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1 20:27최종 업데이트 20.03.3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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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 사진으로 찍은 낭도의 낭도주조장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부두가 흰색 2층 건물 마을 회관 뒤에 검은 색 지붕의 두 채 건물이 낭도주조장이다. 양조장이 마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주조장 대표는 마을 문화해설사 일도 하고 있다. ⓒ 국립민속박물관

 
오래됐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은 오래되어도 백 년을 넘길 수 없다. 나무는 백 년을 넘긴다. 사람이 머무는 건물이 때로 사람보다 더 오래 머문다. 집도 새로운 소재와 유행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만, 오래 가는 집들이 있다. 궁궐이나 종교 건물이 오래 간다. 그 다음으로 오래 가는 건물이 양조장이다. 하나의 맛을 얻게 되면 그 맛을 지키려고 양조장이 세월을 견딘다.

술 기행차 물돌이 동네가 있는 경북 예천 용궁합동양조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벽돌을 쌓아 만든 2층 건물인데, 1958년에 지었다. 그 양조장 건물이 탐이 나서, 혹시 팔려는 마음이 있거든 내게 팔라고 권순만 대표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양조장 대표는 너무 소박하고, 양조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 왔기에 그에게서 양조장을 건네받는 것은 그의 생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조장을 한참 벗어난 길에 내가 마신 술값도 내지 않았고, 그도 내게 술값을 청하지도 않은 게 떠올라 웃음이 나와 전화로 은행 계좌를 물어보았다. 그 뒤로 그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책 속에서였다.

양조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가장 진솔한 방법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근현대 생활 문화 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최근에 두툼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1권은 <우리 술 문화의 발효 공간 양조장>(502쪽)이고, 2권은 <양조장의 시간 공간 사람>(286쪽)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민속학 연구자 김승유와 변윤희가 2년에 걸쳐서 전국의 막걸리 양조장 660여 개 중 양조장 52개와 누룩 제조장 2곳을 선별해 조사하고, 고문헌의 술 제조법에 해박한 박록담이 쓴 술 제조법을 기록한 보고서였다.

이 책에서 용궁양조장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양조장 건축물로 소개돼 있고, 건축 도면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용궁양조장에 갔을 때는 권 대표와 수다스럽게 말을 나누고 술을 맛보느라 건물 구조를 살피기 어려웠는데, 책에는 조감도까지 나와 있어서 꼼꼼히 살필 수 있었다.
 

경북 예천의 용궁합동양조장 종단면도 ⓒ 국립민속박물관

 
이 책에서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양조장 건축물로 논산 양촌양조장과 나주 남평주조장,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충주 주덕양조장과 서산 운산양조장, 1943년에 지어진 함양 마천양조장의 내력과 구조도 소개하고 있다.

1950년대에 지어진 용궁양조장과 태백 장성양조장, 1963년에 지어진 대전 세일주조장, 1970년에 지어진 보은 관기양조장, 1973년에 지어진 곡성주조장의 공간도 실측도면까지 그려가면서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양촌양조장과 남평주조장은 입체 스캔과 가상현실 촬영까지 진행했다.

양조장의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양조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가장 진솔한 방법이다. 발효실과 제성실과 누룩방이 어떤 동선 속에 있고, 이를 관리하는 사무실과 기술자들의 방이 어떻게 배치됐는지를 살피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 책에서는 지역은 다르지만 시대를 달리해서 지어진 양조장을 통해, 양조 기술과 산업과 제도와 문화의 변화까지 담아내고자 했다.

1권에서는 조사 목적과 방법, 양조장의 탄생과 흥망성쇠, 술의 제조 과정과 도구, 양조장의 공간과 구조, 양조장과 지역 사회, 양조장 주소록, 양조장 실측도면을 다루고 있다. 이중에서 양조장의 공간과 구조를 풀어내는 장이 가장 밀도 있고, 특별하고 흥미로웠다. 또한 탁주, 약주, 소주를 만드는 전국 양조장 주소록까지 정성스럽게 모아두었다.

