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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을 뜻한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을 뜻한다.
ⓒ 진실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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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4일 박정희 정권은 야당 대표인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박탈시킨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생들의 "유신철폐" 시위가 시작됐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들이 참여하고 18~19일에는 마산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참여자 1058명을 연행했고 마산지역에서 18일과 19일 사이 시위참여자 505명을 연행했다. 20일 자정에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연행자들을 민간임에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부마항쟁으로 불린 이 사건은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궁정동에서 살해함으로써 유신독재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

당시 계엄사령관 박아무개는 지난 2010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 조사에서 "(그때) 공수특전단 1, 3, 5 여단과 해병대 1개 연대가 투입되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부산 일원에 선포된 계엄령에는 총 6615명의 군 병력 중 특전사 2개 여단 2604명의 병력이 시위진압에 동원되었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행과 인권침해

가내수공업자였던 김아무개(24)는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에게 무차별 폭행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9일 퇴근 후 부산 구시청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버스가 오지 않자 남포동 방향으로 이동하려고 시청 앞에 있는 육교를 건너려고 하는 중, 계엄군이 제지해 '왜 버스를 못 타게 하느냐'고 항의하자 '이 새끼 우리가 누군데'라고 욕을 하면서, 무장군인 2명이 나의 어깨를 뒤로 꺾고, 다른 무장군인 1명이 '건방진 새끼'라고 말하면서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세 차례 강타했다.

내가 바닥에 뒹굴자 '개새끼 엄살 부리지 마' 하면서 욕설을 하고, 옆에 있던 군인에게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을 명령한 후 군홧발로 나의 복부를 두세 차례 걷어차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했다. 나는 그 충격으로 잠시 실신하게 되었고, 실신 후에 눈을 떠보니 부산시청 정문 옆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러다 내가 복부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홧발과 진압봉으로 나의 몸을 구타했다."


당시 금은방 직원 전아무개(29)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8일 저녁 7시경 나는 친구와 함께 부산 서면 로터리에서 태화백화점 방면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했는데 포진해 있던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다. 그때 나는 한독병원 맞은편에 있던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해 실신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나는 실신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해 인근에 있는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었으며, 바로 그날 두개골 부위에 대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계엄군의 구타로 인해 두개골 함몰분쇄골절과 앞 치아 여러 개가 뽑히거나 부서졌다."


당시 마산경찰서 전투경찰 서아무개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해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당시 경남대 3학년 최아무개(여, 24)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8일 3·15탑에서 약 300~400명 가량의 학우들과 스크럼을 짜고 구호와 애국가 등을 불렀다. 내가 시위대 앞쪽에 있는데 '요년들' 하면서 갑자기 경찰관 3-4명이 달려들어 치마를 올려서 얼굴에 덮어씌운 채 머리카락을 뒤에서 움켜잡고 찔찔 끌고 갔다. 치마를 들어 올려 얼굴을 덮어씌워서 나의 아랫부분은 속옷이 다 드러나게 되었고, 이러한 상태로 시멘트 바닥에 눕혀진 채로 끌려갔다."

경남대 3학년 옥아무개(여, 22)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시위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형사들이 달려들어 옷부터 찢어 내리고 끌고 갔다. 형사들이 대열 앞에 있는 나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잡아당겨 넘어졌다. 뒤로 넘어지자 형사가 나의 바지 안쪽으로 손을 들이밀고는 더듬더니 나의 바지를 허벅지 쪽으로 해서 찢었다. 속살과 속옷이 다 드러나 거의 실신 상태로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나는 찢어진 바지를 입은 채 지내며 조사를 받았다."

부산대 3학년 이아무개(21)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온천장 파출소 2층으로 기억되는데, 양손과 양발을 묶고 양손과 무릎 사이에 긴 막대기를 끼우고 거꾸로 매달아 놓고 얼굴에 젖은 수건을 씌우고 와사비 물이 든 주전자를 코에 부어대면서 '배후를 말해라, 김영삼이 돈을 주더냐. 누가 시켰냐. 얼마를 주었냐'며 추궁했다. 그리고 부산 보안부대에서는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힌 다음에 큰 방으로 데리고 가 발로 차면서 밟기 시작했다." 

"석방 후 치료받았더니 정신분열증이라고"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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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운영자 노아무개(27)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21일 해군보안부대라는 곳으로 연행되었다. 수사관 3명 정도가 교대로 나에게 남민전과 관계되어 있지 않은지 추궁을 했다. 옷을 벗기기도 했고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도 않았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좌우측으로는 착검한 총을 소지한 병사가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내가 부인하면 수사관은 손으로 얼굴과 몸을 구타했다.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남민전의 일원이라고 허위로 말을 한 사실이 있다."

