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장난이 요즘 유행이다. 속칭 '꼰대'라 찍힌 기성세대들의 입에 밴 말버릇, 예를 들면, "나 때는 말이야, 상사한테 말대답은커녕 눈도 못 마주쳤다고"식의 잔소리를 비꼬아 젊은 세대들이 이를 인터넷상에서 풍자하면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엔 온전히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부정적 의미에 유쾌한 발상이 더해져 세상의 변화가 빠르다는 것을 체감할 때, 놀라움을 표하는 말로 더 자주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라떼는 말이야. 라디오가 아주 재미있었다고! 넷플릭스? 그런 건 잽도 안 됐지"처럼 말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는 첫사랑의 수줍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별밤 지기 문세 오라버니'에게 엽서를 띄운다.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시절, 라디오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가 또 웃게 했다가, 혼자 끙끙 앓던 사랑의 열병마저도 살포시 털어놓게 만드는 마법 같은 기능을 했다. 이를테면, '낭만의 창구'였다고나 할까?
 
그때 그 시절 그대로인 박소현의 목소리
 
박소현의 '러브게임' 1999년 이후 2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 '박소현의 러브게임'

▲ 박소현의 '러브게임' 1999년 이후 2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 '박소현의 러브게임' ⓒ SBS

 
고백하자면 내가 드라마 속 '덕선이'보다 어렸을 때, 핸드폰이 보급되기 시작했다(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정말 '옛날 사람'이 된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 그때, 지금처럼 라디오에 문자를 보내면 DJ가 보낸 사람의 핸드폰 뒷번호와 함께 짧은 사연을 읽어 주는 방식이 처음 도입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즈음에 인터넷으로 사연을 올리는 방식이 널리 퍼져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요즘처럼 라디오 부스에서 찍은 영상을 인터넷에 함께 올리는 형태의 '보는 라디오'가 생겨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나는 드라마 속 '덕선이'만 할 때부터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라디오는 내 지루한 출퇴근 길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즈음에는 같이 밤을 새워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제일 즐겨들었던 프로그램은 <박소현의 러브게임>이었다. 최근 그 프로그램이 아직도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한번 들어보았더니 세상에나, DJ의 목소리가 그때 그 시절 그대로다.
 
<박소현의 러브게임>은 1999년에 SBS 파워 FM을 통해 첫 방송을 시작했다. DJ는 탤런트 박소현씨다. 그녀는 2007년 개편 때 프로그램 자체가 갑작스레 폐지되는 고비를 겪기도 했지만 2008년 가을 개편을 통해 보란 듯이 재입성, 지금까지도 매일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청취자들의 '듣는 즐거움'을 책임지고 있다.
 
SBS TV 프로그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의 MC이기도 한 박소현씨는 방송이 1000회를 맞이했던 지난 2018년에 공동 사회자인 임성훈씨와 함께 최장수 단일프로그램 남녀 MC로 '한국 기록원'에 등재되기도 했다. 우스갯말로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방송을 시작한 지 1000회가 넘도록, 변하지 않은 두 MC의 얼굴이라는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정말 그렇다. <박소현의 러브게임>을 '인터넷 다시 듣기'로 틀어 놓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얼굴만큼이나 변하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가 새삼 더 반갑다.
 
수많은 경쟁자 물리치고 당당하게 3등!

내가 <박소현의 러브게임>을 즐겨 들었던 데는 물론 DJ 박소현씨의 편안한 목소리와 능숙한 진행 솜씨도 크게 한몫했지만, 사실 좀 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경품에 당첨되었던 것이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정확한 때는 기억 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이니까, 지금부터 대략 13~14년 전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사연에 고등학교 때 친구와 서울 나들이를 했던 경험을 썼었다. 돌이켜보면, 읍 단위의 시골 태생 '촌년'인 내가 서울에서 난생처음 지하철을 타며 얼마나 어리숙하게 굴었는지를 솔직하게 적은 것이 많은 점수를 얻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내가 보낸 사연은 연말 특별 방송에 소개되었고,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3등을 차지했다.

나는 상품으로 서울 모 호텔의 1박 2일 숙박권을 받았다. 얼마나 좋았던지, 방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단순히 상품을 타게 되어서가 아니라 내가 즐겨 듣던 라디오에서 내가 늘 '언니!'라고 친숙하게 부르던 사람이 거꾸로 내 이름을 불러주고 또 내가 정성 들여 쓴 내 사연까지 읽어 주었다는 사실이 마냥 행복했기 때문이다.
 
<박소현의 러브게임>은 1999년 첫 전파를 탄 이후, 중간에 잠깐 다른 방송으로 대체 되었던 때를 제외하더라도 근 20년을 장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DJ 역시 바뀐 적이 없다. 말 그대로 그냥 '러브게임'이 아니라 <박소현의 러브게임>인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이토록 오랜 세월,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비결은 아마도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DJ의 역할은 단순히 프로그램을 매끄럽게 진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청취자 한 명 한 명이 보낸 사연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하고, 축하하고, 슬퍼하는 데 있다. 당연히 청취자들은 DJ인 박소현씨에게 더욱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 20년을 한결같은 목소리로 정답게 말을 걸어온다면, '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목소리가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1000회를 지켜온 MC 임성훈과 박소현. 두 사람의 전무후무한 기록은 이날 한국기록원에 등재됐다.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1000회를 지켜온 MC 임성훈과 박소현. 두 사람의 전무후무한 기록은 이날 한국기록원에 등재됐다. ⓒ SBS


얼마 전 MBC 라디오의 장수 프로그램 <싱글벙글 쇼>를 진행하던 DJ 강석, 김혜영씨가 동반 하차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강석씨는 1984년부터 김혜영씨는 1987년부터, <싱글벙글 쇼>의 진행을 맡아왔으니 두 사람 다 30년을 훌쩍 넘어 청취자와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어 온 셈이다. MBC 라디오가 '세대교체'란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 개편을 감행하면서 자연스레 DJ의 교체가 거론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오랜 세월, 두 DJ의 목소리와 진행방식에 길들여진 청취자의 입장에서는 허탈한 마음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한동안 청취자 게시판이 두 DJ의 하차에 대한 항의 글로 떠들썩했다니, 어찌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하루아침에 오래된 친구를 빼앗긴 입장에서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려면, 후임 자리를 이어받은 새로운 DJ들이 더 정성스럽게 더 다정하게, 더 오랜 시간 더욱 성실하고 진솔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목소리가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크다. <박소현의 러브게임>이 2007년에 폐지된 이후, 그다음 해 극적으로 부활해 재편성된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것은 어쩌면 DJ 박소현씨가 가진 목소리의 힘이, 청취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녀가 돌아오도록 주문을 걸게 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10년 세월을 훌쩍 넘어 <박소현의 러브게임>을 듣고 있으니, 사회 초년생일 때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다음 기회엔 다시 한번 '사연 뽑히기'에 도전해 보아야겠다. 박소현씨는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상냥하고, 유쾌한 친구이자 언니였던 그녀를. 또 그 시절, 라디오에 사연을 쓰면서 설레던 마음 역시. "라떼는 말이야,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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