2권에서는 양조장의 도구와 물건 이야기, 공간 구성, 7명의 양조장 대표 인터뷰, 그리고 양조장과 마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양조장 도구와 물질은 양조장의 특징을 이해하는 좋은 정보였고, 양조장 대표의 인터뷰는 양조장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곰실곰실한 이야기였다.

특히 양조장 동네 네 곳, 술빚는 농가가 밀집한 충남 서천군 한산소곡주 마을, 시멘트공장이 들어서 큰 변화를 겪은 영월군 쌍용마을의 쌍용양조장, 남해안의 외딴 섬의 개도주조장과 낭도주조장, 혹독한 단속 속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금정산성 누룩 마을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시대를 담담하게 바라본 생활의 기록
 

충북 진천 덕산양조장을 배경으로 한 일러스트 ⓒ 국립민속박물관

 
양조장이 물 좋은 곳에 있지 않고, 도심에 있는 이유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배달하기 편한 마을 중심에 있었겠다는 짐작도 드는데, 조선총독부에서 관리하기 편한 곳에 있기를 종용했기 때문이란다. 양조장의 위치, 크기, 그리고 술 빚는 재료까지 통제했던 시절도 보여준다.

서산 운산양조장의 사례에서는 제조 품목까지 통제됐음을 알 수 있다. 운산양조장에서 만들던 약주는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인해 쌀로 약주를 만들지 못하면서 생산을 중단했고, 희석식 소주는 1973년 도 단위의 소주 제조장을 통합하면서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개인은 원하는 대로 마셨을지라도, 만들어진 술은 제도화된 틀 속에서 엄격하게 관리되었던 것이다.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도구와 시설들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낱낱이 펼쳐 놓고 풀어낸 이야기는 책을 충실하게 만들었다. 무릎을 맞대고서 들을 듯한 7명의 양조장 대표들의 이야기는 이 책을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다만 양조장 대표들이 홍보나 과시 차원에서 양조장의 내력을 숨기거나 과장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책에서도 일부 그런 곳이 있는 듯 보였다. 좀더 심도 있는 인터뷰와 공감대가 형성됐더라면 걸러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이 책의 흠이다.

2009년 이후의 막걸리 붐을 타고 막걸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양조장이나 주세법 변화로 새롭게 등장한 소규모 양조장의 사례를 담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재를 담지 않다 보니, 전체가 담기지 않았고 흘러간 추억을 구제하는 인상을 주었다.

2018년 국세청에서 거둔 세금이 283조5천억 원인데, 그 중에서 주세가 3조3천억 원이다. 이제 그 비중이 1%대로 낮아졌지만, 오랜 시절 국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주세였다. 국세청에서 술 단속을 심하게 했던 것도, 세금을 야멸차게 징수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게 많은 주세를 거뒀건만 양조업이나 양조 문화에 대한 기록 작업에는 국가 예산을 아꼈다.

이 책 이전에 양조업 전체를 대상으로 한 보고서가 부끄럽게도 딱 한 번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적이 있다. 1935년에 '주세 1500만 원 돌파와 조선총독부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선주조사>가 발행됐다. 조선을 폄하하고, 왜곡된 내용이 들어 있어 읽기에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거둬내고 보면 당시의 양조 제법이나 현실을 그나마 추정해볼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우리 술 문화의 발효 공간 양조장>과 <양조장의 시간 공간 사람> ⓒ 국립민속박물관

시대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기록은 소중하다.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지나온 시대를 본다. 우리는 지나치게 정치나 사건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기록 또한 그에 편중되어 있다. 왕조사나 철학 논쟁의 거대한 담론은 뚜렷하게 남아 있어도, 생활 문화사나 미시적인 물질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양조장에 대한 조사 보고서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았고 어디서도 하지 않았던 일을 벌인 국립민속박물관의 안목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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