외국어대 휴학생 황아무개(27)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6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창선파출소 앞에서 검거되었다. 부산 중부경찰서로 인계되었다가 수사관 3명에 의해서 인근 반도호텔로 옮겨졌다. 호텔방에서 수사관들이 '서울에서 무슨 이유로 부산에 내려와서 시위를 한 것이냐', '누가 시위를 하도록 시켰느냐' 등을 추궁했다. 나의 양팔을 뒤로 수갑을 채우고 호텔방 욕조에 눕게 한 후, 얼굴에 수건을 얹고 샤워기로 물을 코 부위에 뿌렸다. 그리고 수갑을 뒤로 채운 채로 호텔방 바닥에 엎드리게 한 후, 가슴에 목침을 대고 묶인 양팔을 90도 위로 올리는 고문을 했다."

동아대 법대 3학년 이아무개(25)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20일 연행되어 부산 영도경찰서에서 수사과장으로부터 파출소 손괴에 대해 추궁받으면서 대나무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다. 10월 24일 무렵에 중앙정보부에서 국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시위배후에 북한을 동조하는 세력이 있지 않느냐고 추궁했다. 나는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했다가 다시 부인했다. 그러면 통닭구이 고문이 계속 되었다. 박 대통령이 사망한 10월 26일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또한 같은 학교 친구 이용수는 고춧가루 고문을 참지 못해 자살을 시도했다. 나와 이용수는 알몸으로 고문받았는데 우리가 자백하겠다고 할 당시 우리를 풀어주었다. 그때 이용수가 불투명 창문을 향해 몸을 던져 투신자살을 시도했는데 창문 밖에 창살이 설치되어 있어 투신에 실패한 것을 목격했다."


부산대 2학년 전아무개(21)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0월 16일 부산대 학내 유인물 200매를 제작했다는 혐의로 10월 21일 자택에서 연행되었다. 동래경찰서에서 40대 가량의 경찰관에게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는데,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고, 이 새끼야 이따위 짓을 하느냐'면서 꿇어앉으라고 해 꿇어앉자 발길질을 3~4번 정도 하고 주먹으로 머리와 귀 부근을 구타했다. 귀가 멍한 상태가 되었지만 당시는 정신적으로 경황이 없었던 때라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지 못했다. 주먹질과 발길질 등은 3~4회 정도 당한 것 같다.

당시 귀가 멍한 증상은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은 때로 구타로 인한 외상이 없었기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당시 구타로 인해 왼쪽 귀는 이후 신경성 난청증세가 시작되었으며, 오른쪽 귀도 구속기간 내(137일) 중이염이 악화되고, 석방된 후에도 만성 중이염이 완치되지 않아 부산대학병원에서 1982년 3월경 수술치료를 받았으나, 그 후 오랜 세월에 거쳐 청력이 소실되어 왼쪽 귀는 고도난청, 오른쪽 귀는 중도난청 상태로 현재 보청기에 의존하고 있다."


경남대 3학년 정아무개(22)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79년 10월 18일 마산경찰서로 연행되어 간단한 심문을 거친 이후 22일경쯤 해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는데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유치장 문을 나섰더니 갑자기 누군가 검은 띠로 눈을 '획' 가리고 지하실 같은 곳으로 끌고 가서는 다짜고짜 발가벗게 했다. 눈은 가리고 있어 누구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나체 상태에서 나를 철봉같이 느껴지는 것에 양팔과 양다리를 통닭구이 모양으로 묶더니 얼굴에 수건을 덮고 그 위에 물을 부어대었다.

당시 고문으로 인해 후유증으로 상당히 고생을 했다.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졌다. 졸지에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야수들에게 먹잇감이 되어서 60킬로그램의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후 석방이 되었지만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 박동이 늘어나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정신상태가 되었다. 석방 후에 치료를 받았는데 정신분열증이라고 했던 것 같다."


고문조사 거쳐 계엄군법회의 회부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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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 3학년 최아무개(여, 24)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지하실에 끌고 가서는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고 있도록 했다. '우리는 간첩을 조사하는 곳이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속옷만 입게 한 채 '지금 누가 옷을 벗고 있다. 누가 할래? 서울에서는 어떻게 했다' 하면서 겁을 주었다. 내가 계속 (남민전과 관계에 대해) 부인하자 '처녀인지 확인해야겠다. 이런 것은 누가 잘하는데 누구를 불러와라'고 하면서 협박하고, 뾰족한 막대기로 팬티 위를 찌르면서, '애를 낳지 못 하게 하겠다' 하고 하복부를 때리기도 했다.

그때 나는 연행과정에서 옷이 찢어진 상태였는데, 군인들 사이로 지나갈 때면 군인들이 나의 가슴과 온몸을 만지면서 희롱했다. 조사를 받은 것보다 군인들 사이를 하루에 몇 번씩 오가면서 성희롱 당하는 것이 더 싫었다. 부마항쟁 당시의 성적 인신공격으로 인해 그 이후에도 외상 스트레스를 받아 고생을 하고 있다. 군인들 속을 통과하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경남대 3학년 옥아무개(여, 22)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일 새벽 나를 검거했던 형사가 나와 최아무개의 한쪽 손목씩 수갑을 채우고 1층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1층 사무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무실 곳곳에서 때리는 소리, 비명소리가 들렸다. 경남대생들이었는데 경찰이 각목과 구둣발로 사정없이 학생들을 때리고 있었다. 나도 땅바닥에 내팽개쳐졌고, 형사는 최아무개의 어깨, 등을 각목으로 내리쳤고 나의 무릎을 구둣발로 밟았다.

