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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공 정부의 국제그룹 강제해체가 위헌판결이 난 1993년 7월 29일 오후 양정모 전국제그룹회장이 자신의 국제그룹복권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5공 정부의 국제그룹 강제해체가 위헌판결이 난 1993년 7월 29일 오후 양정모 전국제그룹회장이 자신의 국제그룹복권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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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하면 '학살'과 '탄압'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5·18 광주 학살과 시민·학생 운동 탄압 등이 그의 이름과 함께 연상된다.

그런 이미지와 맞물리는 것 중 하나가 전두환 정권의 기업 괴롭히기다. 재벌을 길들이기 위해 부실기업 정리나 구조조정 칼날을 빼들고, 재벌들을 불러모아 정치헌금을 강요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공중분해시키는 등의 행태가 전두환 정권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기업 탄압의 상징적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양정모 회장(1921~2009년)과 국제그룹의 비운이다.

재계 7위 그룹이 하루아침에 해체

1985년 2월 21일의 '국제그룹 해체', '국제그룹 공중분해'는 전두환 정권의 기업정책을 반영하는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위 날짜 <경향신문> 기사 '국제그룹 주력기업 처분'은 채권은행인 제일은행의 이필선 행장이 발표한 조치를 이렇게 보도했다.

"이필선 제일은행장은 국제그룹이 금융 지원만으로는 정상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 국제상사에서 건설 부문을 분리해 극동건설에 인수시키고, 나머지 신(발)·무역 부문은 한일합섬에, 연합철강과 국제종합기계는 동국제강에 인수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밖의 국제그룹 계열기업 17개는 관련 은행이 전문경영인을 투입하여 철저한 경영관리를 하면서 업체·사주 및 관계 소유인 부동산 등 처분 가능한 모든 재산을 매각, 재무구조 개선에 투입하여 이들 기업의 조기 정상화를 꾀할 계획이다."
 

하루아침에 재계 7위 그룹을 잃어버린 양정모는 그 뒤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랬다가 3년 뒤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권위가 추락한 전두환이 1988년 2월 퇴임하자, 이때부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제그룹 해체가 전두환의 공작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양정모는 그해 4월 1일부터 법정 투쟁에 들어가는 한편, 11월부터 국회 '5공 청문회'를 무대로 국제그룹 해체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그는 전두환이 퇴임 뒤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만든 일해재단(훗날의 세종연구소)에 기부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것이 그룹 해체의 진짜 이유라고 주장했다.

괘씸죄에 걸려 그룹을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9일자 <경향신문> 기사 '전씨가 만찬(에)서 기업 죽일 수도 키울 수도'에 양정모의 청문회 증언이 실려 있다. 괄호 속 내용은 신문에 실린 그대로다.

"84년 5~6월경 모금 액수를 플라자호텔에서 결정한 후 청와대 주최 만찬이 있었다. 만찬 도중 각하께서(의원들이 각하가 뭐냐고 하자, 전 전 대통령으로 수정) 술이 상당히 됐는데(취했다는 뜻), 술이 좀 된 기분으로 대통령이 '내가 기업을 키워주려면 키워줄 수 있고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 그 자리에는 우리나라 10대 재벌 총수가 다 앉아 듣고 있었는데, 가슴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지나 보니,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더라."
 
 1988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 기사
 1988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 기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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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5억원밖에 안 낸 괘씸죄? 

1988년 9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일해 성금액수 밝혀져'에 따르면, 1984~1987년에 기부금을 낸 기업인은 56명이고 총액은 598억 5천만 원이다. 기부 1위인 현대그룹 정주영은 51.5억 원을 냈고, 10위인 쌍용그룹 김석원은 15억 원을 냈다.

양정모가 낸 금액은 '고작' 5억 원이다. 7대 그룹이란 점을 감안하면, 액수가 적은 편이었다. 자신의 기부금이 적은 점과 전두환이 위의 발언을 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양정모는 국제그룹 해체가 경영상의 이유가 아닌 정치적인 이유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양정모의 주장과 배치되는 상황이 존재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그룹이 만기 어음 78장 432억 원어치를 막지 못해 1차 부도를 낸 1984년 12월 27일 이후의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정권의 통제 하에 있었던 금융기관들이 국제그룹 해체 2개월 전부터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마케팅연구원이 발행한 1985년 4월호 <마케팅>에 실린 '국제그룹 해체가 주는 교훈'이란 기사는 그 2개월간을 이렇게 정리한다.

