 반복하며 그 현장에 자신의 시선을 덧댄다.

머무름은 자취를 남긴다. 굳이 '역사란 무엇인가'를 찾지 않더라도, 우린 과거의 자취와 지금 내가 남기는 자취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안다. 그러한 자취들이 모여 미래의 자취를 이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역사가 된다는 것 또한 잘 안다. 우린 사건의 나열을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충실히 수행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어느 하나 하찮게 취급하지 않는다. 저자는 5.18에선 황금동 여성들을, 6월항쟁에선 강상천과 박태영을 소환한다. 이름부터 촌스러운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의 "보편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모두 박제된 역사가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다.

앞서 말했듯, 하찮은 항쟁이 어디 있겠는가. 민주(民主)의 민이 주인 역할 좀 해보겠다는 몸부림에, 지독한 갑을 관계를 온몸으로 청산하려는 몸짓에 누가 점수를 매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용솟음에 주류가 어디 있고, 비주류가 어디 있겠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운 이들에게 '산천이 아는 것' 외에 무엇이 의미가 있겠나.
 
함평 고구마 투쟁은 지역 차원의 피해보상 요구를 넘어 한국 농촌의 거대공룡 농협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보편운동이었다. 1970년대 국민 대다수가 농민이고 농민의 가족이자 친족이었다. 많은 이들이 함평 고구마의 외침에 몸으로 화답했다. (중략) 농협이 다시 단식 지도부를 찾아왔다. "요구하는 309만 원을 모두 주겠다, 대신 명목은 생산장려금으로 하자"라고 했다. 대책위는 단호히 거절했다. "생산장려금이라니! 반드시 고구마 피해보상금이어야 한다." (중략) 당시 신문들은 '단군 이래 최대 부정 사건'이라 불렀다. (중략) 고구마를 끝까지 잡아끌었더니 거대한 부정의 뿌리가 줄줄이 따라 나왔다. 함평 농민들이 기어이 싸우지 않았다면, 18개월 동안 벌어진 정부기관들의 무수한 협박에 굴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 47~51쪽
 
경찰이 달려들려 하자 그는 몸에 불을 붙이고 역 광장 모퉁이를 돌아 목포 민정당사를 향해 뛰었다. (중략) 그는 (1986년) 6월 25일 결국 숨을 거뒀다. 강상철 열사. 24세. 1987년 6월항쟁의 전주곡은 1986년 전국적인 개헌서명 운동이었다. (중략) 대통령 선거일을 1주일 앞둔 1987년 12월 9일이었다. 목포대학교 후문에서 한 청년이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을 시도했다. (중략) 다음 날 사망하고 말았다. 박태영 열사. 21세. 24세 강상철이 목포 6월항쟁의 서막을 열며 산화했고, 21세 박태영이 목포 6월항쟁의 마지막을 두드리며 떠났다. (중략)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중략) 목포의 6월은 어떤 빛깔일까. 나는 보라색을 떠올려본다. 냉철한 파랑, 열정의 빨강이 섞여 서늘하고 시린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 같다. - 257~263쪽
 
"당신의 역사는 언제 시작됐습니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당신의 역사는 언제 시작됐습니까"라고 묻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삶이라는 개울이 거대한 역사의 바다와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자각한 계기"를 질문한다.

1976년 광주 태생인 저자는 학창 시절 3.1, 4.19, 5.16, 5.18, 6.10, 10.26, 12.12를 비밀번호 외우듯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때를 떠올린다. 동시에 서울살이를 시작한 대학생이 되어 5.18 기록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마주했을 때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후자를 "나의 역사가 시작되는 새벽"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독자에게도 '나의 역사'를 곱씹을 수 있는 힘을 선사한다. 특정한 사건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나의 역사는 언제 시작됐는지' 되묻게 한다. 때문에 내가 딛고 있는 땅과 내가 마주하는 사람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땅, 그리고 사람과 어우러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거룩하게 다가온다. 그게 이 책이 지닌 힘이다.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 광주·전남 편 - 나를 만든 현대사, 그날의 함성 속으로

이혜영 (지은이), 내일을여는책(2020)


태그:#이혜영, #민중항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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