또한 10월 25일 눈이 가려진 채 지하실로 끌려갔다. 지하실에서는 의자에 앉힌 채 내 옷을 마음대로 벗기고, 입히고, 막대기로 찌르고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팬티만 남기고 상의는 티셔츠 하나를 입고 있었는데 내가 계속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하니 몸에 찬물을 들이붓고 쇠뭉치를 두드리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일 것이라고 했다. 당시 생리 중이었기 때문에 물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고 나는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남자들 앞에서의 이런 나의 모습에 극도의 수치심이 밀려왔다."


마산 경상고 3학년 이아무개(19)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호기심에 시위에 참여해 돌멩이를 던진 사실은 있지만 북마산파출소에 쳐들어가자고 선동한 일도 없었다. 경찰서에 처음 가보았기 때문에 두려웠고, 경찰관들이 구타하면서 추궁했기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책상 밑에 머리를 숙인 채로 손을 내밀어 경찰관이 찍으라는 곳에 지장을 찍었을 뿐이다. 몇 차례 날인을 한 것 같은데 내용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냥 책상 밑에서 내가 손을 내밀면 경찰관이 알아서 했던 것이다. 사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도 모른다.

1979년 10월 19일 북마산파출소에 연행되었는데 등에 '칼'이라고 쓰고 흉악범이라고 했다. 형사로 보이는 사람이 볼펜을 손가락에 끼우고 구둣발로 밟고 구타를 하면서 누구랑 같이 시위를 했는지 추궁을 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었던 친구들을 불었다. 그래서 친구들도 잡혀오게 되었다. 또 파출소에 있던 방화수(드럼통)에 나를 거꾸로 들어 집어넣고는 배후가 누구냐고 추궁했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방화수에 거꾸로 들어가는 고문을 당했다. 우리가 고등학생이라고 신분을 밝혔음에도 배후세력을 불어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고문과 구타를 했다."


이러한 고문조사를 거쳐 1979년 11월 28일 계엄군법회의는 시위 중 기소된 민간인 87명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20명에게는 긴급조치위반죄 등을 적용해 징역 5년에서 2년까지를 선고했다. 이 가운데 5명은 징역 6월에서 징역 3년까지를 선고받고 대법원을 거쳐 형이 확정되었다.

같은 사건의 소멸시효를 다르게 판단한 사법부
    
 16일 경남대 운동장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19년 10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경남 창원시 경남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발생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첫 정부주관 행사로 열렸다.
ⓒ 경남도청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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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사건 발생 31년 만인 지난 2010년 진실위는 부마항쟁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계엄군은 항쟁 진압과정에서 항쟁과 무관한 시민들까지 구타해 상해 등 인권침해를 가한 점이 인정된다. 뿐만 아니라 최아무개와 옥아무개의 사례에 비추어 보아 경찰의 연행과정에서도 구타 등의 인권침해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시위에 참여해 연행된 시민 및 학생들이 배후혐의에 대한 조사 및 방화혐의, 시위참여혐의에 대해 수사를 받은 과정에서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받았음이 인정된다."

하지만 부마항쟁 발생 41년 만인 지난 3월 12일 부마항쟁 피해자 고 고호석씨는 생전에 제기했던 국가배상 1심 소송에서 패소했다. 고인은 골육종암으로 투병하다 지난해 11월 별세했다. 지난 3월 12일 부산지방법원 1심 재판부는 손해배상 청구권 3년 시효가 소멸했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고인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대생으로 시위 중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와 계엄사령부에서 8일간 고문을 당했다.

고호석씨는 지난 2016년 8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부마민주항쟁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6월 고인은 국가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3년으로 규정돼 있는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를 고인이 부마항쟁 관련자로 결정된 2016년 8월부터가 아니라 진실위가 부마민주항쟁 피해자에 대해 구제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한 2010년 5월로 판단했다.

이런 법원의 판결에 대해 부마민주항쟁재단 관계자는 이런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6월 부산지법 동부지원은 또 다른 부마항쟁 피해자 ㄱ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국가가 손해배상 하라고 판결했다. 이때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기산점(기간의 계산이 시작되는 시점)은 피해자가 부마위원회로부터 관련자로 인정된 시점이었다. 같은 부마항쟁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재판부가 그 소멸시효 기산점을 달리 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이는 대통령이 부마항쟁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약속한 취지에도 역행하는 판결이다."

우리 사법부는 언제쯤이나 같은 사건에 대해 소멸시효 기산점을 달리하지 않고 피해자 중심주의 판결을 내리는 날이 올까?

태그:#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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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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