"총선을 앞둔 정부 입장에서는 국제그룹의 부도는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제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을 비롯한 관련 은행들은 단자(短資, 단기성 자금)에서 돌아오는 어음을 막아주기 위해 무려 1380억원을 구제금융으로 내주었고, 85년 1월 6일부터는 단자 보유의 국제(그룹) 어음 1085억 원에 관련 은행이 지급을 보증해 주는 편법으로 부도를 미루어 왔다."

제12대 총선인 1985년 2·12 총선은 민주정의당(민정당) 정권의 노골적인 야당 탄압을 무릅쓰고 정통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올라선 무대였다. 민정당과 신민당의 의석 수는 '148석 대 67석'으로 현저했지만, 득표율은 '35.2% 대 29.3%'로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민정당이 패배한 선거였다. 이를 계기로 야당의 대정부 투쟁과 직선제 개헌운동이 힘을 받고, 이 분위기가 2년 뒤 6월항쟁으로 연결됐다.

총선 직전에 정치권은 분주했다. 신민당이 정권의 견제를 뚫고 창당에 성공한 것도 선거 한 달 전인 1월 18일이다. 꽤 긴박했던 이 상황에서, 민정당 정권은 민심이 야당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런 차원에서 그들은 국제그룹 파산을 막기 위해 대규모 자금을 쏟아부었다. 정권의 경제적 실패를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자금 투입이 있었는데도 국제그룹은 회생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총선이 끝난 뒤인 2월 21일에 국제그룹 해체를 발표했던 것이다. 국제그룹 해체가 괘씸죄 때문이라는 양정모의 말과 달리, 실제로는 막판까지 전두환 정권의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양정모는 일해재단에 5억 원밖에 내지 않아서 미움을 샀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도 직전의 국제그룹이 전두환 정권에 기부한 금액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이 점은 '양정모가 10억의 별도 기부금을 익명으로 일해재단에 냈다'는 의혹이 제기된 1988년 하반기에 드러났다. 그해 9월 27일자 <경향신문> 기사 '양정모 씨, 일해 10억 기부 사실과 다르다'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김중권 5공 특위 민정당 측 간사는 27일 '양 전 국제그룹 회장이 84년 10월 20일 일해재단에 10억원을 익명으로 기부한 것으로 발표했던 것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양 전 회장의 주장대로 그는 84년 12월 10억원을 새마을성금으로 기부했다'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1981년부터 전두환 동생인 전경환 사무총장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이 단체는 전두환이 정치자금을 받는 통로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 직전의 양정모가 기부한 새마을성금은 순수한 의미의 성금이라 보기 힘들었다.

이 성금 10억과 일해재단 기부금 5억을 합치면 총 15억이 된다. 15억이란 금액은 일해재단 기부금 랭킹 10위인 쌍용그룹 김석원의 기부금과 같은 액수다. 국제그룹의 규모와 비교할 때 그리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정치자금을 적게 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기업을 빼앗겼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물론 전두환이 양정모를 특별히 좋아했다면, 그런 식의 과감한 공중분해가 없었거나 아니면 미뤄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의도적으로 공중분해를 시켰다고 보기에는 객관적 상황이 양정모에게 상당히 불리하다. 전두환 청문회가 열릴 당시의 격앙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양정모가 청와대 만찬 발언을 거론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양정모의 주장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됐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의 '기업사채 전면동결'은 결국 독이었나

하지만 국제그룹을 망친 정치지도자는 분명히 있었다. 그는 전두환은 아니었다. 국제그룹의 몰락을 초래한 그 지도자가 누구인지는 이 그룹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국제그룹 창업자는 양정모의 아버지인 양태진(1901~1976년)이다. 양정모는 1921년에 부산에서 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무신 공장, 정미소, 목재회사를 운영했던 양태진은 부산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아들 양정모와 함께 이승만 정권 출범 이듬해인 1949년 12월 국제화학을 세웠다.

