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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윤정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만난 친구이다. 18살에 만나 벌써 마흔을 넘긴 나이가 되었으니 우리의 인연은 20여 년을 훌쩍 넘긴 오랜 사이이다.

생각해보면 우린 참 다른 부류였다. 성향도 체형도 스타일도 다른 우리의 공통점이라고는 비슷한 것에 터지는 유머코드 하나 정도랄까? 너무 다른 우리지만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인지, 서로의 팔자에 새겨진 운명인지,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어느덧 25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우리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수능날 점심을 같이 먹었고, 같은 날 같은 대학에서 대입 면접을 보았으며, 2002년 월드컵을 보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함께 응원했다. 백수 시절에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앞으로 뭐하고 살아야 하나 함께 걱정했고, 쥐꼬리만 한 첫 월급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밥을 나누어 먹었다.

인생의 힘든 시기마다 속리산을 함께 오르며 마음을 다잡았고, 희끗희끗 올라오는 흰머리를 가차 없이 뽑아주며 우리의 청춘이 보다 더 오래 가기를 염원했다. 윤정이는 나의 인생 장면 장면마다 늘 함께 했던 그런 친구이다.
 
나의 친구는 앤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조연일 뿐인 다이애나가 되길 자청했다.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
 나의 친구는 앤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조연일 뿐인 다이애나가 되길 자청했다.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
ⓒ 빨강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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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만화의 조연일 뿐인 앤의 친구 '다이애나'가 되기를 자청하던 나의 착한 친구 18살 윤정이도 어느덧 마흔 둘의 인생을 살고 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까르륵 까르륵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윤정이는 마흔의 시간을 건조하게 버텨내고 있는 듯 보였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마치 나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윤정이는 시답잖은 나의 농담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이모티콘과 함께 '오래간만에 웃는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사소한 것에도 웃음을 찾아내던 친구였던 거 같은데, 한동안 웃을 일이 참 없었나보다. 카톡의 짤막한 글에서도 윤정이는 지쳐보였다. 삶에 윤기라고는 없이 버석버석하게 말라버린 낙엽처럼 느껴졌다.

어제와 붙여넣기라도 한 듯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하고,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진 열정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알 수 없는 미래는 기대보다는 불안함을 얹어줬고, 삶은 재미를 잃은 채 그저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마흔의 삶은 다들 비슷한 건가? 그 글 위로 생기 없이 무기력한 나의 모습이 얼핏 스치는 것 같다.

누구나 인생의 고비가 온다. 때로는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파고를 온 몸으로 막아내야 할 시기가 온다. 윤정이와 나는 운명처럼 바이오리듬도 같은 건지 둘 다 힘든 시기를 겪어내고 있는 것 같다.

곧 바스러질 듯 버석하게 말라버린 우리에게 생기를 되돌려줄 비는 언젠간 내리겠지. 그 시간이 오길 기다리며 우리는 위태롭더라도 결국엔 버티며 살아낼 거다. 조그만 바람이 있다면, 대단히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소소하게 주고받는 카톡 하나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친구로 그렇게 오래도록 남았으면 한다.

내가 사랑하는 가수 방탄소년단의 노래 'Magic Shop'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나인 게 싫은 날 영영 사라지고 싶은 날
문을 하나 만들자 너의 맘 속에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곳이 기다릴 거야
믿어도 괜찮아 널 위로해줄 Magic Shop
 
윤정이가 그녀만의 문을 만들고, 그 안의 매직숍에 도착하면 그곳에선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힘을 내라는 둥, 열심히 이겨내자는 둥, 들을수록 힘이 더 빠지는 쓸데 없는 말들 말고, 그저 조용히 옆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 내가 힘들 때 윤정이가 나의 손을 잡아줬던 것처럼, 나도 윤정이의 손을 잡아줄 거다.

코로나 때문에 얼굴 본 지는 한참 되었지만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는 시간이 오면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 서로에게 잠시라도 단비가 되어주어야겠다. 지난 25년간 그랬던 것처럼. 보고 싶다, 친구야.

태그:#친구, #빨강머리 앤, #다이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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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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