이때 이 회사가 내놓은 주력 상품은 왕자표 고무신이다. 임금님 아들이란 의미의 왕자(王子)표가 아니었다. '임금 된 자'를 뜻하는 왕자(王者)표였다. 이 고무신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히트를 쳤다. 이에 힘입어 양태진 부자는 신발업계에서 임금님 아들이 아니라 임금님 지위에 올랐다. 이를 발판으로 10여 년이 흐른 1960년경, '국제'는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1967년 9월 5일자 <매일경제>에 실린 왕자표 고무신 사진.
 1967년 9월 5일자 <매일경제>에 실린 왕자표 고무신 사진.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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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그룹은 대형 화재의 덕도 많이 봤다. 큰불이 몇 차례 난 뒤에 오히려 기업이 번창했다. 그래서 '불재벌'이란 별명이 붙었다. 불길처럼 활활 성장한 이 회사는 1960년대 후반에는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지게 됐다. 양정모가 기업을 승계한 것은 이 시점이다. 1968년에 양태진이 퇴진하면서 양정모가 국제화학을, 차남 양규모가 진양화학을 물려받았다.

양정모의 경영 스타일은 대담했다. 차입 경영과 시설 확장으로 규모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초반에 이 그룹은 4억3천만 원이라는 사채를 안게 됐다. 그 시절 국제그룹으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금액이었다.

당시 국제그룹이 힘들어진 것은 베트남전쟁과도 무관치 않다. 베트남전쟁이 미국에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미국 경제사정이 안 좋아졌고, 이는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고전하는 원인이 됐다. 이 상황이 한국 대기업들의 자금 운용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룹 승계 몇 년 뒤에 양정모가 위기를 겪은 것은 그의 경영 스타일에 더해 객관적 국제정세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기적이 벌어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요청을 받은 박정희 정권이 1972년에 기업 사채를 동결시키는 초법적 조치를 내놓은 것이다. 1972년 8월 3일자 <매일경제> 기사 '기업사채 전면 동결'은 이렇게 전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2일 하오 11시 40분 헌법 73조에 의거한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발동, 8월 2일 현재의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 정부에 신고케 하고 8월 3일자로 월리 1.35%,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전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바꿀 것을 명령했다."

사채에 시달리던 대기업들을 살리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써 그들은 3년 거치 기간 동안은 빚을 갚지 않아도 됐다. 정부 특혜에 의존하면서 자력 성장을 소홀히 해온 한국 재벌들을 더욱 더 병들고 안이하게 하는 조치가 이런 식으로 취해졌던 것이다.

이 조치는 국제그룹이 사채 위기를 모면하는 데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양정모의 사세 확장이 문어발식 팽창을 지향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됐다. 신발로 시작한 이 기업은 양정모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건설·기계·방직·철강·제지·금융·전자·통신 등으로 마구 확대됐다.

자기 돈으로 하는 확장이라면 모르지만, 남의 돈으로 하는 확장이었다.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대마불사를 믿는 행태였다. 정권이 알아서 뒤처리해주겠지 하는 기대감이 깔린 행동이었다.

양정모는 규모를 키우면서도 종래의 족벌경영을 고수했다. 딸 11명과 아들 3명을 둔 그는 나이 어린 아들들 대신에 장성한 사위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이 때문에 '불재벌'에 더해 '사위 재벌'이란 별명도 생기게 됐다.

차입 경영에 문어발식 확장, 거기다가 족벌경영까지 겹치면서 국제그룹은 서서히 곪아갔다. 그에 더해 계열사인 연합철강의 원래 소유주와도 불화를 겪었다. 또 미국 신발 메이커 나이키에게 국내 시장을 상당부분 잠식당했다. 나이키에 맞서고자 프로스펙스를 내놨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러는 사이, 나이키의 한국 제휴사인 화승이 국제그룹을 제치고 신발업계 강자로 올라섰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국제그룹은 '궁전'을 짓는 데 돈을 쏟아부었다. 28층짜리 호화판 본사 사옥을 짓기 위해 6백억 원이나 끌어다 썼다. 고대 왕국들의 멸망 패턴을 연상시키는 일이었다.

양정모가 위험한 경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1972년 사채동결조치로 도덕적 불감증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남의 돈을 끌어다가 무책임하게 사업을 벌이면서도 '정부에서 도와주겠지'라는 안이한 기대를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국제그룹을 망친 것은 '나는 기업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며 술김에 허세를 부린 전두환보다는, 사채동결조치로 대기업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심어준 박정희 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과의 관계도 원인이 됐겠지만, 전두환한테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두환이 몰락한 뒤에 양정모는 그와의 불편한 관계를 거론하면서 국제그룹을 회생시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여전히 '구식'이었다. 정치권 로비를 통해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백억의 돈을 뿌렸다.

이로 인한 잡음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1997년에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의 그룹 재건 계획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양정모의 실패는 정치권력에 의존해 기업을 키우다가 일이 잘못되면 정권을 탓하는 한국 재벌들의 구태를 반영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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